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호들갑
“허억……. 허억…….”
자리에 앉아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던 악마 하나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사옵니다…….”
하급 악마 행정병이 건넨 자료를 슥 훑어본 시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였다. 이만 들어가 보거라.”
“조…… 존명……!!”
라이징 밴드 본선 1라운드를 위해 모든 참가자의 역량을 분석하고 있던 71위 마계 군단장들과 행정병들.
방금 나간 악마를 마지막으로, 모든 자료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괜찮네.”
옆에서 같이 최종 정리를 하고 있던 에키드나가 말했다.
“확실히 분석한 보람이 있어. 단탈리온 님도 자료 분석 덕을 많이 보셨다고도 말씀해 주셨고.”
실제로 단탈리온은 마계의 군단장들과 행정병들이 분석한 정보들을 토대로 인간들의 정신을 쏙 빼놓기 적절한 연출을 고안해 냈다.
그 결과 자신의 심장 부근을 찔러 버리는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연출은 연출.
그 연출 덕분에 RRR 밴드와 단탈리온 데스맨이라는 이름은 참가자들, 심사 위원들은 물론이며 스탭진들에게까지 각인되었다.
“단탈리온 님께서 우리의 노력을 저주해 주셨다……!”
시틀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로 마무리된 이 정보들. 한 권의 마도서로 만들지 않으면 제때 필요한 정보를 꺼내지 못하실 거야.”
“마력은?”
“충분해. 단탈리온 님 덕분에 71위 마계의 마력이 조금씩은 회복되고 있거든.”
주머니에 들어 있던 71위 마계 통장을 꺼낸 시틀라가 감격에 가득 차서는 말했다.
“역시……. 단탈리온 님이시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 단탈리온 님이 누구신데!”
에키드나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콧잔등을 슥 훔쳤다.
“가자.”
에키드나가 서류 더미를 양손에 가득 들었다.
“오늘은 마력으로 안 든다?”
“그랬다가 또 마력 낭비한다고 잔소리 들으라고? 됐네요!”
마력이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은 더 큰 회복을 위해 투자를 해야 할 때.
에키드나도 이제 그런 점들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시틀라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면서 서류를 하나씩 더 집어 들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까짓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무리하지 말고 하나만 들어. 천천히 옮겨도 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틀라는 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솔선수범하는 에키드나의 모습이 대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과 같이 단순 힘쓰는 일이라면 하급 부하 악마들을 시켜도 되는 일이거늘.
혹시나 부하들이 실수로 서류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에키드나의 심성이 있었기에.
시틀라는 아날로그식으로 서류를 옮기고 있는 에키드나의 등을 빤히 바라봤다.
“……아얏!”
“저 멍청이가!”
다만, 군단장이 직접 옮긴다 해도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던 에키드나가 결국 서류 뭉치 하나를 바닥에 쏟아 버렸다.
촤아아악!
“꺄악! 난 몰라!”
“어휴 하나만 들라고 했지 내가!”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하나씩 주우면서 시틀라가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왜 얘한테 이걸 맡겨 가지고. 그냥 만티코어한테 부탁하면 마물들 시켜서 쉽게 옮기기라도 했을 텐데 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얘를 믿어 가지고 이런 낭패를…….”
“시틀라. 다 들리거든?”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들으라고!”
“미안하다니까!”
옥신각신하는 두 악마의 모습을 보며 부하 악마들이 소곤거렸다.
“역시…….”
“저분들의 관계도…….”
그런 부하들의 중얼거림은 듣지 못한 채, 시틀라와 에키드나는 여전히 입씨름을 계속해 나갔다.
“잠시 괜찮은가.”
그때였다.
그 공간에 있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마기를 뿜어내는 이가 시틀라를 내려다보았다.
큰 키에 또렷한 뿔, 뾰족한 귀에 울끈불끈 움직이는 실전용 근육.
거기에 땅에 푹 박힌 거대한 검.
“바, 바엘님!?”
시틀라와 에키드나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바엘 님을 뵙습니다!”
“바엘 님을 뵙습니다!”
“됐다 됐어. 내가 너희들 마계 지배자도 아니고.”
바엘이 대검에 손을 툭 올린 채 가볍게 물었다.
“시틀라, 에키드나. 둘 모두 잘 지냈나?”
“예! 바엘 님 덕분에!”
“예! 바엘 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둘의 대답을 들은 바엘이 히죽 웃었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시틀라가 조심스럽게 바엘의 용건을 물었다. 바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손가락 위로 작은 영상이 흘러나왔다.
