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라이징 밴드 시작
어두운 탑 위에서 한 남성이 거대한 검을 등에 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소나무가 충절을 지키기라도 하듯, 무언가를 확인하고 지켜내기 위해 눈을 감고 기감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그런 남성의 옆에서 그의 시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엘 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엘의 시종이 모든 기를 끌어올려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는 자신의 마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바엘은 감고 있던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말했다.
“무엇이 말인가.”
“그……. 70위 마계를 견제하는 건 필요하지만, 굳이 마왕님께서 직접 하실 필요가 있으신가 해서…….”
시종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사건에 마왕이 직접 나서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마왕 단탈리온이 바엘 님의 친우인 것은 알고 있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바엘 님은 마왕이지 않은가.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마왕을 마음대로 부리다니.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점 때문에 바엘 님께서 이렇게 마왕 단탈리온을…….”
“단탈리온 ‘님’이라 해야 한다.”
바엘이 발을 한번 크게 구르자 탑 바닥이 아래로 살짝 꺼졌다.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납작 엎드렸다.
“죄죄, 죄송합니다! 단탈리온 님과 바엘 님이……!!”
“흥. 시밀푼이여. 자네는 알고 있는가.”
바엘의 말에 그의 시종, 시밀푼이 고개를 바닥에 댄 채로 고개를 세차게 움직였다.
“자, 자자, 잘 모릅니다!”
“내 자비를 베풀어 자네에게 알려 주도록 하지. 듣거라.”
바엘은 먼 옛날을 떠올린다며 멀리 있는 산을 응시했다.
“단탈리온이 없었다면, 5천 년 전, 마성전쟁에서 우리 1위 마계는 절반이 날아갔을 거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시밀푼이 말도 안 된다면서 고개를 들고는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위로만 따지면 바엘 님이 마계 1위이시거늘! 단탈리온 님은 그저 71위에 불과한…….”
“그 입 다물거라.”
“헙!!”
시밀푼의 입 가까이 등에 멘 대검을 들이민 바엘이 한숨을 쉬었다.
“시밀푼. 자네 올해로 나이가 몇이지?”
“그…… 올해로 5105살입니다.”
“어리군.”
바엘이 피식 웃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마성전쟁에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소악마로구나.”
그런 애기였던 녀석이 지금은 내 옆에서 시종을 하고 있다니.
바엘이 웃으면서 시밀푼에게 말했다.
“그때 마성전쟁에서 단탈리온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우리 1위 마계는 물론이고, 아몬이 이끄는 7위 마계, 바르바토스의 8위 마계를 지켜 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소인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훗 그래. 최상위 10위 마계. 이들이 뚫리면 마계 전력들은 천사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때 단탈리온이 취한 방법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지.”
시밀푼의 침이 꼴딱 넘어갔다.
“녀석은 전투력은 낮지만 영민한 지혜를 활용해 1위부터 8위까지의 마계를 지켜 냈다. 그 덕분에 마계는 천계와 무승부를 낼 수 있었지.”
“대, 대체 어떻게!?”
“시밀푼이여.”
바엘이 시밀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전쟁은 무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걸 단탈리온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면 지금도 전율이 인다면서 바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악마의 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 그때 솔직히 우리는, 단탈리온의 전략과 성과를 보면서 ‘기적’이라 불렀다.”
“기, 기적이라면 천사들의 용어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나 당시 단탈리온은 정말이지, 기적을 일으키는 악마였다.”
바엘이 참으로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몸 역시 마계에서 소멸했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기에 단탈리온의 부탁이라면.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바엘, 아몬, 바르바토스는 특히나.
“때문에 녀석의 부탁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단탈리온이 요청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악마로서의 긍지를 생각하면서 세 마왕들이 맹세를 맺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맹세는, 세 마왕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이 몸은, 그 맹약에 따라. 친우, 단탈리온의 부탁이라면.”
바엘은 마성전쟁 때의 단탈리온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언제든 천계의 중심부에도 서슴지 않고 달려가 녀석을 도와줄 것이다.”
이렇게까지 감격에 젖어 계시는 마왕님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시밀푼은 처음 보는 바엘의 모습에 다시 한번 납작 엎드렸다.
“앞으로! 단탈리온 님께도 예를 갖추겠나이다!!!”
“바로 그거다, 시밀푼. 자네도 단탈리온을 진심으로 존경하도록 하여라.”
