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헤일은 그렇다 쳐도 엘론은 에시어의 기사인데, 나를 따라 타루스로 가도 되는 건가?
의아한 마음에 베넷을 보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괜찮다는 베넷의 말에 앞에 선 이들을 쭉 바라보자, 피어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발끝을 떨었다.
저도 지금 가겠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데.
피어스는 아빠가 타루스에서 기사단으로 보낸 사람이니까.
그 사실이 짜증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피어스는 여기서 리안이랑 쟈이든 계속 수업해 주면 좋겠어. 우리가 다 가 버리면 쟤네만 남잖아.”
“…….”
“이 집을 그냥 비워 두는 것도 좀 그러니까, 여기서 아이들이랑 같이 지내도 좋구.”
“하지만.”
“비워 두는 것보다는 낫지.”
내 말에 반발하려는 피어스를 누르듯, 아빠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빠!”
“영주님.”
“놀리는 게냐.”
고개를 숙이는 베넷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아빠가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터진 웃음에 방 안에는 온기가 화사하게 퍼졌고, 이어-
“생일 축하한다, 레샤.”
아빠가 또! 인형을 내밀었다.
예전에 내게 선물했던 악어 인형과 꼭 닮은 그것에 나도 모르게 파앗, 하고 웃어 버렸다.
* * *
“듣자 하니, 주인님 죽을 뻔했다던데.”
“…….”
검을 휘두르는 리안의 곁에 앉아 있던 쟈이든이 그를 흘끗 보았다. 흔들리는 검 끝과 살짝 주춤하는 몸짓을 보니, 당황한 듯 보였다.
“왜.”
“그 숙부라는 사람이 주인님에게 약을 썼다나 봐. 거기다 며칠 전에 마차도 습격했대. 피어스 팔 부러진 거 그때라더라.”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때문에 공작가가 좀 어수선한 모양이야. 그 숙부라는 사람은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 사람을 포함해서 고용되었던 용병부터 살수까지 모두 처형되었대.”
“그래서.”
“어?”
순간 리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입을 벌린 쟈이든이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에 검을 거둔 리안이 쟈이든 앞에 섰다.
“그래서 다친 데는… 없대?”
“아, 주인님?”
“…….”
쟈이든이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은 일단 무사하긴 하시지.”
“일단?”
“주인님이 안전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샤리에 님은 전장에 계시고, 에시어에는 다른 직계들이 있으니까.”
쟈이든의 말에 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레티시아, 그 아이의 주변이 복잡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순히 팔자 좋은 귀족 가문의 레이디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응석받이가 아니라는 것도.
‘너 지금 아프잖아. 그러니까 빌려주는 거야.’
‘나중에 만나면 그때 갚아.’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다.
제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켜 줄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돕고 싶었어.’
숨을 깊게 몰아쉬며 고개를 젖혔다.
‘차라리 내가 신분을 밝히면.’
그래서 힘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많이 그 아이를 도울 수 있을까.
엄마는 절대, 그 근처에도 가지 말라 했지만.
습관처럼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럼에도 이걸 남기셨으니.’
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엄마가 진짜 바랐던 것이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그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옆집의 3층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안 계시네.”
“…….”
“바쁘신가.”
흘끗 리안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쟈이든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하지만 리안의 시선은 레티시아가 항상 자신들을 훔쳐보던 3층 창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오네 집에 있는 짐을 타루스로 보내고 나서야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왠지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기씨.”
펠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옷자락을 잡았다. 눈가에 울음이 그득 들어찬 것이 금방이라도 와락 울어 버릴 것 같은 그녀의 얼굴에-
“울면 안 올 거야.”
“너무해요!”
못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펠이 울음이 쏙 들어간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안아 봐도 돼요?”
주저하듯 묻는 말에 피식 웃으며 내가 먼저 손을 뻗어 펠의 목을 끌어안았다.
“잘 지내구 있어.”
“흑, 네.”
끝내 울어 버리는 펠의 뭉개지는 목소리에 그녀의 등을 작은 손으로 토닥였다.
이렇게 정이 깊어서는.
‘그래서 펠이랑 헤일이 좋았던 거지만.’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헤일의 모습을 흘끗 올려다보자-
“시간 없어, 얼른 뚝 그쳐.”
