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마도서
단탈리온과 통신을 끝낸 시틀라와 에키드나는 분주히 공방으로 달려갔다.
“빨리 마도서를 만들어야 해!”
휘익-! 휘익-!
시틀라와 에키드나가 마왕성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분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단탈리온 님이 천사를 곁에 두려고 하실 줄은…….”
“그게 바로 전술이라는 거야 에키드나.”
시틀라가 공방에서 라이징 밴드 참가자들의 정보가 적힌 서류들을 하나씩 쌓으며 말했다.
“단탈리온 님이 아무 계획 없이 막무가내로 내려가신 게 아니다, 이거지.”
“그걸 바엘 님은 곧바로 파악하시고…….”
역시, 마성전쟁을 함께 헤쳐 나간 전우는 다르단 말인가.
에키드나는 새삼 군단장과 마왕의 격차를 느끼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더…… 노력해야겠어.”
에키드나의 어깨에 무심하게 손을 툭 올린 시틀라가 말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러니까 이거, 마도서부터 빨리 만들자.”
시틀라의 말에 에키드나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래……. 아직까지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걸 반성하면서……!”
방금 전 통신에서 단탈리온 님의 목소리에 담긴 실망스러움이.
지금 이 둘의 가슴에 불을 지펴 주었다.
-……그렇군. 아직 미완이란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단탈리온 님!
-아니,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신경 쓰지 말거라.
우리들의 역량이 고작 거기까지였을 거라는 단탈리온 님의 실망감.
“단탈리온 님께 도움도 안 되는 부관과 군단장이라니, 그럴 수는 없지!”
자신들을 믿고 많은 업무를 맡겨 주시는 마왕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다!
더한 실망은 이제 자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시틀라와 에키드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엘 님은…….”
“우리가 감히 예측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에키드나.”
방금 전, 단탈리온과 통신을 하던 바엘은 통신을 끊자마자 바닥에 꽂아둔 대검을 뽑아 들었다.
-서둘러 마도서를 만들거라!
바엘은 친우 단탈리온과 통신한 후, 다시 70위 마계를 감시하기 위해 돌아갔다.
지금 시밀푼이 70위 마계가 혹시 인간계로 첩자를 보내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이 몸은 시밀푼을 보호하고 곧장 1위 마계에서도 단탈리온을 위한 장비를 만들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러하다. 내 친우가 저리 고생하고 있는데! 이 몸이 가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 말대로.
바엘은 단탈리온의 희생을 숭고히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바엘은 단탈리온이 인간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고자 했다.
“결국 마도서도 악세사리에 불과하니까.”
지금까지 단탈리온이 소지하고 있는 장비들은 모두 장신구.
게다가 그 효과들은 모조리 마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 말인 즉슨.
지금 단탈리온은 무기 하나 없이 인간계에 내려간 것이었다.
“아마 바엘 님은 무기를 만들어 주실 거야.”
“역시…….”
그게 어떤 무기일지.
두 악마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시밀푼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식한 대검을 들고 다니는 바엘이기에, 혹시나 눈에 띄는 무기를 만들면 아니 되는 법.
시틀라는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시밀푼에게 간단한 편지를 보내 두었다.
70위 마계에서 고생하고 있는 조카를 걱정하는 문구와 함께.
* * *
단탈리온이 마계와 통신을 하고, 천사와의 접점을 우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징 밴드 방송이 전국에 흘러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크하하하하하!!! 내가 말했지! 우리 예고편 기깔나게 뽑힌 덕을 제대로 볼 거라고 말이야!!!!”
분명 이상한 내용들이 많았음에도.
참가자들끼리 연애를 한다느니, 서로 막말하면서 신경전을 벌인다느니 하는 예고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징 밴드는 그 위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동 시간대 시청률 3위를 기록했다.
기보성이 허공을 향해 연신 주먹질을 해 댔다.
“예고편 기가 막히게 나오니까 본방에도 시청자들이 몰려들잖아! 내 전략은 틀리지 않았어!!!”
“에효……. 알았어요, PD님. 잘하신 거 알겠으니까 진정하시고…….”
물론 칭찬만 있었던 건 아니다.
방송을 본 사람들이 예고편만큼이나 긴장감 넘치는 경쟁을 보지는 못했다는 피드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일단 시청률이 높게 나왔다.
기보성으로서는 이거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낸 것이었다.
