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되는데.’라는 말을 꺼낼 새도 없이 할아버지가 황도로 올라오셨다.
날아오셨나? 싶을 정도의 빨라 ‘이럴 거면 왜 내려가셨어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참아야 하느니.’
할아버지께서 상처를 받으실까 싶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꼴깍 삼켰다.
할아버지께서 황도를 떠나 영지로 내려가신 건 일종의 정치적인 퍼포먼스였고, 내 말 한마디에 황도로 오신 건…….
‘내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실 테니까.’
해서 할아버지의 허리를 감아 꼬옥 끌어안았다.
“할부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잠시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듯 가볍게 헛기침을 한 할아버지가 한참 만에 내 머리로 손을 얹었다. 하지만 어떤 강도로 쓰다듬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손끝이 내 머리 위에서 어색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되레 그런 투박한 손길에 더욱 깊은 진심이 묻어나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만.
“내가 여기 온 건 비밀이다.”
그렇기에 할아버지의 오네행은 더욱 비밀에 부쳐야 했다.
가뜩이나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직계들이 오늘 일을 알았다간 또 무슨 난리를 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해서 아침 일찍 올가를 불러 수업 대신 마도구를 이용해 할아버지의 외형을 바꾸었다.
“조금 더 젊은 모습은 안 되느냐?”
“되기는 합니다만, 불안정할 겁니다.”
“불안정하지 않을 정도로만 젊게 해.”
해서 타협한 것이 지금보다 5살 젊은 나이에 검은 머리칼 그리고 갈색의 눈동자였다.
“할부지, 다른 사람 같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어쩐지 마도구로 외형 바꾸는 일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내 모습도 할아버지와 맞춰서 변했다.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
어쩐지 이시아의 어릴 적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때는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서, 당시의 내 얼굴이 어떠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쩐지 이런 모습이었을 거 같아.’
손으로 뺨을 문지르다 머리칼을 매만지자, 거울 뒤쪽으로 스윽 하고 나타난 할아버지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기하냐?”
“엄청, 엄청요!”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도 원래의 모습과 비슷한 듯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주름이 조금 옅어진 얼굴, 언제나 차갑던 푸른 눈동자 대신 나무의 온기를 품은 듯한 갈색 눈, 흰머리가 희끗하게 섞인 검은 머리칼까지.
그 변화만으로도 어쩐지 풍기는 느낌이 달라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 다른 느낌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무서워하던 할아버지가 아니라, 어쩐지 진짜 내 할아버지인 것만 같아서.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비슷한 걸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살짝 민망하기도, 우습기도 하여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 같아요.”
“그 정도로 다른 사람 같으면, 전 어떻겠어요?”
배시시 웃으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는 내 시선 너머로 웬 여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음?”
어쩐지 익숙한 듯, 낯선 그 얼굴에 눈을 크게 뜬 채 깜박이자-
“아, 이 모습은 처음이신가요? 올가랍니다.”
올가가 요사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헐.
올가라니.
“올가라구?”
전혀 닮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였다.
아니, 원래의 올가가 못생긴 건 아니었다만, 저 모습은 눈이 휙휙 돌아가게 예뻤다.
“말도 안 돼.”
고개를 내젓자-
“저놈의 이능이 이것이란다.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
“어느 날은 여자로, 할머니로, 할아버지로, 어린아이로 다양하게 살아 볼 수 있죠.”
“…….”
그럼 내가 지금까지 보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는 건가 싶어 그를 빤히 보자,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올가의 붉은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수업 때 보신 모습이 진짜랍니다. 이 모습은 고작해야 며칠밖에 유지하지 못해요.”
“아.”
당연한 거지만, 어쩐지 그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애당초 안심할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럼 가실까요?”
“올가도 가?”
“그럼요.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엄마가 빠질 수 있겠어요?”
엄마라.
어쩐지 뭔가 일이 아주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양옆에 선 할아버지와 올가의 모습을 보자니, 돌이킬 여지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나, 그냥 베넷 말대로 린달 목장 사도 되느…….”
“홀레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니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
“허면? 왜 거길 이야기했던 게야.”
