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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31)화 (131/141)

131화

진짜 희한한 노릇이었다.

아니,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건 건장한 성인 남자 두엇이었고, 앞에 있는 건 고작해야 꼬맹이들이지 않나.

한데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순간, 밀려드는 안도가 온몸을 휘감아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와 버리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고 놀라운 경험이었으나, 한 번 터진 울음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내 울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쟈이든의 표정은 더욱더 살벌해졌고, 그 옆에 선 리안의 표정은 조금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흰 얼굴로 싸늘하게 노려보니 소설 속 북부의 빙설 같다던 표현이 이해가 됐다만, 그렇다고 울음이 그쳐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리고 얘네 각각 8살, 13살 아닌가!

지금 이렇게 안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싶어 코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자 쟈이든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이것들이 누굴 건드려. 진짜 뒈지려고.”

“꼬맹이들은 집에 가라.”

쟈이든의 말에 피식 웃은 남자가 퉤- 하고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어디 뒷골목 부랑자라도 되는 것처럼 건들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이들이 귀족 영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개차반이라 해도 귀족들은 귀족 나름대로 인이 박인 습관들이 존재하는데, 뒤쪽의 남자들에게선 그런 귀족적인 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헤일을 노리던 게 아니라.

애당초 내가 목표였나?

‘누가? 왜 나를…….’

물음표투성이인 상황에 당황한 찰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

급하셨네.

후-

“너희나 꺼져!”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날린 쟈이든과 리안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만!”

그리고 그 즉시 몸을 돌려 리안의 앞을 가로막고는 쟈이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더는 나아가지 못하도록.

두 사람을 막은 채 고개를 들어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것뿐, 자세도 옷차림도 귀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야 확신이 들었다.

“나 누군지 알지?”

만약 이들이 나를 노리는 거라면, 당연히 지금 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도.

이 두 사람에, 헤일까지 죽일 게 아니라면 목격자가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 조용히 물러서게 만드는 게 나았다.

“여기서 일 더 커지는 거 원하지 않을 텐데?”

“…….”

또박또박 뱉는 내 말에 남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 그 너머의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여기서 일을 더 키울 생각이 없음은 확실해 보였다.

“신고 안 할 거야.”

“…….”

“그러니까 너희 고용한 사람한테 전해. 나 건드리면 원하는 거 전부 물 건너가게 될 거라구.”

안드레아든, 벨리아든.

안드레아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지만.

어찌 됐든.

어차피 스스로 자멸할 게 뻔해서 가만두고 있는 것뿐인데, 이렇게 나를 공격하고 건드리면-

“아빠도 나두 가만두지 않을 거라구.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구, 말이야.”

“뭐?”

“그만.”

내 말에 발끈해 앞으로 튕겨 나오는 남자를 막아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뒤쪽으로 물러선 채 검은 가면을 쓰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야 입술을 짓씹은 남자들이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그를 쫓아 몸을 돌렸다.

* * *

“왜 혼자 다녀요!”

“가까워서.”

남자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본 쟈이든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밤이 됐으면 큰길로 다니던가요!”

쟈이든의 잔소리가 과거에도 심하긴 했는데.

오늘 그 문을 내가 활짝 열어젖힌 느낌이 들었다.

“그러게.”

“피어스, 그 개놈은 뭐 하는데요!”

“심부름.”

“그 다른 놈은요!”

“쉬는 날.”

“그럼 나오질 말았어야죠!”

쟈이든이 분통을 터트리며 가슴을 내리쳤다.

“우리를 만났으니까 망정이지!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요!”

너희가 뭘 해 준 건 아니지만.

애들 얼굴 보자마자 울음 터트린 게 누구더라.

나지.

이렇게 사람이 배은망덕해요.

괜스레 내 마음의 소리에 민망해져 헛기침이 나왔다.

“구러게.”

“얼른 가요.”

“어.”

헤일을 사이에 둔 채 내 옆에 선 쟈이든이 아빠 집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내내 잔소리를 해댔고, 리안은 내 바로 옆에 선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딘가 조금 많이 불편한 듯, 가뜩이나 조용한 아이가 더욱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왜지?

하지만 이내 ‘왜?’라는 질문을 지워 버렸다.

그는 원래 나와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휴.

아무래도 리안과의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아빠를 따라 영지로 내려가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하게 들었다.

* * *

“들어가세요.”

“웅.”

손을 흔들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레티시아의 뒷모습에 쟈이든이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와, 진짜 놀랐네.”

