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21)화 (121/141)

121화

카타르후스.

전염병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히는 열 감기인 카타르후스는 치사율이 높았다. 그간 테파로아에서 벌어진 그 어떤 감기도 이 정도의 치사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엄청난 역병이라고 생각했지.

물론 처음에는 다들 감기가 유행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엔 항상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그 ‘감기’로 사람들이, 특히나 어린 아이들이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 끝내 죽어 나가는 걸 보며 사람들은 다들 공포에 떨었다.

신께서 벌을 내리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벌을 지켜봤다.

아니, 정확히는 귀족들과 황실이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평민이었으니까.’

열경련을 일으키다 끝내는 쓰러져 죽어 가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오네와 디아브리아 출신이었다. 개중에 몇몇 귀족 아이들도 속해 있기는 했으나, 그건 아주 미미했다.

죽은 아이들의 출신은 대부분 한미했다.

물론 황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망자가 늘어나고, 불 위에 올려놓은 솥단지 속 물처럼 천천히 끓어오르는 성난 민심을 자제시키기 위해 근방의 의원들과 치료소, 치유 이능력자까지 동원하기는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어린아이들의 면역력은 어른과 달랐고,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병에 걸리는 아이들은 점점 늘어났고, 치료할 수 있는 인력은 한계가 있었다.

이 병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귀족들의 위생 관념을 익혀야 했다.

“아기씨도 꼭, 손 잘 닦으셔요. 요즘 감기가 얼마나 기승인지.”

집 안으로 들어온 펠의 말처럼.

“감기?”

“네, 근데 이맘때면 다들 그래요. 가리개로 코랑 입을 가리고 다니기는 하는데, 아이들에게 그런 말이 통하겠어요? 차라리 우물가에서 수시로 손 닦으라고 하는 게 낫죠.”

펠이 웃으며, 서둘러 당근을 꺼냈다.

“그래도 요 며칠 전에 디아브리아쪽에 있는 돼지 농장 하나가 폭삭 불타 버려서 다행이에요.”

“농장?”

“네.”

위생과 돼지 농장의 화재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싶어 눈을 깜박이자 펠이 뒤늦게 아차 싶었던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짐승의 기름이 섞인 잿가루를 물에 개면, 세정력이 좋아지거든요.”

“아.”

비누.

이시아로 살던 시절, 화학 시간에 선생님이 이야기해 주었던 기억이 났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나무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짐승을 죽여 태웠는데, 아주 우연하게도 그때 비가 온 거지. 그랬더니 동네 아낙들이 죄다 빨랫감을 들고 어딜 갔는지 알아? 그 재단 아래쪽에 흐르는 강가로 가서 빨래를 했어. 왜?’

기름을 머금은 잿가루가 물에 섞이면서 세정력이 좋아졌으니까.

지금 펠의 말처럼.

“뭐, 냄새랑 색은 좀 고약해도 그걸 물에 조금씩 풀어서 손을 닦으면 신기하게도 겨울에 감기 없이 잘 지내요.”

“그래서 그게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불을 일부러 지른 거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엘론의 말에 레티시아가 고개를 돌리자, 펠이 그 말을 받았다.

“감기만 돌면, 그쵸?”

펠의 물음에 엘론이 귀 끝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못내 부끄러워하는 표정에 잠시 엘론과 펠을 번갈아보다 이내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울 정도로 복잡했다.

비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에서 일렁이는 이능과 마력.

올가에게 꾸준히 배운 결과, 이제는 이능으로 제법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현대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걸 만들어 내기 위해선 기본 재료뿐만 아니라, 마력석도 필요했다.

그것도 많이.

그렇기에 이걸로 비누를 만들어 내는 데는 적잖은 돈이 들어갈 게 뻔…….

하지만, 난 돈도 있고 잘하면 디웨스 광산도 갖게 될 건데?

물론 내 개인 재산은 폐광을 사느라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 시기에 벽난로에서 탄 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리고 기름은.

짐승을 태운 기름으로 해도 되지만, 그러면 돈이 너무 들어갔다. 비누 한번 만들 때마다 돼지를 잡아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건 내가 부자라도 안 돼.

그럼.

올리브가 있을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화학 수업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올리브.’

이 소설은 유럽의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니, 당시 유럽에 널려 있던 올리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만약 없다면 올리브가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거다.

그러면 그 올리브로 기름으로 짜내는 건 내 이능이나 마력으로 충분했다.

요즘 이능이 많이 올라왔으니까.

