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특훈이다
“흠……. 이곳이군요.”
열반 밴드.
능선, 탄불, 허당 스님.
시루베로스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RRR이 광고를 촬영했던 CK브라더밴드의 건물 근처에 와 있었다.
“잠시…….”
목탁을 꺼내 톡, 탁, 몇 번 두드려 본 능선이 눈을 감고는 중얼거렸다.
“느껴집니다.”
“스님,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알 수 없는 기운입니다. 이것은…….”
능선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공터에 있는 쓰레기통을 향해 걸어갔다.
“……두꺼운 실?”
“허허……. 아미타불…….”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인 능선이 시루베로스에게 손가락 크기만 한 실이자 뱀을 보여 주었다.
“혹, 이것을 저희보고 들고 가라는 뜻입니까.”
“꺙!! 끼양!!!!”
(해석: 맞다! 당장 챙겨라!)
실이자 뱀을 들어본 능선의 눈빛이 침착하게 변했다.
“이상하군요. 이 실…… 아니 뱀인가요? 이건…….”
잠시 두꺼운 실을 붙잡고 여기저기 매만지던 능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남았다 사라졌다…… 그런 것입니까.”
단탈리온 데스맨의 강아지, 시루베로스.
마력을 사용하는 그라면 강아지를 조종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리고 지금 시루베로스에게 우리를 이곳에 오게끔 만들어 실을 들고 가도록 했다.
그 뜻인즉슨.
“저희의 약속을 다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언젠가 RRR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돕겠다고 했던 말.
능선은 그 약속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당신의 심계는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절반으로 갈라진 실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감싼 능선이 탄불과 허당에게 말했다.
“불가의 가르침에 맞춰 분석해 보도록 하시지요.”
“불가의 가르침이라면…….”
“진심이십니까, 스님……?”
뒷말을 삼킨 허당과 탄불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능선은 그저 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예. 돌아가는대로 면벽, 무문관수행에 들어가겠습니다.”
“하면 저 뱀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능선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손에 든 목탁을 들어 올렸다.
“독방의 문에 걸어 두겠습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리는 무문관수행.
하루종일 실과 뱀을 바라보며 상황을 분석하겠다는 능선.
“하지만 라이징 밴드가…….”
“……그렇군요. 그럼 이걸 어찌해야…….”
그때 시루베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바닥에 대고 발을 마구 낑낑댔다.
“꺙!!! 끼양 꺙!!”
“응? 왜 그러십니까, 견공이시여.”
능선이 바닥을 바라보자 시루베로스가 자신의 발톱으로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하루>
“하루……?”
그걸 본 능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군요. 그런 것입니까. 허허…… 데스맨 씨의 뜻을 저는 또 이해하지 못하고…….”
“스, 스님?”
“면벽은 딱 하루만 하겠습니다.”
능선이 시루베로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방긋 웃었다.
“방법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견공.”
“컁! 키양!!! 꺄아꺄앙!!”
(해석: 어디 필멸자가 켈베로스님의 머리를 만지는가!!)
“허허허, 저도 견공이 참으로 좋습니다.”
“크헥, 캬, 컁!!꺄꺙!! 크꺄앙!!!”
(해석: 이, 이거 놓아라! 털 하나 없는 얼굴로 비비지 말란 말이다!)
시루베로스의 심정은 알지도 못한 채, 능선은 시루베로스가 예뻐서 어찌할 줄 모르겠다며 마구 얼굴을 비벼댔다.
* * *
한바탕 소동이 가라앉은 뒤 RRR 밴드 합주실.
앤디, 제인, 오로바스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으음…….”
“끄응…….”
“흐음…….”
셋의 모습을 담고 있던 박은환이 잠시 동영상 촬영을 중단하고 앞으로 나왔다.
“너무 고민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 벌써 30분 지났어요.”
“그야 그렇기는 한데…….”
지금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악마 하나는 라이징 밴드 본선 4라운드의 미션을 고민 중이었다.
이번 4라운드만 통과하면 결선 1라운드로 진출하기에 본선 4라운드의 중요성은 굳이 반복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연주 도구 없이 연주를 하라니.
“피크 없이 연주하면 핑거링뿐인데, 이걸로 메탈을 구현하려면…….”
“손톱 날라 갈 텐데…….”
“드럼도 큰일입니다. 스틱이 없다면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요.”
“그나마 메탈 베이스는 핑거링으로도 많이 하니까 괜찮기는 하지만.”
