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죽겠다, 진짜.”
피어스가 전날 내 준 내려치기 백 번을 끝까지 채운 쟈이든이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가슴팍이 위아래로 볼썽사납게 들썩거렸다.
남들이 보면 고작 허수아비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훈련용 마도구 위에 검을 휘두르는 것뿐인데, 이렇게 땀을 비 오듯 쏟을 일인가 싶겠지만.
이건 이 마도구의 사악함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이 마도구의 악랄한 점은 제대로 된 자세와 힘으로 내려치지 않으면 훈련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니 힘이 들 수밖에.
“이딴 걸.”
쟈이든이 마도구를 발로 거칠게 걷어찼다.
“진짜 악마 같은 놈이야. 피어스, 그 자식.”
“…….”
“진짜, 내가, 주인님만, 아니면! 어우!”
쟈이든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으며 마도구를 가격했다.
쟈이든의 뒤를 이어 마도구 앞에 선 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세 번에 한 번꼴로 숫자가 기록되던 자신과 달리 착실하게 올라가는 리안의 숫자에 쟈이든이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재수 없는 놈.”
그의 이죽거림에도 리안의 자세는 흐트러짐이라곤 없었다.
그 우직한 뒷모습에 서서히 가라앉은 숨을 고른 쟈이든이 옆으로 굴러 팔베개를 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조금 컸나?’
‘등짝도 넓어진 것 같은데?’
‘팔이랑 다리도 조금 단단해진 건가?’
‘조금 잘생겨진 거 같기도 한데?’
‘이런 젠장. 다 가졌네!’
‘고작 8살밖에 안 된 놈이!’
‘벌써 완성형이라니.’
‘젠장!’
부러움에 쟈이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솔직히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작고 말라 그야말로 비틀어졌다고 표현하는 게 딱 어울리는 아이였다.
한데 그의 엄마가 죽고, 이곳으로 와 일을 시작한 며칠 사이 아이는 많이 성장해 있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야.”
“…….”
“너 그렇게 배우고 싶어 하면서 왜 선생들이 말할 때는 매번 거절하는 건데? 그것도 우리 주인님한테 엇나가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냐?”
쟈이든의 물음에 리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우직하게 내리치던 검이 그 대답을 대신하듯, 약간씩 그 숫자가 어긋나고 있었다.
“미련한 놈.”
그 숫자를 보며 쟈이든이 혀를 끌끌 찼다.
“말을 좀 해라, 말을.”
“…….”
“나한테도 말을 안 할 이유가 뭐…….”
“부담 주고 싶지 않아.”
“뭐?”
횟수를 다 채운 건지, 검을 내려놓은 리안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리안이 쟈이든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쟈이든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무슨 부담.”
“걔가 내 신…….”
“내가 내준 숙제는 다 하고 노는 거냐?”
리안이 무어라 입을 떼려던 그때, 뒷문을 열고 피어스가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피어스를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쟈이든이 손을 들어 그를 멈추고는 리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신, 뭐. 뭔데. 주인님이 네 뭐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데.”
하지만 이미 리안의 입은 다물려졌고, 다시 열릴 기미는 없어 보였다.
오직 쟈이든만이 하다 만 말이 궁금해 미쳐 갈 뿐이고, 그건 옆집의 레티시아도 마찬가지였다.
* * *
뭐지? 무슨 말을 한 거지?
쟈이든의 말은 똑똑히 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워낙에 크기도 했고, 바로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입 모양이 더 또렷하게 보였으니까.
한데 리안은 목소리도 작고, 등을 돌리고 있어서인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들었어! 뭔데!
창밖으로 고개를 쭉 빼고 듣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러야 할 정도로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분명 쟈이든이 부담 뭐 어쩌고 했는데.
내가 부담스럽다고 한 건가?
내가 너무 잘해 주려 한 게 문제였나?
쟈이든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속이 들쑤셔지는 것처럼 답답했다.
당장에 ‘너 이 자식아! 뭐가, 뭐가 부담스러운데!’라고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면, 내가 보이는 관심이 그에겐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방이 싫다는데.
차라리 아빠 따라 타루스로 가 버릴까.
어차피 내가 후계의 자격을 가져 봤자 20살이면 죽을 테니.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나.
20살에 죽을 줄 모르고 오네에 오려고 아등바등했던 것도, 죽을 걸 알게 된 이후에도 공작가에서 나오려 노력했던 것 모두 리안이에게 호감을 사려 했던 거였다.
그래서 아빠를 도우려고.
어쨌든 미래의 황태자는 리안이었고, 에시어에 칼을 들이대는 것도 그였으니까.
한데 되레 내가 곁에 있는 걸 쟤가 저렇게 싫어한다면.
오히려 내가 없는 편이 나은 거 아닌가.
