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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37)화 (137/141)

137화

멍청하면 저렇게도 자기 죽을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앞에 선 이들을 쭉 보았다.

그러자 안드레아를 빤히 보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 가는 게 보였다.

“귀족을 음해하는 건, 그것도 대귀족을 음해하는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으, 음해라니요!”

케벨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안드레아와 베넷의 얼굴을 차례대로 바라본 케벨이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지금 상황을 곱씹어 파악하듯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케벨이 아랫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드디어 마음을 먹은 건가.’

하긴, 제가 살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수밖에는 없겠지.

지금 안드레아가 필사적으로 케벨을 공격하는 것처럼.

이젠 그 어떤 죄책감도 없이 안드레아에 대한 것을 폭로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러면 나는 그냥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네.

아주 조금 울먹이며 눈물을 머금은 채 말이다.

* * *

“당치도 않습니다, 가주님.”

케벨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식은땀을 흠뻑 흘리며 고개를 젓는 케벨의 말에 마고의 시선이 안드레아에게로 향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붉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은 얼굴, 당황하여 잘근잘근 씹어 대는 입술만 보아도 지금 이 상황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제가 어찌 제 조카를 해치는 짓을 하겠습니까.’

‘미련한 놈. 이렇게까지 했었어야 했더냐.’

마고가 지팡이를 쥔 손을 꽉 틀어쥐었다.

이제 더 이상 용인할 수가 없는 수준까지 와 버렸다. 최소한 여기까지는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가볍게 혀를 찬 마고가 고개를 들어 뒤쪽으로 물러서 있는 레티시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마, 저 똑똑한 아이는 오늘 제 숙부가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를 가져왔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 숙부를 탄핵하는 일을 벌이지는 못했겠지.’

제가 혈육의 정에 휩쓸려 주저하는 사이, 이 작은 아이는 스스로를 지키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가 준비해 놓은 판에 들어와 버린 지금, 마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짧게 침음했다.

“레티시아.”

“네, 할부지.”

“이자가, 네 집에 침입해 무슨 짓을 했더냐.”

괴로운 심경을 대변하듯 간신히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마고의 얼굴을 빤히 보던 레티시아가 짧게 내쉰 한숨과 함께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펠.”

그 뒤쪽으로 손을 뻗어 샤리에가 사 주었다 제게 자랑하던 악어 인형을 품에 안았다.

“인형?”

“인형으로 뭘 한 걸까요?”

“저 약병은 또 뭐고요.”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고가 눈을 가늘게 뜨자-

“이 인형에 약을 뿌려 놨어요.”

“가, 가주님! 그건 전부-”

“닥쳐라!”

다급히 몸을 들썩이는 케벨의 말을 끊어 낸 마고가 서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가운 그 눈동자에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잊은 듯 온몸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케벨의 상태만은 아니었다.

안드레아 역시 지금의 상황에 당혹스러운 것은 마친가지였다.

“인형에?”

“정확히 말하면 인형뿐만 아니라, 제가 사용하는 물건 대부분에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제게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그 후로도 두세 번이나 더 집에 들어와 나쁜 짓을 하더라고요.”

“그건 어떻게 알았지?”

“올가가 알려 줬어요!”

레티시아의 입에서 나온 ‘올가’의 존재에 마고의 눈매가 깊어졌다.

“올가를 불러오거라.”

“여기, 있어요!”

그리고 부르기도 전에 준비한 것처럼 나타난 올가의 모습에 마고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을 볼 작정이구나.’

마고의 시선이 안드레아의 얼굴에 닿았다가 이내 녹듯이 사라졌다.

“설명해 보아라.”

“제 이능이 워낙에 순수한 물질의 결정체라 그런지 독을 굉장히 잘 감지한답니다. 그런 불순한 것들이 주변에 있으면, 움직이질 않아요.”

“……”

“하루 정도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 다음 날엔 더 심해지더군요. 해서 마도구를 가져와 확인해 보았는데, 아기씨의 물건에만 유독 덕지덕지 발려 있었습니다. 인형, 의자, 깃펜, 침대.”

“마도구?”

“독을 감별하는 거요.”

“설마 극독이 발려 있었다는 게냐.”

“요즘 나온 마도구는 꼭 극독이 아니어도 아주 소량의 독까지 감별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

“가, 가가주님!”

