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가주님.”
“내가 한 말을 지켜야지.”
‘레티시아를 건드리면, 방계를 후계로 삼을 것이다.’
그때의 그 말을 지키겠다는 마고의 선언에 베넷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방계에게 후계가 넘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몸에 묻은 삿된 것이 푸른색만 있었던 게 아님은 너도 보았겠지.”
“…….”
마고의 뜻은 확고했다.
“상황을 바로 세워야지.”
“…….”
“그래야 내가 죽고 나서 상황이 편안해질 게 아니냐.”
허허 웃은 마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말은 방계를 이용은 하되, 후계 자리를 넘기지는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다른 이들을 견제하기 좋을지도.’
샤리에가 타루스로 물러나고 나면, 안드레아가 빠진 에시어의 직계는 윈드런뿐이었다. 그가 가주가 될 깜냥이 아니라는 건 황도의 귀족이라면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내 부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지.’
그 아들인 알레프가 작위를 이어받기를 바라니까.
그런 상황에서 윈드런 하나만 남겨 놓는 것보다는 방계를 끌어들여 견제하는 편이 옳았다.
샤리에가 후계가 되는 게 가장 좋은 수였으나, 지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황명이었으니까.
거기다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가 하사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마당에 그걸 거부하고 에시어의 가주가 되겠다고 하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가주님의 뜻이 가장 옳았다.
“허면 레티시아 아기씨께서는.”
“같이 가겠다는구나.”
“후계의 자격은.”
“필요 없다고.”
허허 웃은 마고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빠랑 같이 있을래요.’
마치 제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는 듯 맑게 웃는 레티시아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설마 예지로 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예지 능력을 가졌다 해도 스스로에 대한 건 볼 수 없는 게 불문율이었으니.
그건 아니겠지.
그저 이번 일로 크게 놀랐으니, 아비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일 터.
“당분간 제 아비와 같이 지내다 7살이 지나기 전에만 다시 오네로 돌아오면 되는 일이니, 상관없다.”
“하지만.”
“내버려 두거라. 제 아비랑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아니냐.”
레티시아를 떠올리며 웃은 마고가 고개를 돌렸다.
“올가에게 레티시아와 함께 갈 수 있는지 묻고, 가겠다고 하면 보내 주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옆집에 있는 리안이요.’
‘황자예요.’
‘걔가 그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만약 그 날이 오면 조금 도와주세요.’
레티시아의 부탁.
이능으로 아이가 훗날 황자가 되는 것을 보았다며, 천연덕스럽게 웃던 아이의 말을 떠올리며 마고가 팔걸이에 손을 올려 턱을 괴었다.
‘에시어는 황자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
‘알아요, 후견인이 아니라 그냥 제가 황도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만 잘 부탁드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황자가 아니라, 그냥 어린아이잖아요.’
마치 누나가 동생을 챙기는 듯한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난 마고가 베넷을 올려다보았다.
“레티시아가 지내고 있는 집 옆에 사는 꼬마들을 네가 가르치고 있다고.”
“아, 예.”
“자주 들러 챙겨 주거라.”
“…….”
“일이 있으면 내게 먼저 알리고.”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리안이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린 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일 테고, 그를 황궁으로 들여보내는 걸 원하지는 않아 보였으니.
‘종종 살펴봐 주면 될 일이겠지.’
“알겠습니다.”
베넷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고가 창밖을 보았다.
* * *
일주일이 지나고, 리비스에서 대승을 한 황제 군이 황도로 들어왔다. 샤리에를 선두로 한 위풍당당한 모습에 제국민들은 모두 황제 군의 용맹함을 찬양했고, 그 축제는 사흘 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 안드레아의 재판이 열렸다.
별 탈이 없으면 법정 최고형이 내려질 거라는 게 베넷의 설명이었다.
“귀족이 귀족을 해치려 한 것만으로도 중죄인데, 그것도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 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안드레아 숙부는 마지막까지 할아버지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듯 공작부인과의 약속을 언급한 듯한데.
할아버지는 ‘가문에서 내쫓지 않고, 그 식구들을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공작부인과의 약속은 차고 넘치게 지키고 있다.’라는 대답으로 그의 발악을 묵살했다고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지던 안드레아의 적의가 조금은 허망하게 막을 내렸고, 그 사이 아빠는 이번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를 하사받게 되었다.
북부의 타루스.
그건 하사가 아니라 벌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영지를 받았으니 상이라는 사람도 있었으며, 작위 없는 영지가 무슨 상이냐며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모를 테니까.
거기 뭐가 있는지.
황금보다 수백 배는 더 귀한 게 묻혀 있는 걸 모르니까.