[삼촌, 저 시밀푼입니다.]
“오, 시밀푼! 잘 지냈냐!”
[네 덕분에. 그것보다도, 지금 71위 마계로 서류를 하나 전송하려 합니다.]
“그런 거라면 네가 직접 와도 되는데?”
[그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시밀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엘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영상의 앞으로 양피지 한 장이 프린터기에서 인쇄되듯이 스으윽 흘러나왔다.
“이…… 이건!?”
[……그래서 저는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양피지를 집어 들고 내용을 확인한 시틀라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럼 시밀푼, 넌 거기서 동태를 지켜봐야 할 거고…….”
시틀라의 시선이 이번에는 바엘로 향했다.
“바, 바엘 님, 자세한 설명을 요청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걸 위해서 이 몸이 직접 여기까지 왔느니라.”
바엘이 대검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게다가 이건, 둘에게만 설명해 주기보다는 당사자에게 직접 알려 주어야만 하겠지.”
바엘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러니 당장 친우 단탈리온에게 통신을 취해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바엘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 친우 단탈리온이, 천계의 더러운 전략에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양피지로 내용을 확인한 시틀라는 물론이고.
단탈리온을 존경해마다 않는 에키드나까지.
바엘의 발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 * *
라이징 밴드 예고편이 두 가지가 모두 나온 뒤로, 나는 화제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호들갑들을 떨고 있군.”
허나, 이 모두 계획하고 행동한 것.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전에 시틀라에게 의견을 듣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악마의 편집이기에 여러 악마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시틀라를 비롯해 71위 마계의 군단장들은 라이징 밴드 참가자들의 정보들을 수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렇기에 나도 굳이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부하 직원들을 격려하는 리더로서의 태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
나는 라이징 밴드 예고편 너튜브 영상에 올라온 댓글들을 확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와 미친 거 아니냐 저 밴드 보컬ㅋㅋㅋ
-쟤네 그거 아님? 퍽지창! 퍽앤롤!
-전국 노래 장기회인가 그때부터 제정신 아니라고 생각은 했는데 결국ㅋㅋㅋ
-단탈리온 데스맨이라고? 이름이 길어지지 않았냐?
-악마 컨셉 살리느라 더 늘린 듯 ㅇㅇ
-악마가 천사 밴드에게 도발ㅋㅋㅋㅋㅋㅋ
-이게 바로 고백해서 혼내 주자 이거냐곸ㅋㅋㅋ
-근데 잘생기긴 했다……. 님 같은 오징어가 할 소리는 아닌 듯
이런 일반적인 반응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을 가장 빛나게 만든 댓글은 무엇보다도.
-근데 솔직히 얘네 노래 잘하지 않냐
-음악 좋음 ㅇㅇ 너튜브 들어보면 각 나옴
-나 메탈 좋아했었네……?
바로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치 덕분에.
예고편으로 RRR을 접하게 된 사람들에게도 RRR의 음악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후후후…… 후후후후후후…….”
그야말로 절로 웃음이 나오는 모습이 아니던가!
이것이야말로 마력 한 톨 쓰지 않고 명성을 높이는데 최적의 방법!
이런 흐름이라면 조만간 71위 마계의 마력이 대폭 상승하는 것도 꿈이 아닐…….
[단탈리온 님! 계십니까!]
“……시끄럽구나, 시틀라여. 무슨 일이냐.”
갑작스레 귓가에 울린 시틀라의 통신에 미간을 좁혔다. 시틀라가 고개를 조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죄, 죄송합니다!!!!]
“되었다. 용건을 말하거라.”
[그건 내가 설명하지.]
이 목소리는……?
“바엘? 바엘인가?”
[그렇다네. 내 오랜 친우 단탈리온이여.]
바엘 이 녀석에게는 70위 마계의 마왕, 세이르가 헛짓거리는 하지 않는지 감시를 해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왜 71위 마계에 와 있는 거지?
“설마 바엘, 세이르가 흉계를 꾸미는 건…….”
[다행히 그건 아닐세. 다만, 세이르와 연관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겠군.]
바엘이 침음하며 말을 아꼈다.
항시 공격성이 강하고 호전적인 성격의 바엘이 이렇게나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는 건.
어지간히 화가 나는 일이 아니고서야 없는 일.
