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나만 또
라이징 밴드 3라운드 결과.
도미니온과 앤디, 제인, 정유나의 A팀은 2위로 통과.
오로바스와 김은영이 속한 E팀은 3위로 통과.
단탈리온과 열반 밴드의 D팀은 1위로 본선 3라운드를 통과할 수 있었다.
“해냈다!!!!!!”
“해냈습니다, 스님!”
“나무아미타불……!”
특히 패자부활전으로 올라온 열반 밴드는, 그 누구보다도 더 기뻐했다.
A팀의 노래와 퍼포먼스를 지켜본 참가자들은 그들의 노고를 이해한다며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1등으로 진출한 팀에게는 무려 무려 무려! 고급 호텔 뷔페 식사권을 드립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한석주 MC는 A팀의 멤버들 전원에게 고급 호텔 뷔페 식사권을 증정했다.
“와, 부럽다…….”
“나도 갖고 싶었는데…….”
“우리 팀은 패자부활전 팀이 없었잖아.”
참가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잠시.
한석주가 눈을 빛내며 다음 미션을 소개했다.
“자, 심사 위원님들, 우리 본선 3라운드 통과 발표한 거 이외에도, 또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석주의 말에 윤상하가 커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정말 축하합니다. 본선 4라운드 진출을 한 여러분들은 이미 밴드라는 하나의 음악 장르에서 큰 성과를 내시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래서 윤상하는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음 라운드에 대해 설명했다.
“팀이 바뀐 채로 진행해서 재미있었던 분들도 계실 거고, 빨리 원래 팀으로 돌아가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렇죠?”
윤상하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참가자들이 그래도 재밌었다며 즐거워했다.
그런 참가자들을 보면서 윤상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4라운드는 원래 멤버들과 함께 진행하게 됩니다.”
참가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사실, 본선 4라운드 미션은 제가 제안한 미션입니다.”
그 말에 참가자들 사이에서 기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윤상하는 음악계에서도 또라이로 유명한 사람.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궁금해하던 참가자들은 이어진 그의 말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본선 4라운드에서, 악기 연주자들은 악기 연주 도구를 금지합니다.”
참가자들 사시에서 동요하는 듯한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그 소리를 만족스럽게 듣고 있던 윤상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드러머는 스틱 없이. 베이시스트와 기타리스트는 피크 없이 연주해야 합니다.”
이건 그가 핑거링을 주력으로 삼는 베이시스트이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정말 충격적인 미션이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석주도 정말 치사하고 더러운 미션이라며 윤상하를 장난스럽게 비난했다.
“윤상하 프로듀서처럼 정점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연주는 못 할 거라는 말씀이시잖아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지금 여기에 참가한 후배 음악가들이 어디까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지.
윤상하로서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스틱을 쓰지 못한다면 나무젓가락을 들고서 연주해도 좋고, 손바닥을 써도 좋습니다. 피크가 없으면 신용카드로 연주를 하거나, 핑거링을 해도 좋겠지요. 건반은 손가락을 봉인할 수는 없으니 한 손 연주만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렇게 악기 연주에 제한이 걸리자 보컬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그럼 보컬은 아무 제한이 없나요?”
“보컬에게는 제약이 없습니다.”
그 말에 참가자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던졌다.
“왜 보컬만 자유롭나요?”
“그야…….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겠지요.”
악기 연주에 제한을 두기 때문에, 보컬리스트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악기 연주를 얼마나 센스 있고 재치 있게 풀어낼 수 있는가도 평가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 된다.
윤상하는 그걸 모두 정답을 알려 주기보다는, 참가자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열어 둔 채로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자, 다들 실력들을 뽐내 봐라.’
특히나 주목하고 있는 밴드들.
RRR 밴드와 탑엔젤스, 스틸러블리.
이들이 어떤 공연을 펼칠지 그 귀추를 주목하고자 하는 윤상하였다.
* * *
라이징 밴드 3라운드 결과가 모두 발표된 직후.
참가자들은 대기실을 지나가며 상반된 반응들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울먹이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허공에 주먹질을 해 대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겨우 살아남은 열반 밴드.
그중에서도 리더인 능선은.