‘잘만 하면 날아오를 기회다!’
기보성이 주먹을 꽉 쥐며 스탭진들을 향해 외쳤다.
“1화 방송이 끝났으니 이제 2화도 편집 마무리해야지!”
라이징 밴드는 한 번 촬영을 하면 밴드 오디션이라는 특징 답게 촬영 시간이 꽤나 많이 소모되었다.
밴드다보니 한 팀을 보더라도 참가자가 적게는 2명, 많게는 6명이 있었고, 개별 인터뷰도 다 받는 데다가 악기 세팅도 그때그때 다 달랐다.
때문에 본선 1라운드 촬영만 15시간을 넘게 했다.
그 시간들을 꼴랑 1개 화 만들고 끝내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보통 한 번 촬영하면 적게는 2편, 많게는 3편까지도 편집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빨리 본선 2라운드 촬영도 들어가야 해! 2라운드 진출자들에게 연락을 해서…….”
“저……. 그게 말이죠 PD님.”
조연출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뭔데?”
“1화에서 쓸 만한 밴드들을 다 보여줘서 2화에서는 보여 줄 만한 밴드가 없어요.”
멈칫.
기보성의 행동이 우뚝 멈춰 섰다.
“뭐라고……?”
“탑엔젤스, RRR, 열반 밴드. 전부 1화에서 다 보여 줘서 2화에는 어중간한 밴드들밖에는 없어서…….”
“끄응…….”
기보성이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 앉았다.
사실상 라이징 밴드의 히든 카드를 1화에서 다 보여 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게 제가 나눠서 내놓자고 했잖아요!”
“그랬으면 이게 사람들한테 먹혔겠냐고! 스토리텔링이 세 밴드가 다 엮여 있잖아!”
“그럼 2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아 몰라! 너희도 생각해 봐!”
그렇게 서로 갑론을박을 펼치기를 한참.
기보성이 씩씩대며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일단 진정을 해 보자. 남은 참가자들 중에 누가 있지?”
“음…… 1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참가자는…….”
밴드 목록을 쭉 읊어 가던 조연출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기보성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네?”
“방금 거기 어디라고? 홀리…….”
“아 여기…….”
조연출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홀리오라방돌이라고…….”
“그거다.”
기보성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RRR에게 연락해.”
“네?”
“2화 내용 채우기 위한 추가 촬영이야.”
“출연료는요?”
“지급해 줄 테니까 오라고 해! 아니면 우리가 찾아가도 좋고!”
“어떻게 하시려고요?”
“후후후…….”
기보성이 악마처럼 입꼬리를 사악 올렸다.
“교회 오빠들이 모여서 만든 밴드인 홀리오라방돌이. 과연 악마 컨셉의 밴드들은 이들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할까.”
“아……!”
기보성이 생각해 낸 추가 촬영 내용.
“다른 참가자들의 영상을 보고 이들의 실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참가자들 자체 평가 시간을 가져 보는 거야.”
그렇게 하면 참가자들의 다른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기에 어그로를 끌 수 있는 멘트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기보성의 의도를 파악한 조연출이 한숨을 쉬었다.
“또 그렇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잖아! 본선 2라운드부터는 달리 하자고. 이번 한 번만이야!”
* * *
-미친 거 아니냐 진짜
-이 정도면 PD가 시청자 기만한거다
-이렇게 기만할 거면 예고편 만들지 마라
-악마의 편집이니 뭐니 참나. 기보성은 반성해라
악마의 편집 예고편 덕분에, 사람들은 본방에서도 악마의 편집을 기대했다.
그러나 단탈리온이 건드린 부분은 예고편까지만이었다.
실제 본방에서는 천사 밴드, 탑엔젤스와의 러브 라인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버전1 예고편의 모습처럼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도발을 거는 장면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악마와 천사의 러브 라인을 기대하고 있던 시청자들에게는 돌을 맞았지만.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러브 라인은 무슨. RRR 흥해라!
-탑엔젤스 팬카페 없습니까? 아이돌급이던데 다들
-이참에 만들죠
-RRR 밴드 너튜브랑 인별그램 주소는 여기요!
밴드 오디션 자체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참가자들의 실력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대결 구도를 취하는 것도 물론 프로그램의 재미를 추가해 주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
-RRR 노래 좋음 ㅇㅇ
-메탈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추천!
