104화
그 시각, 레티시아가 애타게 찾고 있는 베넷은 영지에 내려와 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며칠 전까지 황도에 있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영지 저택이라니.
저렇게 굴리다간 베넷이 도망을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이 남아나지 않아 쓰러지지 않겠냐며 조용히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베넷은 일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겉으로 보아서는 피곤한 기색은커녕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베넷의 부관들만 불쌍한 거지.
“해서 벨리아 님이 손대신 부분 중에 문제의 소지가 있을 법한 부분들은 다 원상 복구시켜 놓았습니다. 아기씨의 계좌와 개인 재산 문제도 해결했고요.”
“비어 있던 부분은.”
“벨리아 님과 안드레아 님 두 분의 개인 재산으로 채워 두었습니다.”
“잘했어.”
한참 동안 베넷이 건네는 서류들을 확인하고 사인까지 마친 마고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매주 내려올 거 없다. 다음부터는 사람 시켜서 서류만 보내. 뭐 좋은 거라고 포털을 매주 타.”
“괜찮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더 편합니다.”
베넷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대로 공작부인, 그도 아니면 며느리, 그것도 아니면 딸들이 관리하던 안살림을 에시어가 아닌 제가 맡은 일로 말들이 많았다. 한데 매주 영지로 내려가 하던 대면 보고까지 건너뛰고 부관이나 다른 사람을 대신 내려보냈다가 무슨 꼬투리를 잡히려고.
차라리 제 몸 하나 불편한 게 나았다.
“급한 일 없으면 제가 내려오겠습니다.”
“고지식하고 미련한 놈.”
“감사합니다.”
마고의 퉁명스러운 말에 피식 웃은 베넷이 서류를 챙기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건강은 좀.”
“…….”
“어떠하십니-큼까.”
목소리 끝이 갈라져 모양이 좀 빠지긴 했지만.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생전 그런 낯간지럽고 살가운 말을 건넨 적이 없던 베넷인지라, 되레 이 상황에 놀란 건 마고였다.
“너 어디 뭐, 아픈 게냐?”
안경 너머로 저를 올려다보는 마고의 물음에 베넷이 귀 끝을 살짝 물들인 채 고개를 들었다.
“아기씨께서 궁금해하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네가 궁금한 건 아니다?”
“네.”
베넷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대답하자, 마고가 몸을 돌리며 답했다.
“많이 좋아졌어.”
“…….”
마고의 입에서 나오는 ‘좋아졌다.’, ‘괜찮다.’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온 베넷이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칼의 윤기,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땀, 안색, 눈동자 색, 몸의 떨림부터.
그야말로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 성가신 듯 안경을 벗은 마고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뭐, 이 녀석아!”
짜증이 가득한 노기 어린 시선까지.
마지막으로 그 또렷한 시선까지 확인을 마친 베넷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정한 목소리와 함께 평소와 다름없는 총기 있는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좋아졌다는 말이 단순히 그의 말뿐은 아닌 듯했다.
“폴의 치료제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레티시아 그 아이가 찾아낸 게 아니더냐.”
마고가 레티시아를 언급하며 몸을 돌렸다.
“그동안 그 아이가 했던 말 중에 틀린 것이 있더냐.”
불과 반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레티시아가 가주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손녀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달라진 레티시아를 떠올리자-
“그 아이가 얼마나 나를 염려하고 챙기던지.”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마고가 이내 레티시아의 자랑을 시작했다.
“그 아이의 영특함을 내 어찌 그간 몰랐을까.”
“…….”
“샤리에 그 아이가 조금만…….”
“레티시아 아기씨께서 쫓겨난 3급 하녀의 퇴직금을 챙겨 주라 명하시더군요.”
여전히 가주직을 고사하고 있는 샤리에가 떠오른 듯 가볍게 혀를 차는 마고의 말을 끊은 베넷이 고개를 들었다.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샤리에 님의 이름으로요.”
“…….”
순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뭐라 하려던 마고가 입을 꾹 다물었다.
레티시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능히 알아듣고도 남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 맞부딪혀 파바박 불이 튄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마침 적당한 시기에 들려온 노크 소리와 함께 베넷의 부관 페일런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닦으며 안으로 들어선 그의 손에는 작은 소라껍데기 모양의 마도구가 들려 있었다.
“무슨.”