베이스인 제인은 피크, 핑거링 모두 사용하는 베이시스트였기에 이번 미션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메탈 연주도 손가락을 그저 빠르게 돌리기만 하면 큰 어려움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일렉 기타와 드럼.
“피크 없이 해 봐……? 메탈 사운드 나오려나?”
“앗! 잠시만요!”
박은환이 후다닥 달려가서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앤디가 일렉 기타를 들고 앰프를 켜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쟈쟝-
쟈쟝쟈쟈쟝키잉쟈쟝
다다당타다다쟝!
뚝.
연주를 하던 앤디가 기타에서 손을 놓았다.
“후……. 역시 익숙하지가 않네.”
아무래도 피크로 연주할 일이 많았기에, 지금 앤디의 핑거링은 다소 어색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미션은 앤디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저도 일단 젓가락으로 해 보겠습니다.”
오로바스가 드럼 스틱 대신 젓가락을 들었다.
둥, 둥, 둥.
다다다, 둥, 다닥
찌익-
“…… 헉!”
설마 싶었던 그 일.
오로바스의 젓가락 힘을 버티지 못하고 드럼의 스네어 하나가 찢어졌다.
“……수리를 맡겨야겠군요.”
“젓가락도 안 되겠다. 그치.”
“그러게 말입니다. 이를 어찌해야…….”
모두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밴드라면 자신의 특기 연주법 하나 정도는 갖고 있는 법.
누군가는 피크를, 누군가는 핑거링을, 누군가는 퍼커시브를, 또 누군가는 스틱을.
그 이외에도 각자의 성향에 맞는 연주 기법을 연구하고, 그걸 극대화하는 것.
그게 바로 연주자에게 필요한 역량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미션은 사실상 각자가 지금까지 연마해 온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민이 지나치게 많구나.”
그때 단탈리온이 음료수를 사 들고 들어왔다.
“마시거라.”
“오 뭐야. 네가 음료도 사 오고?”
“PC방 이연주 누나에게 받아 온 거다.”
아르바이트 끝날 때 선물로 받아 왔다면서 닥터솔트 다섯 캔을 꺼낸 단탈리온이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모두가 그걸 받아서 마셨다.
“푸훕!!!”
“으웩 이게 뭐야.”
오로바스는 태연하게 음료를 마시고 있었지만 앤디와 제인은 닥터솔트의 진한 체리향을 버티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이 맛을 즐기지 못하다니 가련하구나.”
“이거 좋아하는 사람이 드문 거 아닐까……? 아무튼, 뭔가 방법이라도 있어?”
앤디의 질문에 단탈리온이 히죽 웃었다.
“흑마법을 사용하면 되느니.”
“아! 그렇네!!!”
앤디가 손뼉을 쳤다.
“마법 쓰면 되잖아! 우리 밴드의 치트키!!”
“치트라고 말하지 말거라. 우리의 능력이니.”
“그치그치. 그래서, 어떤 마법 쓰려고?”
“첫 번째 제안이다. 이 몸의 엄지손톱을 길게 만들고 현장에서 손톱을 뽑아 피크 대신 사용할 수 있도록 연출할 수 있다.”
“……그건 너무 고어할 거 같아서 패스.”
“앤디 자네를 거꾸로 매달아서 시선을 아예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 음악보다는 시각적인 연출에 집중시키는 방법도 있다.”
“머리에 피 쏠리면 어쩌려고! 그거도 패스야!”
“……참으로 까다롭구나.”
단탈리온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니 자네가 안 되는 게다.”
“네가 기타리스트의 고통을 아냐? 아냐고.”
“시끄럽다. 그럼 마지막 방법이다.”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단탈리온이 말했다.
“결국 중요한 건, 그대의 다섯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한 것 아니더냐.”
“그렇…… 지.”
“그럼 그걸 해결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단탈리온이 심히 안타깝다며 앤디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일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아닐지니.”
“……이게 은근히 무시하는 게 아니고 그냥 대놓고 무시하네? 기타리스트 자존심이 있지, 나도 잘할 수 있거든?”
“그럼 해 볼 테냐?”
단탈리온의 질문에 앤디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굳세게 의지를 다졌다.
“당연하지.”
“할 수 있겠느냐.”
“한다니까!”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정말 괜찮겠느냐.”
평소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진지한 질문이었기에.
앤디도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도 없는 일.
