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34)화 (134/141)

134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그의 이능이 발현되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년 뒤, 그러니까 황실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많이 늦은 이능 발현이었다.

대체로 이능은 태어날 때부터 발현되거나, 늦는다 해도 일고여덟 살 이전에 모두 끝나는 게 통상적이었다.

‘평민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 당시 리안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능이 발현될 수 없는 나이였기에 사람들은 리안의 고통을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한 쇼라고 폄하했었다.

‘뭐, 그로 인해서 황제가 리안을 주목한 건 사실이긴 하지.’

스벤 백작이 데리고 들어온 리안을 내내 인정하지 않던 황제가 그가 이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안 동시에 황자로 받아들였으니까.

그런 상황이기에 황실에 그가 황자라는 걸 알린다 해도.

‘황제가 그를 받아들이는 시기는 알 수 없어.’

이능의 씨앗이라도 보여 주면 몰라도.

그런 상황에서 황실로 들여보내면 리안이 맞닥뜨려야 할 건 엘리자베스 황후와 네투아 공작가, 1황자, 2황자 그리고 스벤 백작이었다. 이번엔 스벤 백작이 그의 뒷배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

“에효.”

물가에 애를 내놓은 엄마의 마음이 이럴까.

아무 준비 없이 황실에 들어가면 애가 죽을 수도 있었으나, 여기에 그냥 내버려 둔다 해서 그가 무사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흐음. 그럼 차라리 할아버지를 리안의 뒤에 단단히 세워 두면.

입매를 매만졌다.

애당초 계획은 아빠가 리안의 뒷배가 되는 거였으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할아버지 말고는 답이 없었다.

베넷도 있긴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궁내부나 행정부 그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고작이었다.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할아버지뿐이었다.

할아버지 몸도 좋아지셨고, 이제 슬슬 네투아가 날뛸 때가 되긴 했는데.

거기다 황제의 의심병도 돋아날 때가 되었다.

네투아와 에시어.

황제는 그야말로 그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었으니, 네투아가 날뛰면 할아버지를 불러들일 거다.

네투아를 견제하기에 가장 좋은 칼은 할아버지였으니.

그렇다면 바닥에 바짝 엎드린 네투아를 건드려 황제를 발작시킬 만한 걸 찾아야 했다.

황제가 할아버지를 제 손으로 다시 불러들이게끔.

그러면 리안이를 들여보낼 만하지.

이것 역시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 일이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 긴 한숨을 몰아쉬며 두 녀석이 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들리는 쟈이든의 웃음소리와 리안의 기합 소리.

그 익숙한 소리에 시선을 빼앗긴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제와는 다른 이상한 장면을 발견했다.

비단 어제뿐만이 아니라 그제, 그끄저께와도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쟤가 왜 피어스 앞에 있어?”

눈을 깜박여 보아도 피어스 앞에 그리고 쟈이든 옆에 서 있는 건 리안이었다.

또 내 착각인 걸까?

그냥 지나가다가 잠시 곁에 서 있는 건가 했는데-

“훈련을 같이 받겠다고?”

“네.”

“끄악!”

피어스의 말과 리안의 대답이 또렷이 귀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터진 비명에 리안의 고개가 내가 있는 쪽으로 살짝 움직이자 다급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얼른 몸을 숨겨 벽에 등을 댔다.

대박.

저 고집불통이 무슨 일이야!

심장이 뛰었다.

에시어를 싫어하는 애가 에시어의 기사에게 검술을 배우겠다고 스스로 움직인 거잖아!

리안의 심경이 변화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리안이 혼자 벽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봐 주는 것.’

그걸 위해서라도 아빠를 따라가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곁에 내가 있으면 안 좋은 영향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곁에 있으면 반발심으로 되레 아무것도 안 하려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머지않아 리안의 곁에 여자 주인공도 나타날 거다.

리안이 이능을 발현하게 만드는 계기를 그녀가 가져오니까.

그렇다면 내가 빠르게 사라져 주는 게.

‘그를 위해 더 나아.’

가슴 쪽에서 빠르고 강하게 뛰던 울림이 잦아들고, 꽉 들어찼던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복잡할 게 없는 거였다.

내가 떠난다 해서 리안이 제 길을 못 찾아갈 아이도 아니고.