그런 일은 솔직히 이능만 충분히 받쳐 주면, 그리고 내가 이능을 써서 피만 토하지 않으면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걸로 돈을 벌고 싶다면, 처음 짜낸 올리브유는 식용으로 팔고 두세 번째 짠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처음 짜낸 올리브유를 팔고 남은 돈으로 비누를 만들어서 싸게 팔면, 위생 문제가 개선되어 카타르후스든 감기든 조금은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을 거였다.

아무도 죽지 않으면 더 좋고.

일단은 시도 자체가 중요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할아버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폴짝 의자에서 내려왔다.

올리브도 올리브인데, 내 돈을 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업에는 물주가 필요한 법이다.

해서 의자에서 내려와 몸을 돌렸다.

“아기씨? 어디…….”

“할아버지랑 통화하러!”

헤일의 물음에 웃으며 대꾸했다.

애교를 꾸역꾸역 밀어 넣어 잔뜩 장착한 채 말이다.

아자, 아자!

* * *

그 시각.

“목장을 탐내는 것이 샤리에의 딸이라고?”

“네. 물론 에시어에서 황제 폐하의 눈을 속이기 위함일 수는 있겠으나, 그 댁 아기씨가 목장을 갖고 싶다고 떼를 쓴 모양이더군요.”

스벤 백작이 수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수도의 에시어 저택에서 보았던 샤리에의 딸을 떠올린 그가 미간을 좁혔다.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댁 아기씨께서 목장에서 소랑 말이랑 양이랑 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역시 어린 계집이란.”

스벤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디웨스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란 말이냐.”

“네, 그래 보입니다.”

‘하긴.’

에시어가 굳이 홀데 목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하여 의아하던 찰나였다. 아무리 목장에 디웨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 해도, 에시어 같은 공작가가 디웨스에 목을 매며 굳이 뒷거래까지 하려 드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게 그 어린 것의 철없는 장난이라면.’

그럼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디웨스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은 푼돈에 불과했다.

제 수하 마법사들의 의견으로는 디웨스가 얕고, 넓게 퍼져 있어 채굴을 하면 할수록 수익 이상으로 돈을 까먹을 수도 있다 했다.

‘한 곳만 파서는 안 되니까.’

빼앗아 볼 작정이었는데.

굳이 지금 에시어와 척을 질 필요가 있겠나 싶은 스벤이 알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나가 봐.”

“예.”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수하의 뒷모습을 보며 스벤 백작이 혀를 끌끌 찼다.

‘사생아가 낳아 내맡겨 놓은 조카가 처치 곤란 애물단지라더….’

그 순간-

“잠깐.”

“예, 백작님.”

“샤리에의 딸이 떼를 써서 목장을 사 달라 했다고.”

“예.”

“에시어의 가주는 그걸 받아 줬고?”

“…네.”

스벤 백작이 어떤 의도를 갖고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수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스벤 백작의 표정은 고요했다.

방금 전 수하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백작의 표정에 그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찌…….”

“아니다. 나가 봐.”

스벤 백작의 말에 수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서둘러 집무실을 벗어났다.

탁- 소리와 내려앉은 절대적 고요에 스벤 백작이 양손 끝을 맞댄 채 톡톡 두드렸다.

‘안드레아의 움직임은 아닐 테고.’

안드레아 에시어와 이야기할 때면 샤리에와 그 딸에 대한 혐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곤 했었다.

그런 그가 조카딸이 떼를 쓴다고, 황제의 목장을 사 들일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터.

‘그럼.’

남은 건 마고 에시어.

애물단지에 처치 곤란인 손녀딸에게 보일 수 있는 도량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우회적으로 물려주기 위함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고 에시어,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정말 제 손녀딸을 아낀다고?’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가정에 스벤 백작이 책상 위에 손을 올렸다.

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레티시아 에시어’라는 이름은 제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 아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요 몇 달 사이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고작 6살짜리 아이.

‘뭐가 달라진 거냐.’

습관처럼 검지로 책상 위를 느리게 톡토옥톡 두드리는 그의 등 뒤로 난 창밖으로 훤히 들어오던 해가 지고, 달빛이 그 자리를 대신한 그때-

“백작님.”

문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살짝 갈라질 것 같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스벤 백작이 손끝을 말아 쥐자, 수하가 나갔던 모습 그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샤리에 에시어의 전서구가 황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수하의 말에 스벤 백작이 미간을 좁히자, 그가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홀데 목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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