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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27)화 (127/141)

127화

그랬으면 좋겠다.

헤-

‘내 생일에는 빠지지 않고 나를 보러 오셨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은 채 배시시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들자, 베넷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어쩐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듯한 애매한 미소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왜?”

“그냥요. 아기씨가 새삼 장하다, 싶어서요.”

“구치, 레샤가 좀 장하긴 하지! 레샤가 이제 곧 7살인데!”

뻔뻔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넘기며, 손가락으로 ‘7’을 만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베넷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그래도 아직 아기세요.”

“아기치고는 나 너무 큰데!”

“그래도요.”

베넷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하고 있고, 그보다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베넷이었으니까.

‘걱정할 만하지.’

그 걱정 어린 시선에 입꼬리를 잔뜩 올려 웃으며,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레샤 다 컸어. 걱정 안 해두 돼.”

그래, 내가 20살이 넘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

이시아 시절까지 합치면 40년을 넘게 산 거였다.

물론 문득문득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튀어나오긴 했으나, 그래도 40년을 살며 얻은 경험치가 달랐다.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고마워, 베넷.”

해서 그의 걱정에 염려 말라는 듯 다독이며 시익 웃었다. 그러자 그런 나를 빤히 보던 베넷이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구럼 다음!”

“아, 네.”

이렇게 바로 말머리를 돌릴 줄 몰랐다는 듯, 살짝 당황한 그가 이내 허탈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폐광에서 디웨스의 파동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오옷!

“몇 개나?”

“금광이었던 곳에서는 거의 다,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대박.”

“……예?”

“아, 아니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이시아 시절의 언어에 놀라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자, 피식 웃은 베넷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끄덕임에서야-

‘난, 이제 부자다.’

베넷의 말을 다시금 곱씹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흐 웃었다.

일단 부자가 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머릿속에 쫘악 그리는 사이-

“어?”

베넷이 나를 살짝 들어 뒤쪽에 놓인 의자에 앉히고는 저 역시 그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마주 앉았다.

뭔가 말을 하기 껄끄러운 듯 입맛을 살짝 다시는 베넷의 표정에 고개를 들었다.

뭐지? 왜 이러지?

“웅?”

재촉하듯 묻는 시선에 베넷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폐광들이 많이 버려진 곳이 또 한 곳 있습니다.”

많이? 베넷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딘데? 아니, 아니.”

자자, 진정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많이?”

“한 지역에서만 지금 저희가 갖고 있는 금폐광의 개수를 가벼이 넘어 섭니다.”

헐.

대박.

대규모 금폐광이라니!

이거야말로 돈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소리가 아닌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눈도 감았다 떴다.

자, 침착하자.

일단은 돈이 얼마나 남았지?

자금 현황을 잠시 떠올리며 베넷을 빤히 보았다.

“거기가 어딘데?”

그러자 애매하게 웃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타루스요.”

타루스면.

“아빠가 있던 그 타루스?”

“네.”

“신도 버렸다는 북부의 그 타루스?”

“예.”

“마물들은 날뛰고, 날씨는 일 년 내내 추워서 사람 살 곳 안 된다는 그 타루스?”

“…예.”

망할.

좋다 말았네.

괜히 받았다 뺏긴 느낌에 입을 삐죽거리자, 피식 웃은 베넷이 상황을 설명했다.

“올가에게 슬쩍 상황을 물어보니 만약 저희 예상대로 그곳에 대규모 디웨스 광산이 있다면, 유독 타루스에서 마물들이 날뛰는 이유가 그것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더군요.”

“왜?”

“마물들이 그 마력을 먹고 살아가니까요.”

유독 북쪽에서 큰 마물들이 날뛰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 느낌이 들었다.

디웨스가 전부가 아니니까.

‘그 아래에 묻혀 있는 마그누스 밭 때문이겠지.’

그럼 마그누스를 이용하면 타루스의 마물들을 다스리는 건 물론이고,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영지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그곳이 황제령이라는 겁니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은 황제의 것이었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지.

“그럼 그냥 내버려 둬.”

“…….”

“어차피 황제도 버린 땅이라. 거기에 디웨스가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할 거야. 알았다면 폐광시키지 않았겠지.”

