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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20)화 (120/141)

120화

베넷이 왜 여기 있지?

부관이나 다른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베넷이라니.

“들어오시겠습니까?”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자 활짝 문을 연 베넷이 웃으며 길을 내주었다.

“사람을 찾기가 어렵더군요.”

“아아.”

“그나마 제가 제일 한가해서요.”

‘한가’요?

그게 베넷과 어울리는 단어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자, 그가 눈을 찡긋하며 나를 향해 웃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자고 말하는 듯한 미소에 일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죠.”

제집인 듯 자연스럽게 이끄는 베넷의 말에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님!”

그러자 또다시 커다란 대형견이 꼬리 흔들고 있는 것처럼 손을 붕붕 흔들어 대는 쟈이든이 보였다.

그리고.

“어?”

그 옆에 앉아 있는 리안까지.

리안이다.

그 순간 와락 치미는 반가움에 며칠 전 일을 잊고 또 웃어 버릴 뻔한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봐서 그런가?

그새 조금 큰 건지, 선이 굵어진 것만 같았다.

얼굴도 까칠한 것 같고.

고생스러웠나?

일이 힘든가?

아니면 지금이 한참 클 시기여서 그런가?

내가 잘 챙겨 주라고 당부했으니, 먹는 건 잘 먹고 있을 텐데.

근데 베넷, 쟈이든이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수업 듣는 건가?

줄줄 흘러나오던 생각의 끝에 심장이 파박파박 하고 뛰었다.

드디어!

하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진정해.

쟤가 누구야. 리안이야.

나를 끔찍이도 싫어하게 된다는 그 ‘칼리안 율리아스 피노 콘스타누 베아테 폰 소모멧’ 말이다.

그러니 진정하고 상황을 다시 봐야 했다.

그래.

그냥 잠깐 자리에 앉아 있던 걸 수도 있잖아?

우연히 1층에 내려왔다가 다리가 아파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쟈이든에게 아주 급하게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이 길어져서 자리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걸 수도 있고 말이야.

수업을 받는 건 아닐 거야.

그래, 수업은 무슨.

속으로 허공중에 손사래를 치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기대하지 마.

주먹을 꼭 쥔 채 눈을 부릅뜨자, 베넷이 나를 향해 다정히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그게.”

베넷의 다정한 물음에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시선 그대로 쟈이든을 돌아보았다.

“쟈이든 보려구.”

“나? 아니, 저요? 진짜요?”

“으응.”

신이 난 표정으로 스스로를 가리킨 쟈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내 앞까지 우다다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요? 뭔데요? 무슨 일인데요? 저를 왜 보려고요?”

어쩐지 신이 잔뜩 나 양 볼까지 발갛게 상기된 쟈이든의 표정에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쟈이든을 보며 웃었다.

“아, 오늘 수업 한다구 하길래. 피어스랑 훈련하는 것두 못 봐서. 보려구 와찌.”

“검술 훈련은 오지 마세요. 피어스, 그 개자…. 아니, 그분이 어찌나 사람을 잘 굴리시는지. 주인님이 와서 보면 눈물 나실 거예요. 괜히 저 고생하는 거 보면 마음만 아프실 테니까 오지 마세요.”

쟈이든의 입에서 슬쩍 나왔다가 들어간 욕설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구래두 나중에 맛있는 거 만들어서 한번 갈게. 궁금해.”

“진짜요?”

방금 전 오지 말라고 했던 말이 빈말이었음을 증명해 주듯 쟈이든이 환하게 웃었다.

너무나 극명한 표정 변화와 솔직한 감정 표현이 웃기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전생이 그리워졌다.

전생에서 쟈이든이랑은 자주 놀았는데.

물론 당시의 주인님인 리안을 나로부터 지키기 위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때가 전생의 삶에서 그나마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 순간들이 마치 악덕 빚쟁이처럼 돌변하긴 했다만.

지금은 좋게만 남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쟈이든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웅, 그러니까 열심히 배워야 해. 피어스랑 훈련도 열심히 하구. 그래야 나중에, 아니 그래야 네가 편할 거야.”

순간 나오려던 말을 참아 내며 시익 웃었다.

“베넷한테두 열심히 배워. 베넷한테 배우는 건 진짜진짜 엄청 대단한 거야. 베넷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데.”

“아, 진짜요?”

미처 몰랐다는 듯 흘끗 베넷을 본 쟈이든이 이내 나를 돌아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열심히 배울게요. 전부 다.”

시익 웃는 쟈이든의 표정을 보며 기특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쟈이든의 팔꿈치 너머로 보이는 리안에게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리안의 옆모습을 보자면, 잠깐 다리가 아파서 앉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배우려고 하는구나.