헤일이 펠을 나무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말에서야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펠의 울먹이는 얼굴에-
“내가 말했던 거 잘 부탁해. 며칠 뒤에 베넷이 말한 마법사들이 여기로 올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하면 베넷이나 피어스한테 말하면 돼.”
“그럴게요.”
“고마워, 펠. 펠이 있어서 다행이야.”
내 말에 훌쩍이며 눈물을 닦은 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엷게 웃으며 피어스를 돌아보았다.
“저거 잘 부탁해.”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키며 피어스에게 당부하자,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전달하겠습니다.”
그 말에 “웅!” 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섰다.
처음에 가지고 왔던 짐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어쩐지 텅 빈 것만 같은 방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서랍장 하나 빠진 건데 엄청 휑해 보인다.”
“그러게요. 큰 것도 아니었는데.”
“응. 서랍장 잘 챙겼지?”
“네. 망가지지 않게 꽁꽁 싸매서 보냈어요.”
“잘했어.”
어쩐지 팅커벨이 꽥꽥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도 같았으나, 애써 무시하곤 방을 나섰다.
아마도 2년.
길면 4년.
그 안에는 다시 올 일 없는 이 조그마한 집의 문을 닫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러곤 작게 난 창문으로 보이는 옆집의 한 귀퉁이에 잠시 들렀다 갈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뭐 하러.
괜히 반감만 살 뿐이지.
그래도 인사라도.
아니야.
두 방망이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단호하게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짐과 사람들을 챙기던 헤일이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랐다.
“아빠는?”
“포털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응.”
애써 리안과 쟈이든의 집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 그쪽에서 햇빛이 너무 들어오네. 커튼 좀.”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커튼을 쳐 바깥이 보이지 않게 하곤 앞쪽을 두드려 재촉했다.
“얼른 출발해.”
“예.”
그 말에 가볍게 이는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거리를 내달렸다.
그렇게 골목에서 벗어나 황궁 쪽에 있는 포털로 향하는 그 길목에 마침 검은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마주 오고 있었으나, 그게 어디에 멈춰 서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그로부터 1년 뒤, 황도에서 신문이 배달되었다.
발신인은 베넷이었고, 그 신문 한 장으로 인해 황도가 발칵 뒤집혔다는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신문의 내용은 홀데 남작이 열 명 가까이 되는 마법사들을 이용해 디웨스를 파괴하려 했고, 그 여파로 지반이 뒤틀리는 바람에……
“마그누스라는 막대한 마력을 지닌 마법석이 발견되었다.”
미쳤네.
아니, 미치겠네.
이게 이렇게 빨리 발견될 게 아니었는데.
홀데 남작의 그 엄청난 독기가 만들어 낸 상황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뒤로 미뤄졌어야 했는데.
너무 일찍이 세상에 드러나 버린 마그누스에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그래 봤자 홀데 목장도 내 거, 마그누스 최대 광산도 내 거.
자잘한 광산들도 다 내 거였다.
다만 묵혔다 꺼내려 했는데, 덜 익혀진 채로 꺼내질까 그게 걱정이다만.
‘내가 안 내어 놓으면 그만이고, 아빠가 모른다고 하면 그만인 일이지.’
공식적으로 타루스의 광산들은 모두 폐광 상태니까.
굳이 타루스의 것까지 빼내 쓸 필요는 없으니 일단은 조금 묵혀 두면 될 일이다, 싶어 한쪽으로 치워 두곤 다음 신문을 펼치자-
“칼리안 율리아스 피노 콘스타누 베아테 폰 소모멧.”
‘잃어버렸던 황제의 막내아들을 찾았다.’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신문 기사에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이것 역시 내가 전생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라.’
전생대로라면 마그누스는 8년 후에 발견되어야 했고, 칼리안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 역시 3년은 더 지나야 했다.
‘뭔가 어긋나고 있어.’
‘나’라는 변수가 일으킨 변화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거였다.
그리고 그 상황이 대체 어디까지 번져 나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에 숨이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나로 인해 변한 세계 속에서 혹여 다른 피해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영애.”
가벼운 노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헤일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아빠 오신대?”
“아뇨.”
“그럼?”
망설이는 듯한 표정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입술을 잘근 씹던 헤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가볍게 헛기침을 한 헤일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영주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