-홍대 근처 헬스장이랑 피시방에 RRR보컬이 다닌다는데 진짜임?
-나 어제 봤음 ㅋㅋㅋㅋ 보컬 평소에도 컨셉 유지한다고 말투 개웃김ㅋㅋㅋㅋ
-말투 왜요?
-그때도 트레이너한테 아니 되느니, 지나친 기대로다, 바벨이 이 몸을 거역하는구나, 이ㅈㄹㅋㅋㅋㅋ
-진짜 제정신 아니네 거깈ㅋㅋㅋ
-컨셉질로 2라 진출하는 거 아니냐고~
네티즌들이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 보고 있던 앤디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헬스장이랑 피시방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그 앞에 앉아 있는 단탈리온이 고고한 자세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흥분하지 말거라, 앤디여.”
“아니 이제는 우리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잖아! 흥분 안 하게 생겼냐고!”
앤디의 말대로였다.
지금 RRR의 이미지는 컨셉에 진심인 메탈 밴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그 덕분에 RRR의 음악이 외부로 더 알려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우선은 이걸로 충분하지 않겠나.”
“이미지 이렇게 가도 된다고?”
그 말에 단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자들의 정보를 분석해 보면 결과적으로 우리를 제외한 참가자 중, 실력이 괜찮은 밴드는 많지 않다.”
“그걸 어떻게 알아?”
“71위 마계의 주력 인원들이 한데 모여 참가자들의 노래, 영상, 연주, 자작곡, 편곡 스타일, 공연 습관, 대기실 현장 등을 모두 분석해 두었기 때문이다.”
단탈리온이 오른손을 매만졌다.
그러자.
촤악-!
“우왓!”
단탈리온의 손이 검붉은 안개로 감싸졌다. 안개가 살짝 걷히자 그 위로 두터운 책이 한 권 턱, 하고 올려졌다.
“바로 오늘 아침 완성된 마도서니라.”
시틀라와 에키드나가 밤낮없이 일한 결과 완성된 마도서.
‘그렇게 서두르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둘 다 기존의 정보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터.
분명 마도서로 만들 만한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었다.
때문에 시간이 딱 거기까지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좀 쉬라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당장 제작에 착수하겠나이다!!!!
시틀라가 침을 튀길 듯 소리를 지르니, 단탈리온으로서도 반대하기가 애매했다.
그리고 그 결과, 바로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된 마도서.
마계에서 초기에 만들어진 마도서는, 그 두께만 해도 어지간한 백과사전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단탈리온의 손에 들린 마도서의 크기는 태블릿PC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마력으로 크기를 축소해 둔 덕분이었다.
“이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군.”
확실히.
이제는 마력이 제법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잔여마력량: 120,444
어느새 마력은 12만이 넘어갔다.
어지간한 중급 흑마법도 가능해지고, 마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된 것이다.
‘여차하면 천계의 시선을 피하는 결계를 더 넓게 확장할 수도 있겠군.’
그렇게 히죽 웃고 있는 사이.
우웅-
“음?”
피시방 사장인 이연주 누나였다.
“무슨 일인가 누나.”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어색하게 들리네. 암튼, 우리도 라이징 밴드 본방 봤어!]
과연.
이연주도 라이징 밴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가.
단탈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옳은 시청이로다.”
[그치? 그런데 너, 헬스장도 다니잖아?]
“그러하다.”
[거기도 홍대 근처라며.]
하긴 그러고 보니.
두 가게 모두 숙소 주변이었으니 홍대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헬스장 사장님이랑 연결해 줄 수 있어?]
“헬스장 지배자와 연결?”
단탈리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개팅이라도 시켜 달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업무 협약 제안하려고.]
협약이라?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옆에 있던 제인이 알려 주었다.
“뭔가 콜라보로 이벤트 같은 거 하시려는 거 아냐?”
[맞아 맞아! 옆에는 제인이구나?]
“네, 맞아요 언니. 오래간만!”
[반가워! 아무튼, 가능할까?]
업무 협약이라.
이번에도 이연주로부터 기업 운영에 대해 배울 수 있겠군.
단탈리온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다. 그럼 바로 만남을 주선하도록 하지.”
[오케오케. 언제 될까?]
“오늘 당장이다.”
단탈리온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얇은 코트를 걸쳤다.
“곧장 준비를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