“레티시아 아기씨께서 통화를 원하십니다.”
“녀석.”
페일런의 말에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질 못하고 입가를 씰룩인 마고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마고의 손바닥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고,
“베넷 부관님을……, 예.”
마도구는 베넷의 손에 쥐어졌다.
“흠.”
그러자 이번엔 베넷이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꼬리에 길게 호선을 그었다.
“그럼.”
여전히 허공중에 떠 있는 마고의 멋쩍은 손과 민망함에 살짝 굳어지는 얼굴을 흘끗 본 베넷이 가볍게 말아 쥔 주먹 사이로 헛기침을 했다.
누가 봐도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베넷의 표정에 마고의 살벌한 시선이 닿았다.
“잠시 나가서 받고 오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든 베넷이 그의 시선을 피하듯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잠깐.”
하지만 그는 집무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여기서 받아.”
“…….”
“내 앞에서.”
* * *
내 계획은 이러했다.
리안이랑 쟈이든, 두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는 디아브리아의 ‘그’ 일자리를 내가 제공하거나 아니면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서 그 두 사람을 데려오는 것.
그것도 아니면 내가 둘 다 하던가.
리안이 고집을 부리며 그냥 동화 반 개 받으면서 일하겠다고 우길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그 고집불통.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돈을 아주 많이 써야 하는 일인 것은 확실했다.
근데 마침, 내가 돈이 많네?
그럼 써야지.
“나 돈 좀 써야겠어.”
돈 자랑을 해 보기로 했다.
“그것도 많이.”
- …….
하지만 손으로 크게 원까지 그려 가며 말한 보람도 없이, 껍데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에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네 번쯤 두드리자, 베넷이 먼저 침묵을 깨 주었다.
- 아기씨의 몫이니 당연히 내어 드릴 테지만, 무엇에 쓰시려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목장 살 거야.”
- …….
피어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리안과 쟈이든은 디아브리아의 외곽에 위치한 목장에서 소와 돼지 등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려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일을 시키면서 고작 동화 반 개를 줘?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목장주의 극악무도한 행태에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그러니 내가 그 목장 주인이 되어 보겠다.
- 목장이요?
“응, 디아브리아 외곽에 있는…… 이름이.”
힌트를 얻으려 피어스를 흘끗 돌아보자, 그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여 주었다.
“홀레요.”
“응, 홀레 목장!”
피어스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 소라 껍데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 혹시 홀레 남작의 목장입니까.
“홀레가 남작이야?”
“아, 네.”
피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대!”
그 말 역시 껍데기에 대고 그대로 전하자, 베넷이 짧게 침음했다.
- 흠. 그럼 좀 어려울 거 같습니다. 목장을 갖고 싶으신 거라면 홀레 목장 부근에 있는 린달 목장은 어떠십니까. 그곳이라면 현재 매물로 나와 있어 적당한 금액으로 넘겨받을 수 있…….
“거긴 왜, 안 되는 거야?”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어차피 그 목장을 못 사면 다른 데라도 구해서 리안과 쟈이든을 이직시켜 줄 생각이었으니까.
한데 이 단순한 물음이 뭔가 파장을 일으킨 건지, 수화기 너머에서 주저하는 베넷의 동요가 느껴졌다.
뭐지?
목장주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가졌기에 베넷이 이렇게 당황하는 건가 싶었다.
황후 건가?
아니지, 네투아 공작가의 소유라면 베넷이 이렇게까지 당황할 리 없지.
뭐지?
“베넷?”
의아함에 재촉하듯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베넷이 ‘아, 죄송합니다.’라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 확실한 건 제가 황도로 돌아가 봐야 알겠으나, 그 목장…….
- 그 목장 황제 거다.
음?
난감해하는 베넷의 목소리 너머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섞여들었다.
“할부지?”
‘베넷은 보고하러 또 영지에 내려간 모양이네.’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내 부름을 들으신 듯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 그 목장의 주인인 에드몬 홀레가 황제의 시종이거든.
아, 그럼 굳이 팔지는 않겠구나.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베넷의 말대로 그 옆에 있는 목장을 사든가 아니면 리안과 쟈이든이 좀 더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알겠…….”
- 하지만 레샤, 네가 갖고 싶다면 가져야지.
네?
할아버지가 단호하게 선언하셨다.
- 할아비가 사 주마, 그 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