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자, 우유도 마시고.”
입을 우물우물 움직이는 척 시범을 보이며 우유병을 내밀었다.
“목 마르니까 얼른.”
하지만 우유병을 건네는 내 손과 오물거리는 시범을 보이고 있는 내 입을 번갈아 보던 그가 손등으로 제 입술을 벅벅 닦았다. 하지만 질색하는 행동과 달리, 그의 귀 끝은 통제를 벗어난 듯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녀석, 부끄러운 거구나?
뭐 이 정도로.
쑥맥이네, 우리 리안이.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빵을 올려놓았다.
“얼른 먹어. 이것도 먹고, 이것도 마시구.”
일부분 뜯겨 나간 동그란 빵을 한참 바라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내 얼굴이 너무 가까웠던지, 흠칫 놀란 얼굴로 상체를 뒤로 쑥 뺀 그가 이내 얼굴을 화악 하고 붉혔다. 빵을 움켜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는 그의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귀여웠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야.
아무리 싸가지 없이 굴어도 이 얼굴이면 다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으니.
그래, 괜히 남자 주인공이겠어?
이 정도 까칠함은 있어 줘야지.
이 얼굴에 다정까지 하면 소설이 재미없지.
이 소설 서사 최고네.
그 단순한 사실과 레티시아,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리안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캐릭터임을 상기하며 검지로 코끝을 슥슥 문질렀다.
잘해 줘야지.
“빵은 같이 먹어. 매일 아침에 문 앞에 놓고 갈게.”
“필요 없…….”
“너한테 주는 거 아니구, 쟈이든 주는 건데?”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쟈이든한테는 내가 주인님이니까. 군데 같이 사는데 쟈이든만 주고 너 안 줄 수는 없…….”
“안 줘도…….”
하지만 그 순간-
꼬로록- 꾸룩-
내내 굶주리다 미미하게나마 음식이 들어가니, 그의 위장이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꼬로록 하고 배에서 난 선명하고 큰 소리에 리안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쯧- 그러니까 자존심 좀 적당히 부리지.
아무래도 이번에도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줘야 할 거 같았다.
“그.”
“나중에 갚아. 그냥 주는 고 아니야.”
“…….”
“너 나한테 빌린 돈두 있잖아. 나중에 그거랑 이 빵값도 나중에 줘.”
이렇게 푼돈으로 생색내고는 나중에 아주 크게 돌려받으려는 내 심보를 알면 리안이 뒤집어질 테지만.
안 들키면 그만이지, 뭐.
이런 식으로 가랑비에 옷 젖게 만들면 뒤통수 맞았다는 자각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자각할 때쯤엔 내가 없을지도 모르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내 마지막을 상기하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어.
12년.
그 시간 안에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이자 바닥에 떨어진 검이 눈에 들어왔다.
맞다. 검술.
리안이 오네에서 이능 발현을 하려면 지금쯤은 검술 훈련을 받고 있어야 했다.
과거에는…….
[혼자 배우셨다는 말씀입니까.]
[네.]
[대단하십니다. 역시 검기를 발현하신 분께서는 다르시군요!]
맞아, 남자 주인공 버프를 받아 혼자 이능을 개방했었지.
그걸로 대단하다 말이 많았지만, 홀로 그 고통을 겪어 낸 것. 그 자체가 엄청 고통스러운 것임을 모두 잊은 듯한 찬사였다.
그리고 그 찬사 속에서 그가 힘들었던 걸 알아준 건 여주뿐이었고.
그렇기에 그 고통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거지만-
검술을 미리 배우게 할 수는 있지.
어차피 그가 황실에 들어가는 것도 시기를 조금 조정할 생각이니, 미리 검술을 익혀 수준급에 다다라 있으면 여러모로 훨씬 수월할 거였다.
그렇다면.
“우와. 리안아, 너 기사되려구 연습하는 거야?”
“…….”
“대단하다. 근데 기사 되려면 검술이랑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선생님 소개시켜 줄…….”
“됐어.”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얼굴을 붉혔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다시 가시를 세운 모습이었다.
“혼자 해도 충분해.”
“야, 충분하기는 무슨. 그 실력으로 백날 해 봐라 기사는커녕 기사 할아버지도 못 될 거다. 자존심 그만 부리고 차라리 주인님한테 도와 달…….”
“조용히 해, 쟈이든. 내가 한 말 잊었어?”
‘에시어라면 더더욱.’
다시금 귓가를 스치는 리안의 차가운 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물어볼까?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에시어라면 왜 더더욱 안 되는 건지.
