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헬스장 (6)
71위 마계의 대회의실에 모인 군단장들과 시틀라는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데굴, 또르르르.
그때 긴장감에 깃털펜을 떨어뜨린 에키드나가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
에키드나가 빠르게 사과했다.
그러나 지금 홀의 분위기는, 그 펜 소리가 기폭제가 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만티코어.”
시틀라의 무거운 음성이 홀을 가득 채웠다.
“……미안하다.”
“알고는 있는 거냐?”
만티코어는 시틀라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쁘띠 케르베로스는 마계의 모습을 지우고자 강아지 모양으로 소환하기로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때로는 케르베로스의 모습으로도 변하고, 단탈리온을 지켜야 하는 법.
허나, 지금 소환된 케르베로스는 그냥 소형 강아지 수준이었다.
“내가 그러니까.”
“…….”
“마력 함부로 쓰지 말라 그랬지.”
사실 만티코어의 입장에서도 억울하기는 했다.
자신의 군단을 과시하기 위해 마력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쁘띠 케르베로스가 소형견으로 소환된 이유가 마력 부족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시틀라에게 있어서는 옳고 그르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단탈리온 님이 하시는 거, 들었지?”
“……그래.”
“단탈리온 님은 쌀 한 톨만 한 마력도 아끼시려고 저렇게 라이터로 불붙이시지 않냐! 그런데 넌, 군단장이라는 새끼가 마력을 흥청망청 사용해!? 그게 지금 군단장이 가질 태도야!!”
마계 코인과 그로 인해 발현되는 마력은 공동재산이라면 공동재산.
이번에는 군단장들의 비상금을 모아서 추가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게 없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같은 마계라도! 소환 의식을 연속으로 하면 마력 소모가 배로 드는 걸 모르는 거냐!”
“미, 미안! 시틀라! 나도 습관적으로 하다 보니…….”
“습관!? 습과아안!? 네가 71위 마계의 대출금을 싹 다 쓰고 있었구나! 너 때문에 적자가 나는 거였어! 이 망할 새끼! 땅 파면 마계코인이 나오는 줄 알아!?”
사실 땅을 열심히 파면 마계 코인이 생성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의 시틀라에게 그런 사실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만티코어 너 때문에! 71위 마계 존속이!!!”
“시, 시틀라! 진정해!”
“이거 놔, 에키드나!!!”
결국 에키드나를 비롯한 다른 군단장들이 시틀라를 막아선 후에야 시틀라의 흥분을 잠재울 수 있었다.
“후……. 안 되겠어. 지금 너희 군단장들, 지난주까지 다 해서 1년간 마계코인 사용 내역 제출해.”
“뭐!?”
“단탈리온 님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셨…….”
몇몇 군단장들의 항의가 있었지만, 시틀라는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그들을 노려봤다.
“단탈리온 님은 71위 마계의 존속을 나에게 맡기셨다. 바로 이 몸, 시틀라에게 말이다!”
그 말에 다른 군단장들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위기인 71위 마계다! 마왕님은 이 마계를 지키고자 홀로 인간계에서 개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군단장이란 놈들이 마계 코인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걸 아시면! 어떻게 되겠어! 엉? 어떻게 되겠냐고!”
그때는 71위 마계가 단탈리온의 손에 삭제될 수도 있었다.
단탈리온에게 처형당하는 상상을 하던 군단장들이 히끅, 딸국질을 했다.
“안 되겠어. 지난주가 아니라, 어제까지의 사용 내역까지 싹 다 출력해서 제출해.”
“시, 시틀라 언제까지 제출할……,”
“지금 당장!!!! 오늘 안건 끝!!!”
그렇게 군단장 회의를 마무리시켜버린 시틀라는 씩씩대며 마계 통장을 열어 보았다.
오늘 잔금: -999,697,190,420,795
벌써 숫자가 꽤 늘어 있었다.
‘단탈리온 님……!’
벌써 군단장들의 비상금도 써 버렸고, 자신의 비상금도 사용했다. 마계코인은 착실히 대출금을 만들어만 갔다.
물론, 다른 마계의 마왕에게 굽신거리며 대출을 해 달라 요청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날에는.
‘이자가 40%는 기본일 텐데.’
사실상 원금은 갚지도 못할 수도 있다.
‘단탈리온 님……!’
단탈리온이 조속히 마계 코인을 벌어올 수 있도록 저주를 하는 것.
그것만이 지금 시틀라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오늘은 헬스장에서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그때까지 운동을 주제로 여러 스토리들을 고민해 보았다.
앤디, 제인, 오로바스, 그리고 나.
넷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작사를 했고, 앤디와 제인이 작곡을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주 간단한 해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장 왔는가.”
“아, 예……. 그런데, 진짜 하시는 거……죠?”
헬스장 자리 한쪽을 싹 비워 두고 밴드 공연을 한다. 이것만으로도 헬스장 사장인 서갑수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회원님들이 불편하시지는 않으려나…….”