“나무아미타불…….”
조용히 목탁을 들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왜 지금 굳이.
대기실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이러고 있는 건지.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스님들이니까 그런가? 생각하며 그냥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나갔다.
하지만, 능선의 목적은 스님이기에 하고 있는 수행을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단탈리온 데스맨의 활약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벌써 심연의 저 끝으로 빠져들어.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잠식되어 진정한 나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너라면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잡고 싶지 않은가.
-그래, 자네이기에 가능하다.
방금 전, 공연을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자신의 귓가를 강타했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달콤하게 느껴졌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 목소리의 꾀임에 넘어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걸 바로 잡아 준 게 바로 데스맨 씨다.’
물론, 탄불과 허당은 아무리 그래도 대머리를 마구 때리는 건 너무하지 않았냐며 살짝 볼멘소리를 냈었지만.
-허허, 싸다구를 안 때린 게 다행이지 않습니까.
능선의 재치 있는 농담으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
자신의 몸에 깃들어 오는 수상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단탈리온 데스맨의 마력이 능선의 몸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그리고 마력 전달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순간적으로 가하는 마력 강타였다.
능선도 자세한 과정은 알지 못했지만.
단순히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도 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이번 라이징 밴드 본선 3라운드.
능선은 단탈리온 데스맨에게 몇 번이고 구원받았다.
불가에 귀의한 자로서 구원이라는 말이 어울리나 싶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자신의 삶 자체를 구해 낸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능선은 좌선을 한 채로 옅은 미소를 흘려보내며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제가 돕겠습니다.”
단탈리온 데스맨이 진출하고, 영혼을 갈아 넣고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라이징 밴드.
그 무대에서 자신이 단탈리온 데스맨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몸을 아끼지 않고 도와줄 것이라고.
결심을 다진 능선의 민머리 위로, 신성력 아지랑이가 살짝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본선 3라운드가 끝나고.
인간계는 인간계대로.
마계는 마계대로.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때.
RRR 밴드 멤버들은 합주실에 모여 애꿎은 과자만 뜯고 있었다.
“으으음…….”
앤디가 노트북 화면에 열려 있는 이메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야, 이거 해야 할까?”
“나는 하는 쪽에 한 표.”
제인이 감자칩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지금 아니면 이런 거 언제 해 보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왜? 라이징 밴드에 지장 줄까 봐?”
앤디가 걱정하는 지점을 알고 있다며 제인이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저거 찍어도 한참 뒤에나 나올걸?”
“그러려나?”
앤디는 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라이징 밴드에서 맹활약 중인 RRR 밴드 멤버분들께 의뢰합니다!>
<저희는 CK브라더밴드의 마케팅 부서입니다!>
<부디 RRR 밴드 분들과 함께 저희의 신규 플랫폼 서비스를 홍보하고 싶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광고 제의였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하겠지만.
“그냥 후딱 찍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오, 리더의 고충을 너희가 아냐? 당신들이 아시냐고요~!”
앤디는 RRR 밴드의 리더로서 여러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다음 라이징 밴드 미션은 악기 연주 도구를 쓰지 않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핑거링으로 강렬한 메탈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걸 연습할 시간도 부족할 것 같은데, 이 광고 제의를 덥석 물어 버렸다가는.
“우리 그랬다가 라이징 밴드 떨어지면…….”
“음. 그러하다. 걱정 말거라. 이 몸의 밴드니라.”
“……저기요, 데스맨 씨?”
“흠. 시기가 그러하다면 준비하도록 하지. 빠를수록 좋다, 인가.”
옆에서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는 단탈리온을 바라보며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림과 동시에 단탈리온이 핸드폰 너머의 상대에게 말했다.
“옳은 판단이로다.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려 두도록 하마.”
“누가 시종이야! 그리고 지금 그거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기보성 PD님?”
앤디의 질문에 단탈리온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CK브라더밴드이니라.”
“……어디?”
“이제는 가는 귀도 먹었는가…….”
“그게 아니라! 야 너 설마, CK브라더밴드에 전화한 거야!?”
“그렇다. 지지부진하게 끌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 몸의 밴드를 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
“이 몸의 밴드는 언제 어느 때든.”