하지만 할아버지의 물음에 ‘거기에 리안이 일해서요!’라고는 말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쟈이든 때문에 한차례 홍역을 치른 뒤였는데, 옆집 남자애 하나 편하게 살게 하겠다고 황제의 목장을 사겠다는 건.
‘할아버지 인내심 테스트지.’
안 될 말이었다.
“홀데 목장이 마음에 꼬옥 들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목장이 사고 싶었는데 제일 먼저 보여서 말씀드린 거…….”
“첫눈에 반한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지.”
“그렇죠.”
“첫눈에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뒤탈이 없어요.”
올가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할아버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
대체 베넷은 어딜 간 건가.
그나마 할아버지 말려 줄 사람이 베넷뿐이라는 생각에 애타게 찾아보았으나, 그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이끌려 마차에 타고, 황도라고 이야기하기에도 조금은 미안한 디아브리아 외곽 끝까지 가는 동안 머리카락 한 올도 말이다!
* * *
“으.”
쟈이든이 삼지창을 닮은 농기구로 바닥을 푹 하고 쑤시자 짐승의 배설물 냄새가 훅 하고 치밀어 올랐다.
코는 냄새에 쉽게 적응한다던데.
이놈의 배설물 냄새에는 차마 적응할 수 없는 듯 삼지창으로 퍼 올릴 때마다 역한 냄새가 느껴져 욕지기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최악은 이 배설물 냄새가 아니었다.
그 배설물 위에서 먹고 자고, 또 그 위에서 싸고 있는 짐승들이 문제였다.
돼지는 물론이고, 소와 양 모두 더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가 배곯아 죽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나오는 그 어떤 짐승의 고기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러워 죽겠네.”
‘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던 쟈이든이 삼지창으로 푹 퍼 올린 배설물을 익숙한 듯 한쪽에 쌓아 올렸다.
“갖다 버려야지, 여기에 이렇게 쌓아 두기만 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짐승이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트려 놔야 치우는 효과가 있는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말해 보아도 목장 관리인들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목장주님께서 그렇게 지시하신 거니, 시키는 대로 해.’
‘어린놈이 뭘 안다고. 그렇게 불만이면 꺼지던가.’
배설물 냄새를 피해 코를 움켜쥔 관리인의 샌님 같던 얼굴을 떠올린 쟈이든이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멍청한 놈들, 짐승들이 다 죽어 봐야 정신 차리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시키는 일이나 해.”
“하.”
자신의 말에 톡 하고 쏘아붙이는 리안을 보며 고개를 내저은 쟈이든이 리안이 모아 놓은 배설물을 푹 퍼 올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뭐 멀리 갖다 버리라는 게 문제지. 내 몸은 이게 더 편해.”
푹-퍽-팍!
“그냥 귀족 놈들이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다.”
“…….”
“나 같으면 이 넓은 목장을 이따위로 관리 안 할 텐데 싶어 말이야. 저쪽에 마구간도 있던데, 거기도 엉망이야. 지진 나서 무너진 땅도 그대로고.”
“다 죽여서 문 닫으려나 보지.”
“굳이 왜?”
“그럴 일이 있겠지. 귀족 놈들이 매번 하는 말 있잖아. 명분.”
리안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배설물을 갈퀴로 팍팍 내리치자, 얼음 조각 같은 배설물들이 사방으로 튀어 리안의 몸에도 묻어났다.
그 모습에 쟈이든이 제 몸에 묻은 배설물은 보지 못한 듯 질색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야! 얼굴에 다 튀잖아! 진짜 더러워 죽겠네!”
“얼른 하고 들어가서 훈련해야 해.”
“훈련은 개뿔.”
훈련이라는 말에 쟈이든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검술 훈련이냐?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체력 단련이고, 솔직히 뻘짓이지.”
“…….”
하지만 리안은 쟈이든의 비아냥에도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배설물을 긁어냈다.
반응은커녕 마치 쟈이든이 한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등을 돌린 채 끊임없이 갈퀴질을 하고 있었다.
그 작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등허리에서 뽀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너 대체 그거 해서 뭘 하려고 하는 건데?”
“기사.”
“기사? 그거 해서 뭐 하려고?”
“…….”
쟈이든이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 리안에게서 다른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야 너희 둘, 이리 와 봐.”
처음 리안과 쟈이든을 이곳에 고용해 준 사내가 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