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동백꽃 (3)
미디어 아트가 열리고 있는 전시회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일행들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커튼을 젖혔다.
촤악!
그리고 그 안쪽에는.
“이, 이건……!”
새빨간 꽃잎이 바닥, 천장, 벽에 한가득 펼쳐져 있고, 바로 옆의 물건도 확인하기 어려운 짙은 어둠. 선홍빛 조명이 공중을 떠돌며 자리에 위치한 이로 하여금 핏빛 저주를 한껏 받들며 기운을 갈무리하는 공간.
“마계를 구현해 냈다고……!?”
그야말로 마계 그 자체.
그것도 그냥 마계가 아니라, 마력 운용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악마들이 수련을 하는 수련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 둔 공간이었다.
“단탈…… 데스맨 님! 괜찮으십니까!”
경악에 가득 찬 나를 향해 오로바스가 달려왔다. 옆으로 다가온 오로바스에게 손을 살짝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던졌다.
“오로바스여.”
“예,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여기가 무엇을 본떴는지 알겠는가.”
“이곳은…… 아니!?”
오로바스도 그제야 공간을 제대로 확인했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마력 훈련장인 마련장이지 않습니까!?”
“……그러하다.”
“이게 어떻게 된…….”
그렇다.
지금 여기는 마치.
“악마들의 수련장. 마련장과 아주 흡사하구나.”
새빨간 동백꽃은 마계에서 피어나는 마화와 비슷했으며, 그 색깔은 훈련장에 펼쳐져 있는 악마들의 선혈과 유사했다.
그런데 그러한 마력장의 실내 인테리어를.
인간들이 어떻게 알고?
악마가 인간계에서 장난을 치거나 한 적은 100년간 일절 없었다.
망할 천계의 간섭도 있었지만, 마성전쟁 이후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기존의 기록대로 인간들이 각자의 문화 콘텐츠에서 활용하는 정도였으며, 악마도 거기에 얼마나 활용되는지를 연구할 뿐.
“아니, 설마…….”
악마에 대한 기록을……?
“천계의 장난질이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천계에서 말씀이십니까!?”
오로바스가 양 주먹을 까득 움켜쥐었다.
“이 오로바스, 비록 하급 악마이기는 하지만 천계의 만행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보았습니다. 녀석들이 우리 마계를 업신여기는 순간, 이 오로바스가 반드시 처형하겠나이다!”
파이팅이 넘치는 자세를 취하며 오로바스가 한껏 열을 올렸다.
어떤 악마가 옆에 있었더라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 터.
심지어 에키드나나 만티코어 같은 군단장들이었다면 곧장 군단을 이끌고 쓸어버리겠다고 화를 낼지도 모를 일.
“…… 좀 더 조사가 필요하겠구나”
허나 이 몸은 71위 마계의 지배자 단탈리온.
겨우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갈 악마가 아니다.
“여기는 마왕성 회의실을 구현해 놓은 듯한…….”
“뭐라!?”
오로바스가 말한 공간으로 달려가니 그곳에는 시뻘건 동백꽃이 사방을 어지러이 돌아다녔고, 크기 역시 제각각이었으며, 어떤 꽃은 마치 공간에 서 있는 이를 집어삼킬 듯이 거대해지기도 했다.
거기에 중앙에 자리한 것 같은 사각형 테이블. 메모할 수 있도록 올려 둔 종이와 펜.
그야말로 마계 회의실과 흡사한 모습.
“이런 찢어 씹어 먹어도 부족한 천계 놈들아!!!!”
감히 마왕의 회의실까지 구현해?
“내 당장 천계 놈들의 만행을 마계 전체에 알리겠다! 마계에도 천계의 더러운 천칭 따위를 인간계에 만들도록 놈들을 조종하여……!!!!”
“지, 진정하십시오, 단탈리온 데스맨 님!!!”
“조용히 좀 해 제발!!”
옆에서 앤디가 달려와서는 나와 오로바스의 뒤통수를 한 대씩 때렸다.
“앤디, 자네도 이 몸을 막지 말거라. 지금 이 몸은 천계의 미친 자들과 당장이라도 회합을…….”
“그게 아니라, 저건 그냥 동백꽃이고 저기는 그냥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색칠해서 저 영상에 띄우는 거잖아! 마계니 훈련장이니 그런 거랑 상관없다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앤디의 옆에 있던 제인이 종이를 하나 들더니 나와 오로바스를 불렀다.
“이거 봐 봐. 내가 칠한 그림이거든?”
“그건 무슨 동물이냐.”
“이건 코끼리. 봐, 내가 칠한 대로 여기 나온다?”
제인이 이상한 박스 앞으로 다가가 종이를 올리자.
“오호라.”
정말로 제인이 색칠한 코끼리가 정면에 위치한 대형 스크린에 튀어나왔다.
“나도 했어. 저기 걸어가는 사슴.”
앤디의 말대로, 제인의 코끼리 옆을 지나가는 사슴이 있었다. 앤디가 색칠한 동물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마계니 천계니 그런 거랑은 상관없고, 그냥 인간의 상상력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흐음…….”