단탈리온이 양손을 펼치고는 엑스차로 교차시켰다.
“퍽앤롤 정신으로 달려가는 거다!”
“퍽앤롤! 믿습니다, 단탈리온 님!!!!”
단탈리온의 포즈를 그대로 따라 하는 오로바스가 단탈리온 앞에 무릎을 꿇었고.
“……내가 리더인데.”
“이제 슬슬 포기하는 게 어때?”
망연자실한 앤디와 그를 토닥이는 제인의 목소리가 합주실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CK브라더밴드.
대한민국의 3대 통신사 중 하나로, 유명 연예인들이 이 통신사와 광고를 찍으면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는 소문이 들리는 기업이기도 했다.
그래서 CK브라더밴드와의 광고 촬영을 희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런 녀석들이면 무조건 오케이 할 거라고 했지?”
라이징 밴드처럼 아마추어들이 고군분투하는 프로그램의 참가자라면, 광고 제의를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방금 전, RRR 밴드의 리더, 단탈리온 데스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이번에도 저렴한 비용으로다가 광고 찍고, 보내면 돼.”
“네, 알겠습니다!”
CK브라더밴드의 마케팅 총책임자인 유찬조가 부하 직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럼 우리는 적당히 구상이나 해 두자고. 신입들 데뷔 무대 만들어줘야지?”
사실 그 무대가 데뷔 무대가 아닌, 신나게 구르도록 만드는 지옥의 무대가 되겠지만.
그 자리에 있는 유찬조는 물론이고, 그의 부하 직원들도 그저 입꼬리를 올리고는 키득거릴 뿐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 주면 좋을까.”
“아, 이상한 분장을 시킬까? 엄청 쪽팔리는 걸로!”
“아니면 등신 같은 멘트를 하라고 명령하는 건 어때. 어차피 진짜 광고에는 안 실릴 거지만.”
“신입들이 뭘 알겠어.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지.”
그렇게 유찬조를 비롯한 CK브라더밴드의 마케팅 팀원들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였다.
“자, 자자자, 잠깐만!”
“응? 왜 그래?”
갑자기 뛰어 들어오는 다른 직원에 의해 화기애애했던 회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지, 지, 지금 저, 저기 나, 나가 봐, 봐야…….”
“뭔데? 천천히 말해.”
유찬조가 답답하다는 듯 헐레벌떡 들어온 직원을 향해 말을 쏘아붙였다. 직원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밖에 우리 만나겠다고 온…… 악마들이……!!”
“악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인가.”
콰앙-!!
CK브라더밴드의 사무실 문이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열리더니 반대편 벽과 문고리가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
카앙-카캉, 캉!!!
“그대들인가.”
“누, 누, 누구야!?”
시뻘건 눈매에 붉은색 브릿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새하얀 분장.
거기에 입술에 박힌 피어싱과 손가락에 덕지덕지 꽂아 넣은 각양각색의 반지들.
그리고 큰 키로 상대를 위압하지만, 나름의 고풍을 유지하고 있는, 귀족 같은 걸음걸이의 소유자.
뚜벅.
단탈리온 데스맨이 혼비백산하고 있는 CK브라더밴드 직원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여 곧장 달려왔거늘.”
단탈리온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준비가 이리도 미흡해서야 쯧쯧. 마왕을 보좌하겠다는 말은 역시나 허세에 불과했는가.”
단탈리온의 건방진 말투가 CK브라더밴드 사무실 내부에 울려 퍼졌고.
마력이 담긴 마왕의 목소리를 들은 직원들이 오금을 저리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뒤로는.
“아……. 저 미친놈이 또…….”
“여차하면 흑마법 쓰겠지, 뭐.”
“제인 님. 그렇게 마력을 남용할 수는 없습니다.”
CK브라더밴드 사무실이라는 무대 위로 앤디, 제인, 오로바스가 각기 고블린, 서큐버스, 드라큘라 백작으로 분장을 하고 들어오고 있었다.
“……근데 왜 나만 또 하급 마물이야?”
그리고, 앤디의 중얼거림만 고요한 사무실 안을 조용히 메우다,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