“리아…….”
하지만 손을 뻗듯 부르는 내 목소리를 저버리듯 리안이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어디 가?”
“방위대에.”
“왜?”
“아까 들었잖아.”
까칠한 대꾸에 어쩐지 가슴께가 시큰해지는 것만 같았다.
얘는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싫었다가 좋았다가, 지금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가는 금세 날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내 머리로는 도통 그의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봐.
얼굴을 붉히면서 훈훈한 분위기였다가도 이렇게 차가워지지 않나.
대체 뭐야. 이 자식.
내가 그에게 애정을 갈구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니 망정이지.
그에게 사랑을 요구했다간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잇 좀 적셨겠다 싶었다.
차라리 다행이야.
그런 건 아니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정을 다스리듯 길게 숨을 몰아쉬자-
“그거 진짜 하려고?”
쟈이든이 그를 붙잡듯 고개를 돌렸다.
“어. 나도 찝찝하고, 너도 그렇다며. 그럴 바엔 차라리.”
“안 돼.”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들어온 듯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막아 세웠다.
“가지 마, 방위대.”
“왜?”
“…….”
내 말에 리안이 몸을 돌렸다.
설명을 바라는 그의 시선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젠장.
좋은 관계는 진짜 물 건너갔네.
하지만 그를 이대로 방위대에 보내는 건,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걸 그냥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남자 주인공이니 죽지는 않겠지만, 크게 다치거나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럼 효과가 떨어져.’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리안이 홀데 목장에서 아이들이 죽었다는 걸 고발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오히려 섣부르게 들쑤셔 놓아 극적인 효과를 떨어트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를 말려야 했다.
“소용없을 테니까.”
“…….”
“너도 전에 겪어 봤잖아.”
리안의 손을 흘끗 보자, 이내 내가 뭘 이야기하는지 알아챈 그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순간 그가 온몸으로 느끼는 열패감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만 어쩔 수 없었다.
“방위대에 알려 봐야 소용…….”
“역시, 너도 똑같구나.”
“…….”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냐고, 귀족들에게 그런 건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일 뿐이냐고.
리안은 나를 향한 시선 하나로 그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너도 다른 귀족들이랑 똑같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난 지금도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도 귀족이니까.”
“…….”
“알고 있었구나, 언….”
하지만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는 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에시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에시어라면 더더욱.’이라며 내게 거리를 뒀던 거겠지.
그리고 그 시기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리안이네 집이 불타고 옆집으로 이사 왔던 그 시기.
그 이후로 달라졌으니까.
그렇기에 정정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향한 그의 오해를 그대로 두었다.
지금 그걸 아니라고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어찌 됐든 난 그 아이들의 죽음을 이용하고 있는 귀족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구.’
그리고 어린애의 치기 어린 감정에 같이 놀아날 수는 없지 않겠나.
모습은 이래 봬도 난 어른인데.
해서 리안을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그래두 방위대에는 위험하니까 가지 마. 그 목장 귀족 꺼래. 네가 말해 봐야 안 통할 거야. 아주아주 높은 사람 꺼라고 했으니까.”
“네가 그 목장을 어떻게.”
“귀족이니까.”
잘난 척을 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쟈이든이 멋있다며, 뒤에서 작게 박수를 쳤다.
하지만 쟈이든 눈에 멋지면 뭐 하겠나.
리안은 내가 귀족임을 언급한 순간부터 나를 향한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감추질 못하고 있는데.
소설 서사 뒤집기, 참 어렵다.
뭐 난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아빠만 살릴 수 있으면 되는데-
리안에게 잘 보여서 편히 가려 했던 그 안일한 생각을 지금이라도 돌이켜야 하나 싶었다.
리안이한테만 기대는 거 말고, 플랜B를 하나 더 만드는 방향으로.
하지만 만약에 소설 서사를 뒤집을 수 없다면 리안이 황태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
플랜B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어.
가문을 버리고, 아빠만 살리는 방향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둘 다 살리는 건 소설 서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 같으니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가 임박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그가 내 플랜A였으니.
마지막까지 최선은 다해 봐야지.
잘해 줄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어디까지 잘해 줄 수 있나, 싶게끔 잘해 줄 작정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문제는 내가 어른들에게 이야기해 볼게. 그러니까 넌 그냥 있어. 그리구 검술 배우고 싶으면 내 호위에게 배워. 말해 놓…….”
“됐어.”
“…….”
‘그래, 말을 말자.’라고 하기엔-
“고집불통.”
열이 뻗쳐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멍청이, 말미잘, 똥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