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09)화 (109/141)

109화

베넷이 어제 말한 ‘마력석’, ‘다섯 배’, ‘단단함’을 단서 삼아 전생의 기억을 쥐어짜고, 짜고, 또 짜서 마른 수건에서 물 한 방울을 겨우 뽑아내듯 떠올린 한 가지는.

마그누스는 마중물이 필요한 마력석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 마그누스의 마중물은 전날 베넷이 이야기했던 엘리멘투의 다섯 배의 마력을 가진 마력석인 디웨스였다.

마그누스 광산은 마치 층층이 쌓아 올린 케이크처럼 맨 위에는 금 같은 일반 광석이 있고, 그 아래로 크림이 발린 듯 디웨스가 깔려 있었다.

마치 마그누스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넓고 얕게 깔린 디웨스를 다 캐내거나, 아니면 디웨스를 뚫고 더 아래로 파고 내려가야지만 아주 깊은 곳에 마그누스를 만날 수 있었다.

전생의 사람들이 폐광 직전의 금광에서 비교적 쉽게 디웨스를 발견한 것과는 달리, 그 너머의 마그누스까지는 찾아내지 못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사람 손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

그렇기에 마법사 혹은 이능력자만 채굴이 가능했고, 그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자연재해에 가까운 지진이 일어나 지반이 뒤틀려야 했다.

그렇기에 아직 금광맥이 살아 있는 목장에서 디웨스가 모습을 드러낸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건.

‘디웨스만 드러났다는 거지.’

조금 더 아래쪽으로 뒤틀려 지반이 솟아올랐다면-

마그누스까지 나왔을 거야.

물론 마력이나 이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만질 수도 없었겠지만. 어찌 됐든 그 존재가 알려지면 내게는 불리했다.

내가 다 먹어야 하는데 귀찮아지지.

그들이 목장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이 목장은 당연히 내가 먹고, 남은 마그누스도 내가 다 차지해 버릴, 아니 아빠 줄 거니까.

리안이한테만 미리 몇 개 알려 줄까.

그럼 나한테 고마워서라도 아빠는 무사하지 않을까.

하지만-

‘걔가 에시어라면 더더욱.’

그런 내 생각을 갉아먹듯 리안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울리며 간질였다.

대체 에시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렇게 적대적인 거지?

폴한테 물어볼까?

폴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안젤라가 죽던 날, 리안과 같이 있었던 사람은 폴뿐이었다.

그녀가 리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면, 폴이 들었을 거다.

에시어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또렷이 들렸겠지.

모르는 이야기라면 흘려들을 수 있어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야기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들리는 법이었으니까.

다만, 폴은 신의를 알고 진중한 사람이니 밖으로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던 것뿐.

물어봐야 하나.

대답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것 말고는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으니,

“아기씨?”

턱 끝을 톡톡 두드리다 부르는 목소리에 ‘음?’ 하며 시선을 돌리자, 베넷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 잠깐 다른 생각했어.”

“네.”

내 말에 쉽게 수긍한 베넷의 반응에 손을 내렸다.

일단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일단 급한 건 우리 애들 일할 곳부터.

“그리고 베넷, 오네나 디아브리아에 에시어 사업장 몇 개 있지? 그중 아이들이 일할 만한 적당한 곳 좀 알아봐 줘.”

“아이들이요?”

베넷이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응.”

그 의아함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들.”

다시금 말을 반복한 베넷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택에 일을…….”

“그건 안 돼. 에시어인 거 티 안 나는 곳으로 부탁해, 베넷. 이왕이면 오네, 안 되면 디아브리아쪽으로 알아봐 줘. 일은 적당히 힘들어야 해. 편한 건 안 돼. 그 대신 돈을 정당하게 줘.”

“네, 그렇게 하죠.”

“고마…….”

“대신, 왜 그러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해맑게 웃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베넷이 벗어 놓은 안경을 도로 올려 쓴 채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 시선만으로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자, 팽팽한 긴장을 누그러트리듯 베넷이 말을 이었다.

“옆집 남자아이에게 마음을 쓰시는 이유에 대해서요.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기씨와는 그 어떤 접점도 없는 아이인데……. 궁금합니다. 따로 이유가 있으신지요.”

리안에 대해 당연히 알아봤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미 조사를 끝마친 베넷의 물음에 잠시 그를 빤히 보았다.

내 이능을 알고 있는 그의 정중한 물음 속에는 ‘혹시 리안을 챙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궁금함이 느껴졌으니까.