그렇게 말한 바엘이 하나 깜빡했다며 말했다.
“아, 나보다는 덜 존경하고. 크하하하!”
“하, 하하, 하하하하!! 네! 물론입니다!!”
바엘의 시답잖은 농담을 들은 시밀푼이 어색하게 웃었고.
탑 위에서 70위 마계가 헛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바엘의 눈은 끊임없이 빛나고 있었다.
* * *
“흠…….”
단탈리온은 귓구멍에 손가락을 살짝 넣었다 빼더니 말했다.
“시틀라여.”
[예, 단탈리온 님.]
“마계에서 이 몸을 찾는 일은 따로 없었는가.”
[예. 70위 마계 세이르 님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한가.”
바엘로부터 따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세이르가 따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일정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을 터.
“주변을 계속 감시하거라. 언제 천계에서 우리를 눈치챌지 모르는 일.”
[존명! 위대하신 단탈리온 님의 이름으로!]
단탈리온은 앤디와 제인, 오로바스와 시루베로스까지 모두를 데리고서 현재 그들이 서 있는 장소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꽤나 넓은 원형의 무대.
그곳에는 악기들이 그때그때 세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로구나.”
단탈리온이 주변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난잡한 움직임이로군. 천사가 습격하면 뼈도 추리기 어렵겠어.”
“……여기서는 천사가 습격하거나 안 그래.”
“그리고 천사면 보통 축복을 내려 주거나 하는 거 아냐? 습격은 악마가 하는 거고?”
“그 말도 틀리지는 않구나.”
단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와 제인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무튼, 곧 다른 팀들 경연 시작되니까 뒤로 와.”
앤디가 단탈리온의 어깨를 잡고 뒤로 끌었다. 그러나 단탈리온은 앤디의 팔을 덥석 잡더니 말했다.
“아니.”
“왜?”
“이 몸은 이곳에서 듣겠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경연자들의 연주와 노래를 듣겠다는 선언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패니라.”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사전에 스탭들로부터도 무대로만 난입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앤디와 제인, 오로바스 셋도 모두 단탈리온의 옆에서 같이 다른 팀들의 노래를 듣기로 했다.
“이 몸 하나면 되거늘, 어찌하여 모두 왔는가.”
“가만 놔두면 사고 칠 거잖아.”
“흥. 앤디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도다.”
그러나 12군단장과 13군단장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단탈리온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었다.
“좋다. 그럼 하나하나 지켜보도록 하마.”
단탈리온은 팔짱을 끼고는 손가락에 끼워 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여차하면 흑마법으로 청력 강화를 걸어 둘 수도 있지만.
‘지금 바로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적절한 대처를 할 줄 알아야 마왕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을 터.
단탈리온이 굳센 결의를 다지며 무대가 있는 방향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 * *
“나를 돌아봐 준 그대를~~~!!”
따다다당, 쟈쟈쟝.
주어진 대기 번호에 따라 순서대로 진행되는 공연. 예선에 통과한 참가자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무대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둥둥 타탁!
“내가 걸어스어~!”
띡, 삐이-
“헉!”
“망했다……. 삑사리가…….”
좌절하는 밴드 인원들을 보면서 심사 위원 중 한 명이 말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그는 마이크를 내려놓고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를 내려다봤다.
‘하……. 본선 진출자들 맞아?’
심사 위원 중 한 명인 장도민이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PD님이 너무 컨셉에만 진심인 거 아니에요?”
대한민국 대표 국민 밴드인 ‘장도민 밴드’의 보컬리스트 장도민. 그가 방금 전 보컬리스트의 자질을 지적하면서 말했다.
“아니 무슨 경연 나오는 인간들이 목 관리도 안 해? 연습 안 하나?”
“에이 도민 씨, 너무 그러지 마세요. 긴장했을 수도 있잖아요.”
인디 밴드 중에서 인기 순위 1위인 ‘코리아텐’의 보컬리스트, 하현주가 밝게 웃었다.
“저도 처음에 경연 나갈 때는 엄청 긴장했는걸요. 다른 멤버들도 실수할 뻔하고 그랬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삑사리가 뭡니까 삑사리가.”
“도민 씨 그만.”
장도민의 옆에 앉아 있던 윤상하가 심각한 듯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 돼.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상하 선배, 그냥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요 아까워서.”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베이시스트이자 작곡가인 윤상하. 그는 장도민과 대학 선후배 관계여서 남들보다 더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아직 4분의 1만 봤어. 화내는 건 절반을 넘겼는데도 쓸 만한 재목이 없을 때 하는 거야.”