물론, 사전에 공지도 미리 해 두었었다.
메탈 밴드가 헬스장에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사장님이 미쳤다거나, 헬스장과 메탈이 어울리기나 하냐, 등의 이야기.
그래도 컬트적 사건이기는 했기에 운동과 락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호기심 어린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우리 헬스장도 저런 거 했으면 좋겠다, 같은 반응들 말이다.
그 덕분에 서갑수도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그러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는 한데…….”
벌써 회원들과도 약속을 해 버린 참이었다. H&B 헬스장 회원 중에서도 밴드를 좋아하는 회원들이 제법 있었으니 말이다.
-사장님, 이거 공연 해 주시면 제가 쉐이크 물병 기증합니다!
-저는 소개 많이 하겠습니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라고 하면 다들 알걸요?
서갑수는 회원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살짝 한숨을 쉬었지만.
내심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기는 했다.
“어쨌든, 많이들 오시면 좋겠네요.”
공연을 위해 정리를 해 둔 공간을 제외하면, 헬스장을 이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일반 회원들은 헬스장을 이용하면서 공연 무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곧 이 몸의 존재에 압도당할 필멸자로구나.”
“……그래서,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서갑수는 공연 전에 자신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말했다. 그 물음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한 개의 물품을 꺼냈다.
“이걸 들어라.”
“……?”
내가 건넨 물건을 엉겁결에 손에 쥔 서갑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왜……?”
“오늘 자네는 마왕군 선봉장이다.”
서갑수의 손에는 한쪽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캠핑용 도끼가 들려 있었다.
“잠깐 잠깐 잠깐!!!!”
그때 앤디가 달려오더니 서갑수의 손에서 도끼를 회수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리얼리티를 살리려다 보니 그만. 이거 쓰시면 됩니다!”
앤디는 장난감 도끼를 두 개 꺼내더니 서갑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런 장난감보다는 진짜 도끼를 써야…….”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하려고! 안 돼!”
결국, 내 의견은 앤디에 의해 묵살당했다.
하긴, 인간들이 놀라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인 법.
“공식 팬 1호는 어디 있느냐.”
“카메라 세팅해서 온다고 하던데?”
오늘 공연은 박은환의 카메라로 영상도 남길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적당한 퍼포먼스도 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분장 준비도 되었는가.”
“당연.”
헬스장 공연까지, 앞으로 1시간이었다.
* * *
웅성웅성.
공연 시작 10분 전이 되자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었다.
예술가, 음악가의 거리인 홍대 근처에 위치한 헬스장이기 때문일까.
예상보다도 더 많은 관객이 몰려오자 서갑수도 당황해했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서갑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헬스장 전단지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H&B 헬스장에 와 주신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오늘 등록하시면 제가 서비스 많이 드리겠습니다!”
그 장사 수완에 단탈리온도 혀를 내두르며 칭찬했다.
“역시 지배자답군. 기회를 놓치지 않는구나.”
단탈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들 됐는가.”
그리고 밴드 멤버들을 둘러본 단탈리온.
모두가 하얀색 분칠을 하고, 머리에는 악마의 뿔을 달고 있었다. 특히 단탈리온의 얼굴에는 사이사이로 갈기가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만티코어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훗. 역시 진태로다.”
마계의 악마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오로바스이니 만큼, 분장을 할 때는 더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는데.
제법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데스맨이 하고 있는 분장이 만티코어라고?”
“그렇다. 우리 71위 마계의 7군단장이며 이번에 케르베로스 소환에도 큰 공을 세운 장수로다.”
만티코어의 성과를 되새기면서 조만간 상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단탈리온이었다.
“나는?”
“앤디, 자네는 고블린이다.”
“고블린은 마계에서 좀 강한가?”
“강하겠느냐. 잡졸 중 하나다.”
단탈리온의 설명에 앤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잘만 해낸다면 다음에는 오우거로 바꾸는 걸 고려해 보도록 하지.”
“그거도 싫다……. 좀 멋있는 악마는 없어?”
“마왕과 군단장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느니.”
그 말에 앤디가 살짝 아쉬워했다.
“나는? 난 누구로 한 거야?”
제인은 하얀색 분을 칠하고 그 위로 뱀의 비늘 같은 형태로 피부에 그림을 그려 둔 상태였다.
“제인은 11군단장인 에키드나다.”
“와! 난 군단장이야?”
“아니 잠깐! 나는 왜 잡졸이고 제인은 군단장인데!?”
“에키드나와 닮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인데. 별로더냐.”
단탈리온은 제인의 얼굴이 에키드나와 닮은 점이 제법 있다면서 말했다.
“특히 이목구비가 아주 비슷하다. 다음에 얼굴을 서로 보여 줄 기회가 온다면 좋겠군.”
“헤헤 난 군단장이다!”
“좋겠다 군단장…….”
“어허,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 하등한 고블린 따위가!”
“캐릭터도 바뀌는 거야!? 아니 근데 나 12군단장이라며!?”