그야말로 이건 내 노파심이었다.

부모의 과도한 노파심이야말로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이지.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는 걸로 충분한 것을.

마지막까지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고민을 정리하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리안은 이전의 쟈이든처럼 뒷마당을 빠르게 뛰고 있었고, 쟈이든은 그 모습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는 중이었다.

피어스의 표정은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그의 시선 역시 나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평화가 계속되길.

리안이 행복해지길 바라며 창틀에 손을 올려 손등에 턱을 괬다.

‘어쩌면 오늘이 이 장면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모두 잠든 어둠을 틈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검은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그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말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12월 31일은 정말 금방 찾아왔다.

“오늘만 지나면 우리 아기씨도 7살이시네요.”

“7살은 스무 날 더 지나야지!”

펠의 말을 정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생일이 지나야 7살이야.”

“그렇네요. 그 날에 제가 3단짜리 케이크 만들어 드릴게요!”

“우와! 펠 최고!”

손을 뻗어 펠을 향해 엄지를 내보이자, 펠이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내 뒤쪽에 서 있던 헤일이 질세라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기씨께 옷을 만들어 드리려고요.”

“옷? 우와! 헤일이 만들어 주는 옷이면 엄청 편하겠다!”

타루스에 가는 길은 일단 편하겠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니 이제 모든 생각이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이 어쩐지 잘못된 분위기를 자아낸 듯 보였다.

“저는 아기씨가 가지고 놀 장난감을!”

엘론과,

“저도 장난감을 준비했는데!”

피어스까지.

펠이 쏘아 올린 케이크 한 방으로 방 안은 내 생일 선물에 대한 경쟁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말들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달아오른 분위기만큼 얼굴에 열감이 느껴졌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내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 준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이시아 시절에는 가족 같은 수녀님들이 챙겨 주셨고, 레티시아에겐 아빠가 챙겨 보내 주는 인형들이 전부였으니까.

그것도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인형들이.

지금에 와서는 그게 아빠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14살에게 코끼리 인형은 조금 너무했지 않나?

전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물론 할아버지도 쓰러지기 전까지 생일을 챙겨 주시긴 했다만, 그건 직계와 방계 할 것 없이 똑같은 받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내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실걸?’

그런 건 베넷과 그 아래 부관들이 챙기는 거였으니까.

‘이쯤 되면 베넷은 사람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그 많은 업무를 대체 어떻게 처리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다 싶었다.

물론 다른 숙부들이 멀쩡했다면, 그가 그 정도로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만.

‘숙부 둘 다 멍청이들이니.’

베넷 팔자도 참.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끌끌 차자-

“마음에 안 드세요?”

내 뒤에서 머리를 매만져 주던 헤일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거울 속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

내가 지금 연회에 갈 준비 중이었음을 깨닫고, 시선을 돌리자-

“이건 누구지?”

거울 속에 요정이 보였다.

양쪽으로 올려 묶은 금발 머리에 푸른 눈. 거기다 할아버지가 사 주신 하늘빛 드레스와 흰색 여우 털로 만든 케이프까지.

그야말로 저기 얼음 나라에서 ‘뿅!’ 하고 튀어나온 듯한 모습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나 아닌 거 같은데. 헤일이 요술을 부린 건가?”

“그럴 리가요. 아기씨께서 워낙 예쁘신 거죠.”

“헤.”

헤일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자, 주변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낯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그럼요. 아기씨께서 자라시면 테파로아 전체에서 미모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을걸요?”

“암요암요, 그뿐인가요? 하늘의 여신님도 부러워할 외…….”

“고만.”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대며 여신님이 들으면 줬던 복도 빼앗아 갈 소리를 뻔뻔스레 하는 피어스와 엘론의 주접을 막았다.

“여신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건데! 쉿!”

“아, 예.”

그런 내 말에 옛 신화를 떠올린 엘론과 피어스도 각자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혀를 깨물어 말을 삼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다짐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폴짝 일어나 앉자, 바깥에서 기척이 들렸다.

“마차가 왔나 봅니다.”

“그럼 출발해 볼까?”

하지만 마차에 올라 저택으로 향하는 한적한 길에 접어든 순간-

히이잉!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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