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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18)화 (118/141)

118화

탁,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 앞에 선 베넷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는 내내 ‘내가 지금 가주님과 이야기를 하고 나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을 바짝 긴장한 채 대화를 해야 할 정도로 단 하나도 그냥 넘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고작 6살인데.’

꽉 닫힌 문을 돌아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아기씨가 이능을 드러낸 이후부터 줄곧 현명하고, 똘똘한,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앞뒤로 살피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히 앞에 놓인 상황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살피고 있었다.

제가 만났던 그 누구보다 뛰어난 그녀의 미래가 온몸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기대가 되었다.

사실 이능을 발휘한다 해서 무조건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올가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이능만으로 머리가 좋아지지는 않죠.’

이능으로 예지만 가지고 있다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걸 설명하고 묘사하는 걸로 그쳤을 거였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것들을 해석해서 자기 걸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중립이라구.’

‘우린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황제 폐하 일어나실 거야. 안 일어나시면 울 할부지랑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돼.’

황제가 쓰러졌다는 것 하나로 어느 황자에게 줄을 대야 하나, 고민하던 자신을 다잡아 주지 않았나.

거기다 제가 빵부스러기처럼 흘린 작은 단서들을 조합해 황제 폐하와 가주님이 만나셨을 거라 예상하는 것까지.

‘그건 단순한 6살이 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지.’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기씨는 ‘나 곧 7살이거든?’이라고 발끈하며 턱을 올려 들겠지만.

‘그 모습은 또 그 모습대로 사랑스러우시지.’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그려진 베넷이 흘끗 문을 돌아보곤 몸을 돌렸다.

‘얼른 말씀하신 것부터 해결을…….’

하지만 채 한두 발자국 가기가 무섭게 레티시아의 방문이 열렸다.

“어?”

그 열린 문 사이로 레티시아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베넷, 아직 안 갔어?”

“아, 예. 지금 가려고. 큼.”

문 앞에 오래 서 있었던 게 조금 민망한 베넷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지만 그런 베넷의 반응에 해맑게 웃은 레티시아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다행이다!”

“예?”

“그러잖아도 나 베넷한테 부탁할 거 있어서 잡으러 가려던 찰나였거든!”

배시시 웃으며 레티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저를 잡기까지 해서 하려는 말이니, 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임은 확실했으나.

“네, 말씀하십시오.”

레티시아가 말하는 거라면 뭐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자세를 바로 한 베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잠시 베넷을 빤히 보면 레티시아가 배시시 웃었다.

“있잖아, 선생님을 한 명만 더 구해 줬으면 좋겠어.”

“선생님이요? 어떤…. 아, 혹시 올가와 키에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

“아니아니, 그런 거 아니구!”

베넷의 말을 막은 레티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구, 옆집에 쟈이든 있는 거 알지?”

쟈이든?

순간, 누군가 했던 베넷이 이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걔네, 아니 걔한테 선생님을 좀 붙여 주고 싶어서.”

“…….”

선생까지?

일자리에, 교육까지?

분명 그 대상이 쟈이든 한 명에 한정된 것은 아닐 터.

옆집에는 리안이라는 아이도 있었고, 레티시아가 그 리안이라는 아이를 과도하게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아기씨께서 의도하시는 뭔가가 있는 걸까?’

물론 아기씨는 그냥 ‘잘생겨서!’라며 웃어넘겼지만, 매사에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판단을 하는 분이 아닌가.

그걸 생각해 보면.

‘뭔가 있어.’

단순히 어린아이가 가질 호감의 정도가 아니질 않은가.

‘일자리부터 교육까지.’

분명 뭔가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 그 잘생겼다는 말을 하며 ‘귀족 같지 않아?’라고 강조하시지 않았나.

“베넷?”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베넷이 레티시아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인 제국어 쓰기와 읽기부터 수학까지. 진짜 기본적인 거 알려 줄 수 실력이면 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부탁해.”

소문을 내지 않을 사람을 보내라는 레티시아의 말에 베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

“다른 과목은 괜찮으십니까?”