앤디와 제인의 말대로, 인간들의 상상력이 내 예상보다도 더 뛰어났을 수도 있다.
언제나 인간들의 문화 콘텐츠에는 저력이 숨겨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미디어 아트 전시장은 이상했다.
앤디와 제인의 말처럼, 그저 인간들의 상상력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가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순히 인간들의 상상력이 아니라면…….’
정말 천계의 개입이 있었던 건 아닐까.
정말로, 단순히 이 몸의 추측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무언가 이상했다.
“……쟤 또 이상한 거 생각하는 거 아냐?”
“불안한데…….”
앤디와 제인이 중얼거렸지만, 나는 생각을 이어 갔다.
어떤 부분이 이상했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들어보면 되겠구나.”
“응? 들어봐?”
“뭘? 작가의 말, 이런 거?”
앤디와 제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그러나 나와 오로바스는 한껏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불청객이 찾아왔군.”
집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려 둔 시루베로스.
그리고 시루베로스에게 걸어 둔 침입자 경보기.
방금 그 경보기가 귓가에 울려 왔다.
* * *
주천사 도미니온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골목 안쪽에서 희미한 마력 냄새를 맡은 도미니온은 천천히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여긴가?”
도미니온은 구석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봉투 앞에 멈춰 섰다.
“킁킁킁.”
몇 번 코를 대고 냄새를 확인한 도미니온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로군요!”
도미니온이 쓰레기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쓰레기들을 하나씩 꺼냈다.
“흐흐흥~ 흥~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쓰레기를 헤집던 도미니온은 어느 물건을 잡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이겁니다 이거. 썩은 악취가 나는 마력 덩어리 물건!”
사용한 지는 얼마나 되었을까.
일주일? 사흘? 이틀?
“냄새로 봤을 때는 일주일이 조금 안 된 정도군요.”
도미니온은 손에 들린 작은 양초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심지가 다 타 버린 보라색 양초를 바라보며 코를 한 번 더 내밀었다.
“킁킁, 흐음…….”
확연히 느껴지는 마력 냄새.
“지우려고 애쓴 흔적일까요?”
보라색 양초를 사용할 정도면 제법 큰 흑마법을 시전했을 것 같은데.
손에 들려 있는 양초에서는 그렇게 많은 마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보라색 양초라면 적어도 중급 흑마술을 했을 텐데……. 아니면 인간들의 단순한 장난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시전자의 마력이 부족했을지도?
중급 흑마법을 시전하다가 실패한 걸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흑마법이 시전되었다면 천계에서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메타트론 님은 천칭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으니…….”
도미니온이 양초를 꽉 움켜쥐었다. 보라색 양초가 으스러지며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어쨌든, 근원지를 찾아야겠군요.”
냄새는 코앞에서 난다.
“이 건물인가요?”
히죽 웃으며 건물로 들어간 도미니온은 어떤 방 앞에 멈춰 섰다.
덜컥.
“하긴, 문단속을 안 했을 리가 없…….”
왈왈왈왈!!!!!!
문 안쪽에서 맹렬한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미니온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왜 그러시죠? 저는 그냥 여기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왈왈왈! 컹컹! 왈왈!!!!
강아지는 더더욱 맹렬하게 짖어댔다. 도미니온이 난처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여기 사는 총각이 아니네?”
도미니온의 앞으로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네? 총각?”
“누구신지?”
집주인 아주머니가 도미니온의 위아래를 면밀히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여친인가?”
“아, 네 하하하. 연락이 안 되길래 집에 왔는데 좀, 네, 그렇네요.”
“거짓말이구만?”
아주머니가 눈매를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여기 사는 총각은 모태 솔로야. 그런데 갑자기 이런 미인 여친이 생겨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모태 솔로라고요?”
“그래요. 그러니까 주소 잘못 찾아온 거 아니라면 나가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하긴 모태 솔로라면 여친이 있을 리가 없……. 아니 근데 악마가 모태 솔로일 수 있나? 아무튼, 저기,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어떡하지?
남자를 좋아한다고 거짓말이라도 할까?
그런데 모태 솔로라며.
그러면 분명 못생겼거나 성격이 더럽거나 할 텐데…….
혹시나 악마인데 모태 솔로면 진짜 최악이겠네.
아니 아니, 쓸데없는 생각은 멈추고.
그냥 쉽고 편하게.
‘백마법이라도 써 버려?’
이제 증거도 다 찾았고,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
그런데 겨우 아주머니의 방해 하나 때문에 수색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주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도미니온이 손을 슬쩍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그거, 쓰레기 아닌가?”
“네?”
“혹시, 앞에 쓰레기봉투 찢어 놓은 사람이 아가씨야?”
도미니온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걸 눈치챈 아주머니가 도미니온의 등짝에 손바닥 스매싱을 날렸다.
짜악!!!!
“아야! 아파요, 아주머니!”
