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파멸의 불청객 (1)
“하아…….”
신태정이 고개를 박고 물을 마셨다.
다사다난한 촬영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꽤나 멋진 사람들이기는 해.’
지금 자신이 단탈리온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신태정은 거만하게 앉아 있는 RRR 밴드의 멤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밴드하고 싶다.”
“태정 씨? 밴드하고 싶으세요?”
옆에서 다가온 서민유 PD에 의해 신태정은 상념을 그만두었다.
“아뇨 뭐. 솔직히 재밌어 보이기는 해서요.”
“방금 전까지 데스맨 씨를 엄청 챙겨 주시던데, 그거도 혹시 기회되면 껴 달라는 그런 의도가 담긴 건가요?”
서민유가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신태정은 그건 아직 생각하지 못해 보았다며 대답했다.
“순수하게 밴드하는 분들이 부러워서 그런 거였는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하하하!”
신태정이 호탕하게 웃었다. 서민유도 기분 좋게 웃으면서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이제 라이브 연주로 들어갈 건데, 세팅 완료되기 전에 커피 어떠세요?”
“커피요?”
서민유의 말에 신태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조민웅 씨가 커피 차 보내 주셨거든요!”
“헉! 진짜요!?”
“진짜다!”
“역시 민웅 씨!”
서민유의 말을 들은 다른 출연진들이 모두 기뻐하며 달려왔다.
뮤지션 비긴즈 첫 촬영일에 뮤지션 비긴즈가 낳은 슈퍼 스타 조민웅이 커피 차를 보냈다!
“역시 잘나가는 연예인은 다르네요.”
“시즌2 때도 보내 줬었는데, 이번에도. 크.”
출연진들과 스탭들이 모두 한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꽃미남 싱어송라이터 조민웅의 커피 차!>
<민웅이의 커피 마시고 이번 시즌도 대박 나자!>
<칠죄종 탐욕의 이름으로 커피를 하사하노라~>
장난스럽게 적힌 멘트들이 작은 현수막으로 만들어져 트럭에 붙어 있었다. 트럭 안쪽에는 커피를 담당하는 바리스타가 열심히 음료를 제조하고 있었다.
“저도 아메리카노 하나요!”
“저는 청포도 에이드!”
그렇게 사람들이 각자 음료를 주문하면서 인증 샷을 찍고, 각자의 SNS에 업로드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있던 RRR 밴드도 커피 차로 다가왔다.
“와, 조민웅 씨가 이런 걸…….”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거 보낼 수 있겠지?”
“돈 많이 벌어야지.”
앤디, 제인이 푸념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단탈리온을 바라봤다.
‘야,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방금 전까지 단탈리온으로부터 조민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었다.
지금 저 커피 차 안에 어떤 함정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
단탈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들은 마셔도 되느니.”
“……아냐, 그냥 난 물이나 마실래.”
“굿즈도 필요 없지?”
제인이 커피 차에서 굿즈를 들고 왔다.
음료를 받아 가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조민웅의 얼굴이 박힌 스티커였다.
“난 됐어.”
“저는 좀 필요합니다.”
앤디와 달리 오로바스는 적극적으로 커피를 받아 갔다.
“예, 저는 블랙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립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블랙은 왜 붙어……?”
이상한 이름을 붙이는 오로바스를 보며 앤디가 의아해 했지만, 오로바스는 그런 앤디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음료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스티커를 십여 장가량 잔뜩 챙기고는 돌아왔다.
“이렇게나 많이?”
“네. 이게 있어야 할 겁니다.”
단탈리온이 말했던 조민웅의 실체.
그가 정말 칠죄종과 관련이 있는 이라면, 이번에 보내는 커피 차도 역시나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
오로바스는 그렇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주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 굿즈들과 음료는 제가 분석하겠습니다.”
오로바스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뮤지션 비긴즈의 퀴즈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순찰을 나선 시틀라와 에키드나, 그리고 아스테리오스는 심각한 얼굴로 길을 걷고 있었다.
“시틀라.”
에키드나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바닥에 앉은 채로 미간을 좁혔다.
“왜?”
“이거 봐 봐.”
그녀가 가리킨 공간에는 딱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었다.
단순히 구멍이 생긴 게 아니라, 정말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를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구멍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음…….”
시틀라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쪽으로 도망쳤거나?”
“멍청하긴. 도망이 아니라 사라진 거다.”
구멍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4군단장, 아스테리오스가 말했다.
“사라져?”
“그래. 이건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움직인 거야.”
아스테리오스가 구덩이의 안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미궁을 만드는 게 취미인 내가 말하는 거니 틀림없다. 이건 구멍 주위에 마법진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발화하도록 만들어 둔 거야.”
71위 마계의 군단장 중 마법진에 관련된 소양이 가장 깊은 악마는 아스테리오스였다.