“응?”

“검술이나 예법 같은 거요.”

“아, 검술은 내일부터 피어스가 알려 줄 거야. 예법은…….”

베넷의 말에 레티시아의 눈동자가 떼굴 굴러가는 게 보였다.

어쩐지 제가 던진 미끼에 걸릴 듯 말 듯한 상황에 긴장한 베넷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자,

“아냐!”

레티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예법은 괜찮을 거 같아.”

“아.”

귀족은 아니라는 건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 베넷이 그녀를 빤히 보자, 레티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베넷?”

왜 그렇게 보냐는 듯한 시선에 금세 정신을 차린 베넷이 아니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기본적인 거라면, 아마도 제 부관들도 가능…….”

하지만 이내 말을 삼키듯 멈춘 베넷이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일단 제가 직접 확인을 하는 게 옳았다.

“알겠습니다.”

“…….”

“최대한 말 나오지 않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내 줘.”

* * *

“자, 여기. 오늘치다.”

급여 주머니를 건네는 관리인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리안과 쟈이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생했다.”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벌목장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관리인의 뒷모습에 쟈이든이 주머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따라 좀 묵직하지 않냐?”

“…….”

“더 줬나?”

살짝 들뜬 표정으로 주머니 끈을 주욱 당겨 푼 쟈이든이 손바닥에 동화를 쏟아 냈다.

“하나, 두울, 셋.”

하지만 잔뜩 신이 나서 돈을 세던 쟈이든의 표정이 조금씩 뾰로통하게 변하더니.

“칼 같이 동화 60개네. 쳇!”

주머니에 돈을 쏟아 넣으며 이내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쟈이든의 모습에 혀를 찬 리안이 주머니를 밀어 넣었다.

“배부른 투정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화 반 개, 둘이 합쳐 겨우 1개 받았어. 우리한테 이만큼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고작 나뭇가지 모아 정리하는 게 전부인데.”

“누가 뭐래?”

“네가 지금 뭐라고 하고 있잖아.”

“그래, 아주 너 잘났다.”

바른 소리를 해 대는 리안을 보며 입맛을 쩝, 하고 다신 쟈이든 역시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가자.”

12월의 말.

그야말로 살이 에일 것 같은 추위였지만, 언덕을 내려가는 벌목장의 인부들 몸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난 뒤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리인을 포함한 인부들 대부분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여느 일터와 달리 이곳은 노동 강도에 따라 정당한 임금을 제공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반 평민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일은 힘들어도 돈 많이 벌리니까 좋다. 그치?”

“…어.”

“처음 거기 그만뒀을 때 막막하긴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운이 좋아.”

쟈이든의 말에 리안이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우연히 펠의 지인이 벌목장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정리할 아이들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들을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래,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 상황이 지속됐다면 홀데 목장으로 다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린애들을 써 주는 곳은 그곳이 유일했으니까.

‘지나간 일이야. 생각하지 말자.’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였다.

괜히 허황된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릴 거 없이.

“저녁은 뭐 먹지?”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나 오늘 집에 빨리 가야 하는데 그냥 대충 빵이랑 수프 먹을까? 아, 그럼 또 체력이 너무 달리는데.”

“점심에 고기를 그렇게 먹고도 체력이 달리면, 네 몸이 너무 비양심적인 거 아니냐.”

“하긴.”

점심에 웬만한 어른도 배부르다고 할 만큼의 많은 음식을 쌓아 놓고 먹던 쟈이든을 떠올리며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얼른 가서 저녁 먹자. 오늘 검술 가르쳐 주러 온다던데. 주인님도 오시려나. 아, 맞다. 너 새끼 때문에 안 오실 수도 있겠네.”

“…….”

빈정거린 쟈이든이 말없이 가만있는 리안을 흘끗 보았다.

“야, 너도 어지간하면 그냥 배….”

“시끄러워.”

쟈이든의 말을 단칼에 거절한 리안이 그를 앞서 성큼성큼 걸었다.

그 뒷모습에서 여전히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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