앤디와 제인이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오로바스도 분장을 마치고 드럼 스틱을 손에 쥐고 있었다.
“데스맨 님, 준비되었습니다.”
“분장은 마음에 드느냐.”
오로바스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예! 데스맨 님이 직접 만져 주신 이 분장, 평생의 가보로 삼겠습니다!”
“훌륭하도다.”
단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다가온 작은 생명체에게 몸을 기울였다.
“오늘 네 역할이 매우 크도다.”
단탈리온의 손이 작은 생명체의 머리에 닿았다. 머리를 쓰다듬자 작은 생명체가 이에 화답했다.
“꺙! 꺙! 끼잉 끼양!”
시루베로스의 분장을 확인한 단탈리온은 마지막으로 멤버들에게 말했다.
“오늘 공연은 우리 RRR밴드에게 있어 매우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것이다.”
앤디와 제인이 침을 꼴딱 삼켰다.
“헬스장의 공연만 잘 이루어낸다면 우리의 노래가 헬스장에 울려 퍼지고, sns에 올라가는 것도 시간 문제.”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마계코인 형성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간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마계코인이 더 많이 생성되는 법.
“그나저나 이 몸의 이름이 항상 빠져 있군. 오늘부로, 이 몸은 단탈리온 데스맨이라 칭하겠다.”
“예! 단탈리온 데스맨님!!”
오로바스의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단탈리온이 말했다.
“이 몸의 밴드는, 인기 급상승 밴드가 될 것이다. 다들 동의하는가.”
“당연히 그래야지!”
앤디가 기타를 들며 동의했다.
“오늘 제대로 찢어 보자.”
제인도 의지를 다지며 말했다.
“끝까지 단탈리온 데스맨 님을 따르겠습니다!”
오로바스의 멘트를 마지막으로 단탈리온이 말했다.
“좋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
단탈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마왕군의 진격이다.”
* * *
박은환은 관객석의 제일 뒤편에서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리고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되는 시점.
예상보다 관객들이 많았다.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인기가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박은환의 SNS 마케팅 덕분이었다.
“자, 모여 주신 여러분들, 오늘 공연을 하는 RRR밴드의 너튜브와 인별그램 주소입니다!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이따 여기로 와 주세요! 참, 그리고 팬카페 사이트도 있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말을 했지만, 다들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았다.
‘공연을 보면 또 인식이 달라질 테니까!’
그녀는 RRR밴드의 저력을 믿었고, 메탈 밴드의 장점을 그들이 모두 보여 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부족하지 않게끔.
챠아아앙!!!!
오로바스의 드럼 소리가 공연의 시작을 알렸고.
키잉 쟈쟈쟝!
앤디의 기타 소리가 그 뒤를 받쳐 줌과 동시에
둔둔두둔둔
제인의 베이스가 두 악기의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탈리온의 음성.
“레이디스 앤 젠틀맨…….”
무대 뒤편에서 걸어 나오는 단탈리온의 모습에, 헬스를 하고 있던 회원들도 고개를 돌렸다.
“웰컴 투 더 베스트 데블스 오브 락앤롤.”
단탈리온의 마이크 소리에 맞춰 오로바스가 드럼을 두드렸다.
둥둥둥둥
그 소리가 마치 마왕군이 진격할 때 나오는 북소리와도 비슷했으니.
단탈리온의 기분은 평소보다도 더 고양되어 있었다.
“우리는…… 쓰리 알!”
쟈아앙!
촤앙!
두두둔둔
세 악기가 적절한 하모니를 이루어 냈다.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던 관객들은 물론이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회원들도.
모두 단탈리온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잘 듣거라. 이 몸은 RRR의 보컬, 단탈리온 데스맨이다.”
단탈리온의 소개에 이어서 멤버들이 악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진격한다. 내일은 헬스킹.”
단탈리온의 묵직한 음성이 노래의 제목을 알렸고, 오로바스의 드럼이 연주의 시작 신호를 보냈다.
휘리릭
드럼 스틱을 위에서 한 바퀴 돌린 오로바스.
스틱을 고쳐 잡자마자 곧장 심벌을 때린다.
창! 창! 창! 창!
“우린 근육 펌핑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현현한 악마.”
이어지는 단탈리온의 나레이션.
“모든 헬창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지금 이 순간을, 고통 속에!!! 기억하리이야이예아아아아아!!!!”
펜시 인텐시키온의 버프를 담은 단탈리온의 목소리가 헬스장을 한가득 채워 넣었고.
‘이, 이 밴드……!?’
분명 오늘은 이두, 팔을 격하게 조진 날이어서 근육이 파열될 것처럼 욱신거림에도 불구하고.
서갑수는 양손에 장난감 도끼를 들고 리듬에 맞춰 장난감 도끼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심장이…… 요동친다……!!’
단탈리온의 감정을 직격으로 때려 맞은 서갑수가 RRR의 음악에 이끌려 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