내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때, 사라져 주는 게.
그의 부담감을 이용할 수도 있고.
부담이라는 감정도 어떻게 보면 부정적일 수 있지만,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거니까.
나중에 진짜 필요할 때에 지금 그가 느끼는 부담감을 자극하면.
“…….”
줄줄 풀려 가던 생각의 타래에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뿐이구나.
이러니 리안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이라는 건 느껴지는 거니까.
나 같아도.
그의 부담감을 떠올리며 조용히 창문을 닫고 벽에 기대앉았다.
‘혹, 샤리에 님께서 타루스로 같이 가자 하시면 따라가실 겁니까.’
귓가에 울리는 베넷의 목소리와 함께 등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서서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 * *
“홀데 남작이 용병들을 모으고 있다고?”
“예.”
페일런의 보고에 펜 끝을 책상 위에 툭툭 두드리던 베넷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들로만.”
“네, 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 몸값 비싼 마법사들을 데려다 뭘 하려는 건지.”
혀를 끌끌 찬 페일런이 미간을 좁혔다.
“미쳐 버린 게 아닐까요?”
“뭐?”
“아니, 그게 아니면 어떤 미친놈이 목장 인력으로 마법사들을 부려요.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열댓 명을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는 페일런의 표정에 베넷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또한 홀데 남작이 수상쩍었으니까.
‘굳이 디웨스가 있는 목장에 마법사들을 불러들인다?’
베넷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페일런의 말대로 끝내 미쳐 버린 게 아니라면,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돈을 쓰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라면.
마법사 용병은 일반 일꾼에 비해 임금이 몇 배에 달하니까.
‘그럼 대체 왜.’
이미 목장의 소유권은 아기씨께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고, 실소유주도 황제였으니, 남작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안쪽의 시설물을 고치거나 새로 짓는 정도랄까?
한데 그것도 목장의 소유권 이전을 앞둔 지금 상황에서는 맞지 않았다.
‘수상하긴 하군.’
하지만 제가 함부로 판단할 건 아니었다.
디웨스도 그렇고, 레티시아 아기씨가 굳이 그 목장을 선택하신 이유가 따로 있을 테니까.
“그 아이들 문제는.”
“아, 말씀하신 대로 전부 고아거나 부랑아들이었습니다. 부모도 찾을 수 없고, 아이들의 시신도 그냥 길가에 버리고 가더군요.”
“…….”
페일런의 말에 베넷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것 역시 아기씨의 말이 맞았다.
길게 한숨을 몰아쉰 베넷이 페일런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따로 묻어 주라는 아기씨의 명이시다. 공동묘지에 땅을 사서 하나하나 정성으로 묻어 주도록 해.”
“열 구가 넘는데, 전부요?”
“어.”
베넷이 관자놀이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씨 뜻이다.”
“허면 그때 말씀하신 고발은.”
“그건 그냥 둬, 내가 처리할 테니,”
어차피 황제의 사정거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법정으로 끌고 간다 해도 어려웠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아이들의 장례나 제대로 치러 주는 게 낫지.
“끝인가?”
“아뇨. 안드레아 님께서.”
“하아.”
안드레아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아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을 치켜떴다.
“또 뭐.”
짜증스러운 듯 고개를 드는 그의 시선에 페일런이 몸을 앞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때의 그 움직임을 다시 시작한 거 같습니다.”
“…….”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베넷의 시선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 * *
“어르신 쪽은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케벨의 보고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안드레아가 펜을 내려놓았다.
“오네는.”
“워낙에 집 안이 작은데다가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아직….”
탕!
케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상을 내려친 안드레아가 사납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를 곁에 두고 쓰는 이유가 뭔데. 이럴 때 일을 제대로 하라고 데려다 놓은 거 아니야!”
안드레아의 말에 케벨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빠른 시일 안에.”
“연말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
“그 계집의 얼굴을 연말까지 보게 만들 작정은 아니겠지.”
서둘러 처리하라는 안드레아의 말에 케벨의 손바닥에 땀이 스몄다. 등에서부터 흐른 식은땀이 이미 안쪽의 속옷까지 축축하게 적신 상태였다. 한겨울에도 몸에 쩍쩍 달라붙는 옷자락에 케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씀은.”
“들어가지 못하면, 나올 때 처리하면 될 게 아니냐.”
“…….”
사람을 죽이라는, 그것도 제 아래에서 몇 년간 기른 아이를 죽이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꺼내는 안드레아의 잔악함에 케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침묵에 케벨을 흘끗 올려다본 안드레아가 사납게 눈을 번뜩이다 이내 턱 끝을 지그시 눌러 내렸다.
“못 하겠다면, 그만둬도 좋아.”
안드레아의 말에 입술을 깨문 케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