라이징 밴드를 하면서 RRR의 인기도 급속도로 치솟았다.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너튜브 조회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단탈리온의 제안이 다소 위험해 보이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까짓것 해 보지 뭐!!”
라이징 밴드 결선까지 진출하지 못하면.
그게 앞으로 더 큰 후회로 남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설명하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탈리온의 설명에 앤디와 제인, 오로바스, 그리고 영상을 찍는 박은환까지.
일행은 그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이렇게 된다고……?”
“그러하다. 그러니 이 마법에 적응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법.”
단탈리온이 붉은 안광을 빛냈다.
“오늘부터 특훈이다, 앤디여.”
* * *
앤디의 무기가 정해졌을 때.
오로바스는 여전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바스!]
“시, 시틀라 님!”
오로바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허공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시틀라 님을 뵙습니다!”
[야야야! 조용히 해! 단탈리온 님께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네?”
무슨 일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오로바스였지만,
일단은 상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였기에 순순히 평소의 자세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로바스, 천계의 힘은 따로 느껴지는 게 없더냐?]
오로바스가 고개를 저었다.
“예, 아직은…….”
[1위 마계로부터의 소식이다.]
1위 마계라면, 바엘 님의 마계?
“예!”
[…… 대천사 메타트론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한다.]
바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시틀라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단탈리온 님께는 보고하지 마라. 바엘 님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고 계신다.]
“하, 하오나……!”
[지금은 단탈리온 님을 옆에서 지켜 드리거라. 자네의 목숨을 바쳐서, 아니, 목숨을 수십 개는 바쳐서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고개만 끄덕이거라.]
오로바스가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틀라가 잘했다며 오로바스를 격려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오로바스, 너뿐이다. 우리도 자네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구상 중이니 조금만 버티거라!]
그렇다.
71위 마계의 모든 군단장과 시틀라가 고생하고 있다.
오로바스도 그들의 노고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틀라의 말에 그저 충성을 다 하는 직원의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예! 시틀라 님!”
[쉬잇! 목소리 낮춰!]
“헉! 죄송합니다.”
[조심해라 아무튼. 그리고 필요한 건 없느냐? 마계에서 지원 물품이라도 보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말에 오로바스의 양쪽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필요한 게 있습니다.”
은밀하게 시틀라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받은 오로바스는.
“저도 드럼 무기를 해결했습니다!!”
“오, 그거 괜찮다!”
다른 멤버들의 호평을 들으면서 드럼 연습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때 당시.
앤디와 오로바스의 연주가 RRR 밴드의 역대급 퍼포먼스를 또 한 번 갱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RRR은 전혀 알지 못했다.
* * *
시틀라가 오로바스에게 단독 통신을 걸어 둔 상태인가.
하긴, 시종들끼리 이야기할 사항들도 있을 터.
게다가 오로바스는 아직 연주 무기를 정하지도 못한 상황이니, 시틀라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었다.
“앤디여, 이번 노래의 컨셉은 무엇이더냐.”
“응? 컨셉?”
아직 본선 4라운드의 추가 미션이 공개되지 않았다.
물론, 미션이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본선 3라운드 촬영 당시 MC가 했던 말.
-보컬에게는 제약이 없습니다.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겠지요.
보컬에게는 달리 제약이 없다는 건.
어쩌면 추가적인 비밀 미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기존의 곡 커버만으로는 부족할 터.”
만약 커버를 하더라도 가사까지 바꿔야 한다는 비밀 미션이 주어진다면?
혹은 상대 팀과 대결 구도로 노래로 싸움을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기존 곡 커버보다는 우리들의 자작곡으로 전투에 임하는 게 훨씬 밴드의 색깔을 보여 주기 좋을 터였다.
“자작곡……. 그게 제일 좋지.”
“주제는 뭘로 하려고?”
“생각해 둔 주제가 있노라.”
단탈리온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꺼냈다. 거기에는 가이드가 담긴 쌩 목소리 녹음 파일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가이드 노래를 듣던 멤버들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떠한가?”
“난 찬성. 간만에 우리 스타일대로 하겠다!”
“언제는 안 한 것처럼 말한다. 나도 찬성이야.”
“저는 당연히 찬성입니다, 단탈리온 님!!”
셋의 답변을 들은 단탈리온이 히죽 웃었다.
“좋다. 그렇다면 다음 본선 4라운드는 자작곡으로 승부한다.”
단탈리온의 핸드폰 화면은 <성검, 엑스칼리버의 최후> 라는 자작곡 제목이 적힌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