“아파? 아파아? 그래, 내가 우리 원룸 쓰레기봉투 누가 저 꼴로 만들었나 궁금해서 찾아와 봤다. 그랬는데 바로 여기 범인이 있네? 경찰에 신고해서 콩밥을 멕여야 정신 차리지? 앙?”
“겨, 경찰? 콩밥?”
아주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도미니온은 도통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흑마법 냄새가 나고, 악마가 있을지도 모르는 건물에 천사가 내려와서 도와주겠다는데 왜 이런 수모를……?
“당장 나가요, 당장!”
“아니, 저기 저는 아직 볼 일이…….”
“저 쓰레기 다 정리하고 갈 거 아니면 당장 꺼지라고! 경찰에 신고할 거야!”
“아니 아주머니 잠시만요!”
진짜 확 백마법으로……!
그렇게 다짐한 순간 도미니온의 머릿속으로 메타트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미니온, 이만 돌아오거라.
-하지만 메타트론 님! 꼬리를 잡았습니다!
-마력은 서울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네!? 하지만 분명 마력 잔향이…….
-지금은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여수에서 느껴지고 있다.
-그게 무슨……!
-서울이 잘못된 건지, 여수가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돌아오거라.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간 백마법은 금지다.
-네!? 아니 왜요!?
도미니온이 마음속으로 메타트론에게 항의를 하려던 찰나였다. 메타트론의 묵직한 음성이 도미니온의 귓구멍을 울렸다.
-갑작스레 갱생한 존재가 홍대 근처에 세 명이나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도미니온, 내가 백마법 함부로 쓰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 아하하, 그게…… 담배 냄새가 너무 역해서…….
-아무튼, 앞으로 한 달간 금지다. 알겠느냐.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도 잔소리가 남아 있나요!?
-…… 더 해 주리?
-죄송함다.
-찢어 놓은 쓰레기봉투, 다 정리하고 오거라. 지금도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메타트론의 통신은 거기서 끝이 났다.
‘벌써 인터넷에 올라왔다고!?’
어떤 멘트로 올라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니온으로서는 그닥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도미니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면서 앞에서 여전히 눈을 부라리고 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그렇게 도미니온은 방금 전, 본인이 다 찢어 놓은 쓰레기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어머 미쳤나 봐.”
“멀쩡한 아가씨가 쯧쯧.”
연희동 골목 쓰레기봉투녀라는 오명마저 갖게 되었다.
* * *
“후……. 후후후…….”
시루베로스로부터 경보기가 울렸기에 시틀라를 시켜 바깥의 목소리를 모두 들었다.
“감히…… 그렇게 나왔단 말인가…….”
단탈리온의 몸에서 서서히 마기가 끌어 올려졌다.
“다, 단탈리온 님! 마기를 거두셔야 합니다!”
“닥치거라! 방금 그 주천사가 뭐라 지껄였는지 듣지 않았느냐!”
단탈리온의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핏줄이 새겨졌다. 시틀라도 단탈리온에게 황급히 통신을 보냈다.
[다다다, 단탈리온 님! 마기가 계속 발현되면 천계에서 바로 날아올 겁니다!]
“상관없다! 감히 저, 저저, 시건방진 천사놈이 감히!!!”
주먹을 불끈 쥐고 옆에 있는 벽을 쾅 내려친 단탈리온이 소리쳤다.
“이 몸을 모태 솔로라 모욕했겠다!!!!!”
“으아아아 진정하십시오, 단탈리온 님!!!”
“아주 참신한 도발이로구나! 이 몸을 모태 솔로라고? 수천 년을 살아온 이 몸에게 감히!!!”
단탈리온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오냐. 내 그 도발에 응해 주도록 하마! 감히 하등한 주천사 따위가 마왕에게 도발을 걸어? 아주 간땡이가 부었구나!”
앤디와 제인도 잔뜩 흥분한 단탈리온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아 좀, 참아! 넌 뭐만 있으면 항상 흥분하냐!”
“마왕님, 지금 여기 전시관이야. 난동 피우면 쫓겨난다고.”
“에에잇! 이거 놓거라! 이 몸을 모욕한 이들을 그냥 두어서야 되겠느냐!”
단탈리온이 양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앤디, 제인, 오로바스 셋을 모두 뿌리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후욱…… 후욱…….”
“휴. 이제 좀 괜찮아, 마왕님?”
붙잡고 있던 단탈리온의 팔을 놓으며 제인이 물었다.
“그래. 조금 머리가 식었도다.”
“굿. 잘했어.”
“그리고 이번 공연 주제도 정했노라.”
그 말에 세 멤버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진짜!?”
“뭔데, 뭔데!”
“역시 단탈리온 님!”
단탈리온은 셋의 반응을 들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주제는 불가연성 쓰레기다.”
“부, 불가연성……?”
“그리고 제목은 ‘천사인 척하지 마’다.”
이번 노래로 천사들을 향해 도발을 건다.
“이 몸을 모태 솔로라 모욕한 천사 년놈새끼들을 향한 도발곡으로 만들어 주겠다.”
흐흐흐흐.
악마 같은, 아니 악마 그 자체의 웃음을 짓는 단탈리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