흐흐, 하고 악당처럼 웃어 버릴 것만 같아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솔직히 하루라도 빨리 타루스에 가고 싶었다.
한데 준비해야 할 게 뭐가 이리 많은지.
“영지를 하사받아 영주가 되시는 거니, 이전보다 챙길 것이 많아질 수밖에요.”
“그렇긴 하지.”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베넷이 되레 서운하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그리 빨리 가고 싶으십니까?”
“응, 아. 음.”
베넷의 말에 생각도 않고 끄덕이다 이내 아차 싶어 고개를 저었다.
“뭐, 가기로 한 거니까.”
“아, 예.”
심통을 부리듯 퉁명스러운 베넷의 표정에 피식 웃었다.
“편지 자주 보낼 건데. 통신 마도구도 자주 쓸 건데.”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베넷이 없으면 내 일이 안 돌아가는데. 그리고 황도쪽 소식도 수시로 들어야 하고.
“아빠랑 잘 지내고 있을게. 가끔 놀러도 와 줘, 베넷.”
“알겠습니다. 시간 날 때 찾아뵙겠습니다.”
“응.”
베넷의 말에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페일런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리고 그때 말씀하신 것.”
“아.”
페일런의 손에 들린 물건에 짧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딱 제시간에 맞춰 왔네. 고마워, 베넷.”
“별말씀을요. 그리고 이것도.”
페일런에게 물건을 내려놓으라 손짓한 베넷이 이어 아래쪽에 있던 상자 하나를 건네었다.
“이게.”
“생일 축하드립니다.”
“아.”
맞다. 내 생일이지.
어쩐지 생일을 축하받는 것이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자, 이때다 싶었던지 헤일과 펠 그리고 붕대를 감은 피어스와 엘론이 문을 열고 너나 할 것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저도 있습니다.”
“이것도!”
“아기씨, 저는 아래층에 케이크 만들어 놨어요! 그때 말씀드렸던 3단!”
“이건 아기씨 드릴 옷이에요. 입어 보시겠어요?”
경쟁하듯 내 앞에 각자 가져온 선물을 자랑하는 그들의 모습에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흘렀다.
“아, 아기씨, 왜.”
“좋아서, 레샤 기뻐서.”
그래도 생일을 오네에서 보내고 타루스로 떠나게 된 게 다행이었다.
평생에 이렇게 행복한 생일이 또 있었을까.
너무 행복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감정이 북받쳐 올라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고마워, 다들.”
그리고 울음을 가득 매단 채로 우는 내 얼굴에-
“아기씨이.”
“흐어엉.”
헤일과 펠이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고.
“나도 갈래요, 타루스. 저도 데려가 주세요.”
“펠?”
“어차피 여기서 사나, 타루스에서 사나 똑같아요. 그냥 아기씨 옆에서 아기씨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리면서 살래요.”
펠의 말에 헤일을 돌아보자, 그녀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희 식구들 모두 타루스로 넘어가면 아기씨도 편하실 거고.”
“그건 안 돼. 펠에게는 안나도 있고, 다른 동생들도 많은데. 타루스로 데려갈 수는 없어.”
“아기씨.”
“그리구 펠은 여기서 해 줘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도 있는걸?”
“무슨.”
“비누.”
“아.”
그제야 며칠 전 대화를 떠올린 펠이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제가 자신만만하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았는데.”
“중요한 일이야. 그리구 내가 뭐 평생 타루스에 있는 것도 아닌데. 다 같이 그리로 가 버리면 어떻게 해.”
“다시 오실 겁니까?”
“아마도?”
때가 되면 당연히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마그누스 때문에라도 안 올 수가 없지.
비즈니스를 하려면 큰 시장으로 와야 하니까.
아빠가 에시어의 가주가 되든, 안 되든 황도에는 언젠가 돌아와야 했다. 그러니-
“그럼 저는 가겠습니다.”
“헤일?”
“전 아기씨 하녀니까요.”
헤일의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랑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이해는 하는데.
“하지만 너는 에시어 사람인데?”
그녀는 에시어 가문의 사람이었고, 나는 지금 그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헤일을 데려가도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긴 했다,
그 모습에 베넷이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기씨도 여전히 에시어의 사람입니다.”
베넷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맞네.
아빠에게 작위가 내려진 건 아니니까.
여전히 난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였다.
“가주님께서도 아기씨가 데려가고 싶은 이들은 얼마든지 데려가도 좋다고 하셨으니, 헤일은 당연히 따라야죠.”
“그럼 저도요.”
“엘론?”
아니, 왜들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