궁금할 만하지.

그는 내 이능이 예지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해서 그의 물음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잘생겨서!”

“…네?”

순간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베넷을 보며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리안이 잘생겼잖아. 첫눈에 반했어.”

“첫눈에 반했다니, 큽. 그런 말은 어디서…….”

“그런 걸 뭘 배워야 아나? 구냥 아는 거지!”

“아.”

두 뺨을 붉히며 헤헤 웃자, 잠시 멍한 시선을 갈무리하듯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베넷이 이내 피식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요.”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표정이 어쩐지 유치원생들이 연애하는 걸 보는 둣한 얼굴이었다.

그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미소에 어깨를 으쓱했다.

베넷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무 각 잡고 ‘리안이가 사실 황자야.’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런 식으로 살짝 방심하게 만들어 놓고는 힌트를 줘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베넷은 알고 있어야 해.’

중요한 시점에서 아빠를 도와 궁내부와 행정부에 말단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베넷뿐이었으니까.

지금은 내게도 중요한 시점이었지만, 리안에게도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겪어 내야 할 고행의 언덕을 잘 넘어갈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아니 어른을 만나는 것.

물론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가장 쉽게 해결될 수 있을 테지만, 할아버지는 분명 이걸 이용하려고만 하실 테니.

‘리안이에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거야.’

고로 남은 건 베넷뿐이었다.

“리안이 머리카락 색이나 얼굴이 평범하진 않잖아. 엄청, 엄청 예쁘지? 마치 귀족 같아! 아니다, 진짜 귀족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구치? 그럼 레샤랑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출생의 비밀, 뭐 그런…….”

“흠흠.”

내 말을 끊듯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베넷이 흘끗 옆 벽을 보았다.

“아!”

‘할아버지께서 듣고 계신 모양이네.’

하마터면 할아버지한테 크게 밉보일 뻔한 리안의 이야기를 먹어 삼키듯 입을 다문 채 어색하게 웃었다.

“…건 아니겠지만, 그래두 혹시나 귀족이면 좋겠다, 구치?”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에 반응하듯 베넷이 즉각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아기씨, 피어스입니다.”

“들어와- 아, 마따!”

순간, 피어스의 등장과 함께 마치 연상 기법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리안과 쟈이든의 모습에 박수를 짝 소리 나게 치며 소파에서 폴짝 내려왔다.

‘잡으러 가야지.’

피어스의 신호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베넷에게서 등을 돌렸다.

“베넷, 안녕. 나 할 말 다 했어.”

“아기씨?”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한 듯 베넷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 어. 나 깜빡한 거 있어서 금방 갔다 올게!”

그러곤 쾅 소리가 나게 문을 열자, 문 앞에 선 피어스가 보였다.

“아기….”

“어딨어?”

“집에 있습니다.”

“확실한 거지?”

“네.”

“알겠어!”

피어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1층으로 내려가 급히 헤일을 재촉해 가방을 꺼냈다.

“헤일, 가방!”

그러곤 그 안에 어제 펠이 가져온 빵을 와라라 쏟아부었다.

그리고 몇 개 없는 과일도 넣고, 어제 산 우유병은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리안이 안 받는다고 고집부리면 쟈이든이라도 줘야지.

어쨌든 둘이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까.

난! 쟈이든 주인님이니까!

내가 내 사람 입에 뭐라도 넣어 주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스스로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몸을 돌렸다.

“나 가따…….”

“아기씨, 이것도요.”

그러자 헤일이 가방 안에 육포를 넣었다.

내가 어딜 가는지 알고 있는 듯 가방 속에 깊숙이 넣어 주는 헤일의 손길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웅!”

이번엔.

현관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반드시 네놈들의 얼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끌어안고 있는 유리병을 고쳐 안으며, 빙 돌아 뒷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아우, 배고파!”

“안에 빵 있잖아. 그거 먹어.”

“그거 네 몫이잖아.”

“난 배 안 고파. 너 먹어.”

“됐어. 너 며칠 굶었잖아. 그러다 죽는다.”

“안 굶었어.”

“거짓말하네.”

역시 먹을 게 없었구나.

코끝이 살짝 시큰거렸다.

일단은 이거라도 억지로 안겨 주는 게 우선이겠다 싶어 울타리에 바짝 붙어선 그 순간.

“쟈이….”

“근데 그 아이 죽은 거겠지?”

리안을 향한 쟈이든의 말이 귀에 박히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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