“후……. 그래요, 선배가 저보다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는 많이 해 보셨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장도민이 투덜거리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옆에 있던 하현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윤상하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해요, 선배님.”
“감사는 무슨. 상하 씨도 잘 봐.”
“네?”
“곧 놀랄 만한 애들이 나올 거 같거든.”
윤상하가 실눈을 뜨고는 무대를 세팅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기타 앰프를 연결하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는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고 있는 여성.
베이스를 튜닝하면서 불안한 듯 무대를 두리번거리고는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강단이 느껴지는 여성.
마이크를 잡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마시며 목을 가다듬고 있는 여성.
드럼 스틱을 매만지다가 스네어를 괜히 한 번 쳐 보고 있는 여성.
“……혹시 여성 밴드라서 그러시는 건가요?”
“쓰읍. 날 뭘로 보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하현주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윤상하를 노려봤다. 그러자 윤상하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
“우선 저 사람들 분장을 봐.”
“분장?”
세팅을 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의 피부색이 새하얀 모습이었다. 동양인이 아니라 백인 여성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의 얼굴이었다.
“거기에 머리 색깔.”
헤어 컬러는 또 어떤가. 금발은 물론이고 녹색, 붉은 색 등의 컬러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아우라.”
윤상하의 마지막 말에 장도민과 하현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
“…….”
“…….”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자 윤상하가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진짜라니까? 너희는 못 느끼냐?”
“무슨 아우라를 느껴요. 스타X즈 제다X라도 되세요?”
“그런 게 아니라. 에휴 아니다. 공연 들어보면 알 거다.”
윤상하가 한숨을 쉬며 펜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세팅을 마친 여성 네 명으로 이루어진 밴드들이 앞에 섰다.
그중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하늘하늘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마이크를 들었다.
“저, 저저, 저희는……!”
여성이 멤버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처, 천사들을 모토로 한 밴드! 탑엔젤스입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고개를 잔뜩 숙인 채 중급 천사, 주천사 도미니온이 소리쳤고.
그 뒤에서 다른 천사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었다.
“도미니온 님, 지금 들어갈까요?”
“그, 그래!”
탁 탁 탁 탁
드러머의 스틱 소리에 맞춰 기타리스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쟈아앙!
두둔.
이어지는 베이스 소리, 그리고 부드러운 드럼 소리.
‘탑엔젤스’ 밴드가 선택한 노래를 잔잔한 재즈 밴드의 노래인 ‘Sweet Switch’ 였다.
도미니온은 첫 소절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위민 더러빙 멘뜨몽…….”
그러나 도미니온은 주문을 모두 외우지 못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백마법의 신성력이 끌어 올려지는 순간.
쿠당탕!!!!
“우왓!”
“뭐야!?”
“누구야 저 사람!”
무대 위로 난입한 남성이 있었다.
큰 키에 꼿꼿한 허리.
손가락과 목에는 온갖 악세사리들이 달려 있고, 귀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는, 도미니온이 얼마 전, 직접 얼굴을 마주했던 단탈리온 데스맨이었다.
“자네.”
“……저, 저요?”
‘설마 백마법을 눈치챈 건가!?’
아무리 용사의 후계자라 그래도 그렇지, 거리가 있는데!?
아니면 다른 능력이 있는 건가?
단탈리온의 능력을 추리해 보는 도미니온의 앞으로 단탈리온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도미니온이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그러세요!?”
“어째서 그걸 알고 있는 거냐.”
“네, 네!?”
“위민 더러빙 멘뜨몽 디엔유.”
단탈리온의 주문을 들은 도미니온의 어깨가 떨려 왔다.
“그 주문은 한정적인 이들만 알고 있을 터.”
단탈리온이 손바닥을 들어 마력을 끌어올렸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심사 위원들이 모두 경비를 부르라고 소리를 지르고, 앤디와 제인, 오로바스가 달려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단탈리온이 도미니온을 향해 이빨을 으르렁거렸다.
“주문의 창시자를 모욕한 죗값을 치르게 할지니.”
단탈리온의 손바닥에 인간 성인 남성 하나쯤은 쉽게 날려 버릴 수 있는 마력이 모여졌고.
도미니온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