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그 시각.
신나는 음률과 들뜬 목소리들로 가득 찬 화려한 연회장을 두리번거리던 마고가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베넷을 돌아보았다.
“레티시아는 아직이더냐.”
“거의 도착하셨을 겁니다.”
흘끗 시계를 본 베넷의 대답에 마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는구나.”
“오네가 가까운 듯, 멀지 않습니까.”
레티시아를 두둔하는 베넷을 흘끗 본 마고가 나직이 혀를 찼다.
“아주아주, 홀딱 넘어갔구나.”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으나 부러 모른 척 입을 다무는 베넷에 마고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네놈이 요즘 장난감 상회들을 쥐 잡듯이 뒤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
“레티시아의 생일 선물 때문이냐.”
넌지시 물어오는 마고의 물음에 베넷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쉬이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베넷의 희멀건 얼굴에 마고가 아예 그의 앞으로 몸을 돌렸다.
“레티시아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다고 하더냐.”
“그런 것 아닙니다.”
“허면, 왜 네가, 결혼도 안 한 네놈이 장난감 가게들을 털고 다니느냐. 무엇을 구해 달라는 말도 안 한다면서!”
“제가 직접 보아야…….”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야. 같이 알면 좋지 않겠느냐.”
“그것이…….”
베넷이 슬쩍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서는 거리만큼 마고가 악당처럼 그런 그를 쫓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슬금슬금 옆으로 붙어섰다.
어쩐지 저 가까이로 가면 안 될 것, 아니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과 마고와 베넷을 차례로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되레 얼굴색이 좋아지다니.’
폴이 치료를 위해 붙어 있다고 하더니만, 설마하니 제가 쓴 수를 알아챈 건.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이건 독이 아니었으니까.
은침에도 잡히지 않았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마력제도 아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약재로 보일 수도 있었다.
약과 다른 점이라면, 오랜 기간에 걸쳐 몸을 서서히 안 좋아지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었다.
물론 이번엔 시일이 촉박하여 이전에 쓰던 것보다는 조금 더 농도가 짙긴 했으나, 극독도 아닌 이걸 알아챌 수 있는 의원은 없었다.
‘이전의 병세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잖아.’
그러니 이번에 마고가 쓰러지면, 그저 ‘이전의 병세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이 저렇게 좋아서는.’
그가 쓰러진다 한들, 쉽게 넘어갈래야 갈 수가 없어 보였다.
‘젠장.’
어쩔 수 없나.
어차피 마고가 죽고 나면, 이 가문은 제 손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가신들은 마고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집안 어른들은 대부분이 제 편이었으니까.
‘가문 회의가 열리면, 승산이 있다.’
가신 따위 갈아 치우면 되는 것이고.
그러니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면 되었다.
윈드런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헬렌의 의지지 윈드런의 의지는 아닐 게 분명했다.
‘윈드런에겐 대충 적당한 걸 던져 주면 그만이야.’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친 안드레아가 입매를 문질렀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이 더 흐르면 곤란했다.
샤리에가 만에 하나 펠루아나 왕의 목이라도 가져오면.
‘끔찍하군.’
안드레아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내젓자-
“안드레아 님.”
그의 뒤쪽으로 수하 한 명이 바짝 붙어섰다.
어지간해서는 연회장에 들어올 일이 없는 이의 다급한 얼굴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샤리에 에시어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중이라 합니다.”
“…….”
그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게 이렇게 다급할 일인가, 싶어 그를 사납게 노려보자 수하가 마른침을 꼴깍 삼킨 채 고개를 숙였다.
“펠루아나 왕을 생포해 압송 중이…….”
퍽!
시끄러운 와중에도 또렷이 닿는 수하의 목소리에 쥐고 있던 술잔을 아귀힘으로 산산조각낸 안드레아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렸다.
“왕을 생포해?”
“예.”
잇새로 나직이 이어지는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수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샤리에 님께 영지를 내리실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
영지?
감히, 샤리에 그 더러운 사생아 새끼가?
저보다 더 먼저 영주가 된다는 건가.
“하.”
그가 잘 다듬어진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가주님께서는.”
“그것까지는 아직.”
안드레아가 여전히 베넷과 실랑이 중인 마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마고가 이 소식을 알든 모르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저 샤리에에게 가문을 넘기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제 아비라면 이 사실이 공식화되는 날엔 정녕 제가 설 자리 따위는 이 땅에서 지워 버릴 테니까.