가슴을 쓸어내린 쟈이든이 집 쪽으로 걸어가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리안이 걸음을 멈추곤 쟈이든을 돌아보았다.

“너 자신 있었어?”

리안의 물음에 문고리를 돌리던 쟈이든이 시선을 옮기며 되물었다.

“무슨?”

“그 남자들 처리할 자신.”

“어.”

리안의 말에 쟈이든이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보았다.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주인님이랑 헤일은 도망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

“훈련했잖아. 피어스 그 개자식이 그래도 제법 좋은 선생이거든. 뒤쪽에 있는 남자 빼고 앞쪽에 있는 놈들은 약점이 바로 보이던데?”

리안을 흘끗 보곤 “빨리 와.”라며 집 안으로 들어간 쟈이든이 물 한 잔을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온 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걸 배웠다고?”

“배웠다기보다는 피어스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그냥 되던데.”

“…….”

쟈이든의 말에 리안이 주먹을 틀어쥐었다.

솔직히 자신도 쟈이든이 하는 그 말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긴 했다.

그도 훈련을 따라는 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이대로 계속 훈련하다 보면 서서히 제 실력도 나아질 거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당장에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 아이가 저를 지키는 게 아니라.

‘구만!’

하지만 그 아이의 눈에 저는 여전히 약했다.

아니, 실상 그게 옳았다.

쟈이든의 말처럼 제게도 그들의 약점이 보이긴 했으나, 그게 그들에게 맞설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공격해 이길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등을 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여전히 저는 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것에.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게.

사내놈이 못났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저도 레티시아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 아이에게 부담 주지 않고, 오롯이 지켜 줄 수만 있다면.

‘이렇게 밀어만 내지는 않을 거야.’

리안이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무력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먹이는 레티시아를 제대로 보호해 줄 수도 없었다.

‘흐엉, 쟈이든.’

저보다 쟈이든이 믿음직스러웠던 거겠지.

그랬으니까 쟈이든을 보며 울던 레티시아가 남자들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게 아닌가.

“젠장.”

“뭐,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야.”

테이블을 내려치는 리안의 일그러진 표정에 쟈이든이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 앉았다.

“억울하면 너도 배우면 될 거 아니야. 피어스가 맨날…….”

“알겠어.”

“뭐?”

“배운다고.”

리안의 말에 쟈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가 들은 게 맞는 건가?’ 하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에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부터 할 거야. 베넷 님의 수업도 들을게.”

뭔가 각성한 듯 대꾸하고는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리안의 뒷모습에 쟈이든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드디어 알을 깨고 나오려는 건가.

내내 제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리안이 안쓰러웠는데, 지금이라도 이런 결정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같이 개고생할 동료가 생겼구나.’

리안의 각성보다는 그 즐거움이 더 컸다.

이젠 자신만 힘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너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퉤퉤퉤!”

* * *

그 시각.

“할부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할아버지가 집에 들이닥쳤다.

‘설마 아까 일을 벌써 아셨나?’ 하는 마음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으나.

할아버지의 볼일은 그게 아니었다.

“연말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는 있느냐. 없으면 할아비가 하나 주마.”

‘옜다, 오다 주웠다.’라는 듯이 할아버지 등 뒤로 상자가 줄줄이 들어왔다. 단순히 드레스 한 벌이 아니라, 드레스만 수십 벌에 구두와 인형 할 거 없이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건 다 가져오신 듯했다.

“할부지 이건 너무 많은데여.”

눈을 깜박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는 다들 기본이라 하던데?”

“누가.”

할아버지의 시선이 베넷과 그의 뒤를 따르는 부관들을 차례로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부관들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해 주기를 바라는 듯한 애절한 얼굴들에-

“아아. 그, 그렇긴 해요.”

“그래?”

“네.”

하하, 하고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들이 이 많은 물건들을 구입하는 걸로 이득을 볼 리도 없고.

아무래도 이래저래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일이 꼬여서 여기까지 온 듯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물건을 사 본 적도, 관심을 가져 본 일도 없으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베넷이 있지 않나.

베넷이 이런 일에 실수할 리 없었다.

“감사합니다.”

“오냐.”

그래, 할아버지한테는 이거 한 마디면 충분하지.

기분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시익 웃다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군데, 옷 때문에 오신 거예요?”

“아, 네가 말한 그 기름 나오는 열매.”

올리브!

“그걸 찾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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