올가가 ‘마도구’라는 카드를 꺼내자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든 건지 케벨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늦은 뒤였다. 올가의 손에서 시동이 걸린 마도구는 마력을 흡수해 공간 안에 있는 독들을 감지해 냈다.

다양한 색으로 구분된 독들이 연회장 이곳저곳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며 장관을 이루었다.

수많은 색들 중에 유독 레티시아 손에 들린 약병에서부터 흘러나온 푸른색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단순히 레티시아의 손과 입 그리고 악어 인형에만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파란색 물감으로 채워진 양동이를 그녀의 머리 위에 쏟아붓기라도 한 듯 온몸에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그리고 그 푸른색은 마고의 앞에 꿇어앉은 케벨의 양손과 주머니 그리고 안드레아의 손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금 이 광경을 보고도 의심을 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다만-

“가, 가주님.”

더 큰 문제는 그 푸른색이 희미하게나마 마고의 손과 지팡이 그리고 입에서도 보인다는 게 점이었다.

사람들의 경악에 찬 시선에 마고 역시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살펴보았다. 레티시아의 몸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푸른색이 제 손과 지팡이에도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일시에 모든 이들이 숨죽인 듯 고요해졌다. 단순한 소란일 거라 생각했는데, 가주 시해 사건으로 넘어가 버렸다.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을 리라는 확신에-

“전, 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기어 나온 케벨이 푸른색이 덕지덕지 발린 손으로 마고의 바지 자락을 움켜쥐었다.

“제, 제가 아기씨께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짓을 벌였겠습니까!”

케벨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에 마고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떨어졌다.

서늘한 칼날 같은 눈동자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로 섬뜩했다.

케벨이 마른침을 삼켰다.

온전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마도구라니.’

제 손에 묻은 푸른 자국을 보며,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건 안드레아 님의 명령이었을 뿐입니다.”

“닥쳐라! 이놈!”

안드레아가 소리를 내지르며 마고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아들이 아닌 이런 놈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죠? 이자가 저를 모함하려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다. 제가 아버지 아들인데 왜 이런 짓을…. 아니에요.”

안드레아가 손끝에 묻은 푸른색을 감추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왜 레티시아와 아버지를….”

하지만 그 순간-

‘어쩔 수 없지,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그건 없습니다. 제가 마도구로 확인까지 했습니다.’

‘독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며칠간 지켜보았는데도 독이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들어가지 못하면, 나올 때 처리하면 될 게 아니냐.’

‘그 계집의 얼굴을 연말까지 보게 만들 작정은 아니겠지.’

‘연말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르신 쪽은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작은 소라 껍데기처럼 생긴 마도구에서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간중간 케벨의 목소리도 작게 섞여 들리긴 했으나, 명백히 안드레아의 목소리였다.

시간의 역순으로 흘러나오는 그 명백한 적의에 마고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안드레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챈들러를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는 벨리아 숙모와 레오나르도의 시선까지.

그 누구도 쉽사리 안드레아를 두둔하지 못했, 아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그 시선들에 안드레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 상황만 벗어나면 된다. 이 상황만.’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 있지.

“아, 아버지.”

그가 매달리듯 간절한 눈빛으로 마고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제가 어머니의 친아들이지 않습니까.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어머니의 마지막 유지.”

“…….”

선대 공작부인을 입에 올리는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마고의 시선이 살기를 띤 채 번뜩였다.

하지만 지금 안드레아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기억하시겠지요.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하신 당부를요.”

죄책감을 건드리면 되는 일이었다.

‘샤리에, 그 버러지가 이럴 때는 내게 도움을 주는구나.’

클클 차오르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

“가주님.”

하지만 그 순간, 고개를 든 안드레아의 뒤쪽으로 뛰어들어 온 시종이 마고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잔뜩 성이 난 마고의 목소리에 마른침을 꼴깍 삼킨 시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샤리에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뭐?”

샤리에라는 말에 안드레아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시종의 말에 이어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샤리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저 사신 같은 눈동자에 걸린 아이의 모습.

푸른색을 뒤집어쓴 아이와 제 손에 묻은 것 그리고 마고가 들고 있는 약병까지.

제 죽음이 코앞까지 온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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