‘내가 설 자리 따위는 이 가문에서 없어질 거야.’
그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일단은 그 딸년부터.
“오네로 간 아이들은.”
“아마도, 오지 못할 겁니다.”
일을 처리하고 있을 거라는 말을 삼킨 수하가 고개를 숙인 그 순간-
타다다다닥!
“세상에 제게 뭐예요?”
“어머, 어머.”
연회장 입구로 뛰어들어 오는 작은 아이의 모습에 연회장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졌다.
이 연회장의 화려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아이의 모습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구와 이어진 붉은 카펫 위를 지나 안으로 들어온 아이는 그 엉망인 모습 그대로 마고의 품에 파고들었다.
“레, 레티시아! 이게.”
“흐엉, 할부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등을 토닥여 주며 다급히 묻는 마고의 손길에 아이는 한참을 더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마고가 답답함에 복장이 터져서 죽을 뻔하고 나서야 고개를 든 레티시아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잔뜩 매단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부지이.”
“오냐, 누가 이랬느냐.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나 죽이려고 그랬어요!”
* * *
내 말 한마디에 연회장 안팎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가의 직계가 탄 마차가 황도 한복판에서 공격을 당한 게 아닌가.
“마차도 다 뿌서지고, 마부도 죽고, 피어스랑 엘론도 많이 다쳤어요.”
“뭐?”
“허면 어찌 오셨습니까.”
“제가 데려왔습니다.”
베넷의 다급한 물음에 뒤쪽으로 한참 물러서 있던 여인이 작은 아이를 다리에 매단 채 걸어 나왔다.
“미쉘!”
솔직히 고모의 등장이 참 절묘했다.
‘아니, 고모가 없었으면 어려울 수 있었어.’
피어스와 엘론의 힘에 내 이능을 더해 그들을 막아 낼 수는 있었겠으나, 내 이능이 검기가 아니니 단숨에 무찌를 수 없었을 거다.
한데, 그 상황에서 고모의 마차가 지나갈 줄이야.
‘대체 왜 거기에 고모의 마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모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살수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임이 확실했다.
“리리아나가 시간을 잘못 알려 주어, 늦게 출발하였는데.”
“잘못 알려 줘?”
“예, 초대장에는 5시로 되어 있었는데, 리리아나는 6시라고 하더군요. 레티시아에게 그리 들었다면서.”
“…….”
그랬다.
내가 받은 초대장은 6시로 되어 있었으니까.
솔직히 이 부분까지 건드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바였다. 당연히 베넷이 보낸 이가 건넨 초대장이니.
‘의심하지 않았던 내 탓이지.’
거기다 마차도.
‘흠, 베넷 옆에 첩자가 있네.’
흘끗 베넷을 보자, 그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떠올린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요새 일이 너무 많아서 무리하고 있었으니.
몸이 축날 만하지.
최소한 리안네 일에서는 손을 떼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떠나면 베넷도 숨 돌릴 틈이 생기겠지.
그러면 할아버지를 도와 가문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겠네.
어떻게든 베넷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내 사악함을 목구멍 안쪽으로 꾸욱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해서, 넌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쳤어요.”
“의원을 불러오라고 하마.”
“치유사들도요.”
“그래.”
“이능력자도요.”
“올가면 되겠느냐.”
“치유 이능에 특화된 사람으로요.”
“알겠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곤 베넷을 보자, 알겠다는 듯 그가 페일런을 향해 손짓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 일단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자 저 뒤쪽에서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안드레아.’
선을 넘어도 보통 넘은 게 아닌, 경고를 했음에도 들어먹지 못하는 숙부의 멍청함을 떠올렸다.
‘내가 대체 왜 저딴 인간의 눈에 들고 싶어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며 절절맸던가.’
가능하다면 전생을 파내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자-
“그래서 범인은 잡으셨습니까.”
베넷이 딱 알맞게 물음을 던져 주었다.
어쩜 이렇게 ‘쿵.’ 하면 ‘짝.’ 할 줄 아는 건지.
예뻐 죽겠네.
하지만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지 않겠나.
해서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으며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푸른 눈동자에 맞닿은 내 시선에-
하나, 둘, 셋.
최대한 내게 집중하도록 차분히 기다리다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