그가 만들어 낸 마계의 미궁은,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나 9서클 마법사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그 미궁에 사용되는 것들이 무수히 많은 마법진들.
때문에 아스테리오스가 마법진 연구에 적극적이었고, 지금 이 자리에도 시틀라, 에키드나와 함께 온 것이었다.
그런 아스테리오스의 말이었기에 시틀라 역시 그의 말을 좌시하지 않고는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자세히 설명해 줘.”
“쉽게 말하면 말이다.”
손가락으로 구덩이의 흙을 파내고는 그 냄새를 킁킁, 맡은 아스테리오스가 흙이 묻은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든 인간계와 마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마법진을 만든 거다.”
“뭐, 뭣!?”
“그게 정말이야!?”
시틀라와 에키드나가 그건 말도 안 된다며 말했다.
“지금 마계와 인간계의 마력 차이가 스무 배가량 나는데, 그걸 어떻게 만들어! 말도 안 돼!”
“나도 에키드나의 말에 동의해. 마계와 인간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고?”
게다가 이 마법진은 자연스럽게 발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말인즉슨.
“마법을 사용하면 이 마법진은 무용지물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정도의 마법진인데 어떻게 인간계에서 다시 마계로 온다는 거지?”
“글쎄……. 그건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아스테리오스가 얼굴을 굳히고는 시틀라와 에키드나를 돌아봤다.
“이 마법진이 남아있던 흔적은, 내가 미궁을 언제든 오갈 수 있는 마법진과 마력의 형태가 흡사하다.”
아스테리오스의 의견을 들은 시틀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아스테리오스는 이걸 판명하는데 집중해 줘. 에키드나.”
“응.”
“에키드나는 마법진을 추가적으로 연구해 줘.”
애초에 에키드나와 아스테리오스는 마법진을 연구하기 위해 만난 상태.
단탈리온의 명령도 있었기에 두 악마는 의욕을 불태우며 말했다.
“알았어. 맡겨 줘.”
“아, 한 가지만 더.”
시틀라는 깜빡할 뻔했다면서 주머니에 들어 있던 광물을 꺼냈다.
“이, 이건……!?”
“마력 보조 장신구를 만들 수 있는 광물이야. 이거도 부탁할게.”
친구로부터 물건을 건네받는 에키드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소 시틀라가 짓지 않는 표정.
언제든 사건이 터질 거라 생각하는, 그렇게 예측하고 있는 시틀라의 표정이 저렇게 굳어진다는 건.
“너……. 뭔가 느꼈구나.”
“……그래.”
시틀라가 조용히 두 악마를 바라봤다.
“단탈리온 님의 밴드가 위험하다.”
“!!”
“!!”
시틀라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빛났다.
* * *
뮤지션 비긴즈의 촬영이 계속되어 갔다.
출연자들은 각자 미션을 부여받고는 서로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뮤지션 비긴즈 시즌3를 주제로 노래를 만들어라!>
주어진 미션은 바로 이것이었다.
뮤지션 비긴즈 시즌3.
이를 주제로 노래를 만들기.
이에 싱어송라이터들이 일제히 기타를 뚱땅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직 본 공연이 시작된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2시간.
그사이에 완성도가 어느 정도 나오는 노래를 만들어야 했다.
“으……. 이것도 아닌데.”
참가자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너무 시간 짧은 거 아냐?”
“방송에서 두 시간 준다고 자막 뜰 때는 뻥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아오, 그냥 발표하려던 곡에다 입힐까?”
그렇게 고민들을 이어 나가고 있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카메라가 열심히 담아 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서민유는 승리의 미소를 활짝 지었다.
‘좋아, 이번 시즌도 이런 느낌으로 가자!’
싱어송라이터가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전문 뮤지션들이 고뇌하고, 새로운 곡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특별하다.
시간이 없기에 완성도 높은 곡을 뽑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그들이 실제 창작을 할 때 얼마나 깊이 있는 고민을 하고, 연습을 하면서 만들어 나가느냐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초반에는 훨씬 유리하고 말이지.’
그런 점에서 신태정을 바라보면 참 배울 점이 많았다.
신태정은 이미 본인이 평소 생각하고 있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너를 만나 커피를 마셔]
[내가 다니던 카페에]
[너의 흔적을 남겨]
따라다, 다라다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볍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신태정을 바라보며 참가자들도 혀를 내둘렀다.
“하……. 어떻게 저런 곡이 바로 나오냐.”
“이 정도면 윤상하 선배님 후계자처럼 되실지도 모르겠네.”
“아니 사회자가 왜 여기까지 참가하시냐고…….”
뮤지션 비긴즈 시즌3에 참가하는 신태정.
원래는 사회자로 참가했지만, 예외적으로 본인이 희망할 때는 싱어송라이터, 뮤지션으로 참가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신태정도 노래를 만들 수 있었다.