“알겠습니다.”

내 말에 베넷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부관님.”

페일런이 문밖에서 베넷을 다급히 불렀다. 베넷이 문을 열어 맞이하자 페일런이 그의 손에 작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황궁에서 온 겁니다.”

페일런의 말에 베넷과 내 시선이 모두 그 작은 쪽지로 향했다.

“어서 읽어 보십시오.”

페일런의 재촉에 베넷이 작게 말린 쪽지를 펼쳤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곤 나를 돌아보았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듯한 표정에 그의 손에 들린 쪽지를 건네받아 펼쳤다.

* * *

그 시각 황궁.

“샤리에에게 타루스를 영지로 내어 주자?”

침대 헤드에 기대 누운 황제의 곁에 앉은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바마마. 어차피 타루스는 황실의 짐 덩어리가 아닙니까.”

카일이 고개를 들자, 계속하라는 듯 황제가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카일이 턱 끝을 조금 더 올려 들었다.

“이전에야 타루스의 틸렌 산맥에 금광과 석탄 광산이 많아 황실에 많은 보탬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광산조차 죄다 바닥을 보이고 있고, 나머지는 진작에 쓸모없어진 폐광들뿐이질 않습니까.”

“음.”

“한데 날뛰는 마물들과 척박한 토지 탓만 하는 게으른 영지민들은 죄다 황실의 세금만 끊임없이 축내고 있는 실정이고, 또 황실의 기사들도 언제까지 그곳에 주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게 제대로 된 영주가 없어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얼핏 들어서는 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영지민들이 제 땅을 일구질 못하고 황실에 의존하는 이유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데 카일은 그걸 영지민들의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황실에서도 꾸준히 관리를 파견해 보았으나, 제 땅이 아니니 최선을 다할 리 없지요. 슬프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습니까.”

“해서.”

“샤리에에게 작위를 내려 그곳의 영주로 보내면, 그래도 그 땅에 희망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샤리에도 단순히 기사 단장이 아닌 영주가 되면, 그 땅을 어찌해 볼 생각도 할 테지요. 그리고…….”

차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내뱉지 못하고 한숨을 쉬듯 꿀꺽 삼켜 넘긴 카일이 황제를 바라보자-

“그렇게 되면 샤리에가 에시어의 후계에서도 멀어질 테고.”

황제가 카일을 대신해 말했다.

“예, 아바마마.”

“흠.”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을 얼굴에 황제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

늘어진 눈꺼풀에 가려진 눈동자처럼, 황제의 생각이 잡히질 않았다.

에시어를 견제하는 듯하다가도, 그 가문을 배제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니까.

지금처럼.

하지만 오늘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황제가 곧 죽을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에시어에 샤리에라는 불씨를 살려 두는 건, 제 황위가 위태롭다는 의미였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샤리에를 에시어의 가주 자리에 앉혀선 안 돼.’

아무래도 황제의 손에 조금 더 강력한 명분을 쥐여 줘야 하려나, 싶은 마음에 입을 열려는 그때-,

“아바….”

“고민을 좀 해 봐야겠구나.”

카일의 말을 끊으며, 황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샤리에의 공적이면, 영지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긴 하다만…. 흠.”

말끝을 길게 늘이며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언뜻 드러내는 황제의 말에 카일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러곤 간신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감추며 묻는 카일의 목소리에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타루스를 샤리에에게 주면, 그 아이를 제외한 모두가 만족스러워할 테지.”

얇고 병약한 몸을 흔들며 너털웃음을 지은 황제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잘 생각하였구나.”

“…….”

“네 손의 것은 하나도 놓지 않고, 다른 이의 것을 빼앗자면 이 방법이 제일이지.”

“…….”

가볍게 기침을 뱉은 황제가 카일을 돌아보았다.

“이번 일은 샤리에가 황도로 돌아오면 다시 논의를 해 보자꾸나. 이리 와 손등에 입을 맞추려무나.”

그 말에 카일이 고개를 들자, 황제가 그를 향해 엷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그의 눈동자는 늘어진 눈꺼풀 아래 가려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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