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문양조차 없는 검은 마차가 어두운 밤거리를 내달렸다.
고르지 못한 거리 탓에 마차의 움직임이 오늘따라 거칠었으나, 마고의 자세는 마차에 올라탔을 때부터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빠가 타루스의 영주가 되면, 아빠 딸인 레샤가 오네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제 손녀딸의 마지막 말.
엷게 웃던 아이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이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제 아비가 작위를 받아 영주가 되면.
‘저나 제 아비가 후계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작위를 받으면 에시어의 후계 구도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거나, 혹은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을.
설혹 작위 없이 영지만 받게 된다 해도.
가문을 지키고 있는 직계 에시어들이 있기에-
‘그걸 위해서라도 샤리에는 영지를 받아들이겠지.’
그 땅에 애정도 있었고, 그렇게 하면 에시어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그렇다 해도 샤리에가 영지나 작위를 가진 채 에시어의 가주가 될 수도 있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으나. 법령으로 정해진 제국의 영지는 빼앗거나 통합할 수 없었다. 영주가 영지를 넓혀 왕국으로 발전시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저들이 그렇게 이 땅의 주인이 되었으니.’
제국의 발아래에서 반역의 씨앗을 키우지 못하게 하기 위한 초대 황제의 술수였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그 땅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샤리에가 에시어의 후계가 되어 가주가 되면 되는 일이니까.
‘일이 복잡해질 뿐이지.’
그렇기에 레티시아, 그 아이는 제 의지를 물은 것이었다.
제 아비를 에시어의 가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느냐고.
‘영악한 녀석.’
입가에 스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꾹 눌러 삼킨 마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며칠 사이, 오네의 밤공기가 몰라보게 서늘해졌음이 느껴졌다. 겨울이니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을씨년스러운 풍광이었다.
연말을 맞아 기대감에 설레야 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집 안에서 풍기던 온기도 모두 사라진 듯 보였다.
“거리가 왜 이리 조용한 게냐.”
“요 며칠 아픈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디아브리아에서 시작된 기침이 오네까지 퍼진 듯합니다.”
‘비누 만들어서 줄 거예요!’
‘손만 잘 씻어두 덜 아프잖아요.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데.’
직접 만든 비누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며 해맑게 웃던 손녀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20살에 죽을 것입니다.’
올가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고의 입가에 미미하게 머물던 미소가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초대 테파로아 황제의 수호성.
‘그 망할 놈의 것만 타고나지 않았어도.’
그건 축복이라 불리는 이능이 아니라 저주였다.
물론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겐 축복일 거다.
초대 황제가 20살에 죽기 직전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이 바로 여기 제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러니 아마 그와 같은 수호성을 타고 태어난 레티시아의 앞길에 놓인 것도 다르지 않을 거다. 에시어에 무궁한 영광을 가져다줄 테지.
‘제 목숨을 깎아 먹으며.’
그 사실에 마고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고작 6살밖에 되지 않은 저 어린 것이 시한부라니.’
솔직한 말로 레티시아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께가 시큰시큰해졌다.
이능의 부작용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아이의 입에서 흐르는 토혈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은데.
아이의 죽음이라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장면에 마고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방법이 있을 게야.’
답이 없는 문제는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베넷아.”
“예, 가주님.”
“올가를 불러오거라.”
마고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베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그 시각.
“할아비는 네가 오네에 있었으면 좋겠구나.”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3층 다락에 웅크려 앉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오네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아빠의 후계 자격뿐만 아니라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든 건 네 아비의 결정에 달렸지만.”
모든 건 아빠의 의지에 달렸다는 말을 남기셨지만.
아빠가 영지를 하사받는다고 해서 후계 자격에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그럼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우선 오네에 있으면 리안이도 챙길 수 있고, 아빠를 돕는 것도 수월해진다.
그리고 그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에시어를 싫어하는 리안에게 아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것부터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빠에게로 단단히 붙들어 놓는 것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숙부들은 죄다 대놓고 쓰- 아니, 개차반들이었지만, 최소한 안드레아 숙부의 큰아들인 레오나 윈드런 숙부의 아들인 알레프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건재하시기에 3세들이 충분히 가주직을 이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할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가주직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다.
‘헬렌 숙모도 그걸 노리고 있고.’
아빠가 끝까지 가주직을 거부하고, 숙부들이나 다른 방계에서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면, 할아버지께선 한 세대 정도는 충분히 뛰어넘으실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가 몇 년간 옆에 끼고 가르친다면 그들도 충분히 가주직을 물려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할아버지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그의 곁에 있는 편이 유리했다.
지금이야 할아버지가 나를 예뻐하고 아껴 주신다고 하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야.’
물론 나를 향한 할아버지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믿지 못하는 건 내 할아버지가 아니라, 에시어의 가주야.’
모든 일에서 에시어의 부흥을 최우선으로 놓고 판단하는 가주님은 언제든 유불리에 따라 우리 부녀를 버릴 수 있었다.
‘에시어 공작가의 가주이자, 수천의 영지민과 가신들을 거느린 공작님이 오롯이 내 할아버지일 수만은 없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서운하긴 하지만.’
그래서 곁에 있으려 했다.
할아버지가 뛰어난 나를 보면서 아빠를 생각하고 죄책감을 가져야 일이 수월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빠가 영지를 하사받고도 내가 가문에 남아 있다면, 사람들은 아빠가 욕심을 부린다며 욕할 것이다.
며칠 전의 목장 일처럼.
그러면 아빠의 영웅담은 허명이 되는 거고, 내가 20살이 되도록 목숨 바쳐 지켜 낸 그를 제국민들은 지켜 주지 않을 거다.
‘민심과 가신들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돼.’
사생아인 아빠가 다른 직계들을 밀어내고 공작가의 가주가 되는 일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겐 너무나 쉬운 일들이었으나 아빠에겐 한 걸음, 한 걸음이 살얼음판이었다.
자그마한 오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사생아니까.’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이었고, 돌아가신 공작부인보다 더 먼저였다는 사실은 그 어떤 방패막이도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래 봤자 평민.’
‘그래 봤자 선대 가주에게 인정받지 못한 혼외 자식.’
그렇게 불릴 테니까.
그러니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기에 아빠에게 타루스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었다.
‘아빠는 그 땅을 아끼니까.’
그 사람들을 조금 더 잘 살게 해 주고 싶을 테지.
솔직히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 디웨스 광산이 있고, 그 아래 마그누스가 잔뜩일 텐데.
타루스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돈방석이 눈앞에 있는데.
황실의 눈을 피해 아빠를 설득해 이것저것 만들어 팔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우린 일확천금, 벼락부자.
어쩌면 훗날 할아버지보다 더 부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빠의 목숨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근데 왜 나는 고민하는가.
답은 너무 뻔한데?
아빠랑 타루스로 같이 가는 것.
길고도 깊게 한숨을 몰아쉬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돌려 창틀에 턱을 댔다.
쟈이든의 정수리와 흐릿하고 웃고 있는 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가야 할 이유가, 가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고민 중이었다.
내가 떠나면 리안 쟤는 누가 챙겨 주나, 싶었으니까.
아니, 물론 쟈이든이 곁에 있긴 하겠으나. 가까이에 살면서 즉각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나 없이 혼자 커야 할 리안을 떠올리자 어쩐지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안에 이능 발현도 있을 텐데.’
아빠 말에 따르면 나이가 어느 정도 찬 뒤에 이능이 발현되면 굉장히 고통스럽다고 하던데.
진짜 첩첩산중이네.
터져 나오는 한숨에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