그 모습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피어스한테 검술을 배우지 않는 게 조금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그거야 나중에 배우면 되는 거고. 제국어는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좋았으니까.

하지만.

“나 올라간다.”

음?

그런 내 바람은 리안의 말 한마디로 와자작 하고 깨졌다.

“응? 왜?”

설마 나 때문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안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빤히 보는 그의 시선에 나 역시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리안이 먼저 시선을 돌렸고, 아예 몸까지 돌려 버렸다.

뭐지?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는 리안의 뒷모습에 쟈이든을 올려다보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 이 집 구해 주신 분이라서 인사하러 내려왔다가 잠깐 앉아 있던 거였어요.”

“아.”

괜히 기대할까 봐 머릿속에 억지로 그렸던 가정이 진짜였구나 싶어지자 약간 허탈해졌다.

솔직히 기대를 안 하겠다고 했던 말들 전부 자기기만이었으니까.

에효.

자꾸만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만 같아 애써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괜히 쟈이든이 더 미안해하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미안, 주인님.”

내가 왜 쟈이든에게 수업을 권했는지, 그도 잘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순간, 아까 느껴졌던 양심이 다시금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왜 자꾸 사람을 도구로 이용해?’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지금 내가 하는 짓이 전생에서 겪었던 상황이랑 뭐가 다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를 이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숙부, 숙모들부터 주변 하녀들까지.

그리고 이 소설의 서사!

이 망할 놈의 서사에 이용당하는 게 싫다고 질색하면서도 정작 나는 리안의 서사를 위해 쟈이든을 이용하고 있었다.

젠장.

“왜? 쟈이든이 왜 사과해?”

“아.”

“사과할 상황이 아니면, 사과하지 마.”

단호하게 고개를 들어 쟈이든과 눈을 맞췄다.

“이건 쟈이든이 사과할 문제가 아니야. 쟈이든은 내가 하라는 대로 수업 잘 받구, 훈련 잘 하면 돼. 그래서 나중에 피어스처럼 나 지켜 주는 사람이 되어 줘. 그러면 돼.”

내가 언급하는 피어스라는 단어에 순간 쟈이든의 눈빛이 살짝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뒤쪽에 서 있던 피어스에게로 향하는 시선까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에 급 뜨거워져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 기척에 도로 나를 응시한 쟈이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맡겨 주세요!”

그리고 나는 진짜, 정말 몰랐다.

내가 오늘 했던 이 말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말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이제 오네에 온 지 좀 됐으니, 슬슬 움직이셔야 할 텐데요.”

“…….”

“직계들이 오네에 오는 이유, 알고 계신 거죠?”

올가가 이능 수업을 마친 뒤 넋이 나간 내게 말을 걸었지만, 고개도 까딱할 힘이 없어 눈동자만 굴렸다.

“알아.”

하지만 알면서도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일보다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하고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보면.

첫 번째, 홀데 목장을 사기 위해서 마법부를 움직였고, 홀데 남작을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황제가 다 알고 있다고 해서 김이 빠졌지만.

그리고 아무래도 황제가 할아버지 때문에라도 목장을 절대 팔지는 않을 거 같았다.

그럼 하는 수 없이 홀데 남작을 설득해야 하는데.

일단 그건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다른 금광 건이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번 리비스에서 벌어진 펠루아나와의 전쟁에 대한 내용을 제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물론 이것도 내가 고군분투하고 있다기보다는 베넷과 그 부관들의 몫이긴 했다.

잘하고 있겠지?

황색 신문사를 섭외하는 게 관건이긴 했으나.

그들의 일 처리는 아직까지는 뭐, 흠잡을 데 없었으니까.

한번 믿어 보기로 하고.

세 번째로는 스벤 백작에 대한 일이었다.

아빠를 건드린 죄를 더해 훗날 리안에게 마수를 뻗치는 그의 힘을 빼놔야 하는데.

각이 안 나와.

지금 당장 스벤 백작을 무너트릴 방법이 없었다.

고작해야 그가 디웨스 마법석으로 돈 벌 방법을 무력화시키는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그건 이미 큰 부자인 그에게 작은 타격조차 입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자리까지 올라간 위인이니, 약점 역시 존재할 텐데…….

그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어야 해.

충분한 준비 없이 일을 벌인다면, 어설프게 벌통을 툭 건들어 괜히 벌들만 화나게 만드는 꼴이 될 테니까.

벌통 전체를 불사르지 않는 이상,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되레 내가 당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건 조금 더 고민해 보고.

다음 네 번째.

솔직히 지금은 이게 제일 중요했다.

겨울이 지나 디아브리아에 퍼지게 된 전염병.

카타르후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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