[네가 좋아하던 아메리카노]
[나는 싫어하던 카페라떼]
[너의 추억을 담은 크림 한 모금에]
[내 메마른 입술이 적셔지네]
사람들의 따가우면서도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신태정은 계속해서 노래를 만들어 갔다.
그런 신태정의 작곡, 작사 과정은 카메라에도 연신 담겼다.
그가 주제로 삼은 것은 커피와 만남.
마치 조민웅이 보내준 커피 차를 주제로 삼아 만드는 노래처럼 들렸다.
“아, 이 노래요? 네, 커피 차에서 영감을 받은 게 맞습니다.”
그리고 그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본인의 인터뷰를 통해 증명했다.
“그리고 그 커피 덕분에 저는 RRR 밴드 분들과 한층 더 친해질 수 있었죠.”
그 속내는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서민유는 신태정 덕분에 또 한 컷을 땄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RRR 밴드는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는지 볼…….”
“흐아아아아아아아압!!!!!!”
갑자기 RRR 밴드가 모여 있는 장소에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뭐, 뭐뭐, 뭐야!?”
깜짝 놀란 서민유가 황급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후우…… 후우…….”
오로바스가 거칠게 호흡하며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고 있었다.
콰앙!!!
“꺄악!!!”
비명을 지르는 서민유를 조연출이 부축했다.
다른 스탭진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노래를 만들라고 했더니 왜 바닥에 주먹을 내려치고 있어!?
“후우…… 어떻습니까, 앤디 님.”
“으으음……. 느낌이 잘 안 사는데.”
앤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인은?”
“난 대충 왔지롱.”
제인이 베이스를 들고는 현을 살짝 튕겼다.
다다당다다단두둔다다당
슬랩에서 시작되는 도입부.
제인이 가볍게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이자 베이스와 연결된 앰프에서 신나는 리듬이 튀어나왔다.
“아오, 좋네.”
“그치? 이번엔 내 승리.”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단탈리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시집 한 권과 함께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칠죄종 탐욕을 자칭하는 하등한 필멸자, 조민웅이라는 인간을 주제로 삼은 가사가 완성되었노라.”
“오? 빠른데?”
앤디가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작곡은 어떠한가.”
“방금 제인이 선수 쳤어.”
“선수가 아니라 선착순.”
“그거나 저거나.”
앤디가 뾰로통해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제인은 그런 모습도 귀엽다면서 앤디의 귀를 꽈악 잡았다.
“아야! 아야야야야야!!!”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말고 사운드 만들어야지?”
제인의 말에 앤디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피크를 들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쟈아앙
앤디의 일렉 기타 사운드가 주변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 위로 깔리는 제인의 베이스가 흔들리는 공기를 한 번에 잡아 주었다.
두둔다다당두둔다당
그리고 그 소리를 감싸면서.
“하아아아!!”
콰앙!! 콰앙!!
오로바스의 주먹이 바닥을 연신 내리쳤다.
“아……. 아프지 않으신가……?”
서민유가 걱정되듯이 오로바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계속해서 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땅이 패이기라도 할 기세.
“계속하거라.”
“예!!!!! 단탈리온 님!!!!!”
게다가 무슨 마왕의 응원을 받아 강해지는 수하처럼 힘을 더 주고 있잖아!?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서민유를 비롯한 스탭진들, 그리고 모든 참가자가 입을 쩍 벌리고 RRR 밴드의 기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진짜 저걸로 콘셉트 잡는 걸까요?”
조연출이 불안한 듯 손가락을 들어 오로바스를 가리켰다.
조연출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서민유는.
“하아아아압!!!!!”
“!!??”
오로바스의 주먹이 꽂히는 곳에 깔려 있는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조민웅의 윙크와 미소가 가득한 스티커 뭉치, 그리고 그의 상큼한 눈웃음이 담긴 컵 홀더. 오늘 커피 차를 통해서 받은 굿즈 뭉치가 오로바스의 주먹을 맞으며 사정없이 박살 나고 있었다.
“혹시 조민웅을 조져 버리겠다, 이런 건가!?”
“PD님, 쉿! 그런 표현은 오프 더 레코드!”
“핫! 내가 무슨 말을!”
서민유가 그러거나 말거나.
오로바스는 주먹을 내리치고, 앤디와 제인은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했고.
단탈리온은 언제나처럼 고고한 귀족처럼, 당당하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 몸 앞에서 칠죄종을 사칭한 죄는 크도다.”
콰앙!! 콰앙!!
쟈쟝쟈아앙!
둔두두당다다당!
“그러니 자네의 죄를 물을 것이다.”
콰앙!!
키이잉쟈쟈쟝!
둔다당다다따당!
“파멸의 불청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