“바엘, 진정하고 이야기를 해 보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역시 자네에게는 숨길 수 없겠군. 그곳까지도 들리는가.]
바엘이 대검을 바닥에 꽂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몸의 분노에 가득 찬 심장 고동 소리가 말일세.]
“……그래.”
여기서 안 들린다고 하면 또 이게 왜 안 들리냐, 들리게 만들어 주겠다며 난리 법석을 피울 게 뻔했다.
나는 적당히 바엘에게 맞장구를 쳐주면서 물었다.
“그래서, 세이르와 무슨 일이 있었지?”
[그렇지, 참. 세이르가 나에게 말했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라.]
“음?”
[하도 옆에서 눈을 부라리며 감시하고 있으니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더군. 크하하하!]
하긴, 바엘 같은 인상 더러운 마왕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마왕성을 감시하고 있으면 어느 마왕이든 불편할 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협상을 하자고 한 건가?”
[이해가 빨라서 좋군! 역시 단탈리온!]
“설명이나 더 해 보게.”
[커흠, 그렇군. 아무튼, 세이르가 말하길, 지금 천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더군.]
세이르가?
인간에게 빙의한 사실을 나에게 들켜서 한껏 혼쭐이 난 그 자식이 알아냈다고?
[지금 천계에서는 악마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천사들을 인간계로 내려보냈다고 했네.]
“그거라면 이미 파악하고 있네만.”
[그래. 자네의 보고 덕분에 우리도 알고 있었지. 여기서 세이르는 천사들의 계략을 알려 주었네.]
세이르가 알려 준 계략.
그건 바로.
[천사들이…… 라이징 밴드에 참가한 자네에게…… 미인계로 접촉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야!!]
“……미인계?”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녀석들이 왜 굳이 그런 피곤한 짓거리를?
게다가 악마라면 천사의 꾀임 정도에 넘어갈 일은 거의 없을 터.
게다가 이 몸처럼 최상위 악마, 마왕이라면 더더욱.
혹여나 이 몸을 유혹할 정도의 천사가 되려면 상급 천사도 아니고 최상급 천사가 내려와야 하거늘.
“정말로 미인계라 하였는가?”
[그래. 세이르의 말로는 이미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동영상을 만들어 여기저기 퍼트리고 있다고 하더군.]
“동영상?”
그 말과 동시에 바엘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말했다.
[라이징 밴드 예고편.]
“……!!”
설마 그 미인계가…….
[인간들이 천사들의 명령에 의해 자네를 호색한으로 만들어 냈고, 그걸 계기로 삼아 자네를 본격적으로 유혹하려 들 거라는 말일세!]
“……그렇군.”
아니, 그거 내가 지시한 거다. 바엘.
허나, 지금 그렇게 말했다가는 바엘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내 체면도 말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다들 호들갑 떨면서 통신을 걸어 주었는데.
내가 여기에서 맥 빠지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옷깃을 세우고는 말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느니.”
[뭣……!]
“이 몸의 마음은 이미 마성전쟁 이후로 허공에 흩날린 것이나 다름없다네.”
그렇다.
설령 어떤 미인이 오더라도.
그 어떤 최고의 이성이 내 앞에 설지라도.
그게 천계의 히든 카드라 하여도.
“그러니 이 몸의 마음이 흔들릴 일은 없느니.”
[단탈리온 자네…….]
바엘이 조용히 침음했다.
“그러니 걱정 말게. 게다가 좋은 기회가 아닌가.”
나는 나의 진짜 계획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들을 내 옆에 두어야만, 오히려 의심을 줄일 수 있는 법이니.”
[다, 단탈리온 자네 설마……!]
바엘의 대검이 땅에 쿵!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를 믿지 못한 나를 용서해 주게 친우여!]
“……그리하도록 하지.”
어쨌든 바엘 덕분에 70위 마계의 견제는 당분간 조용하겠군.
그럼 남은 건…….
“시틀라여.”
[예, 단탈리온 님!]
“마도서는 준비되었느냐.”
라이징 밴드의 참가자들의 정보가 적힌 마도서.
71위 마계의 군단장들과 행정병들이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만든, 최신 정보의 집약체.
‘괜히 정보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게 아니란 말이다.’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친 나는 허공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마치 시틀라와 바엘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그 마도서로, 남은 라이징 밴드 도전자들을 모조리 천국으로 떨어뜨려 주겠다.”
본선 1라운드 방송까지 앞으로 이틀.
그때까지 참가자들의 특징을 공부해 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