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편지
신태정은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는 목을 매만졌다.
‘……없다?’
자신의 목을 옥죄 오던 감각이 사라졌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살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아까까지의 의식 속 목소리를 들으면서 고통스럽게 기타를 잡았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게 누구던가.
‘RRR……!!’
암흑 속으로 침전해 가던 자신을 구원해 준 이들.
바로 저 앞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거만하게 다른 참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단탈리온 데스맨.
미친 속주를 보여 준 기타리스트, 마왕군 통징 12군단장 앤디.
묵직한 저음으로 노래의 기반을 닦아 주는 베이시스트, 마왕군 통칭 13군단장 제인.
강렬한 드럼으로 팀의 중심을 잡아 주는 박진태, 마왕군 통칭 오로바스.
“그럼 1부터 11군단장도 있나요?”
멍하니 RRR을 바라보고 있던 신태정의 귓가로 다른 참가자들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 질문에 단탈리온 데스맨이 하찮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1부터 11군단장들은 마계 본진에 있도다.”
“저 이타샤 차량에 그려져 있는 분이 11군단장이죠?”
“그러하다. 11군단장 에키드나다.”
대체 저게 무슨 소리일까.
정말 자신의 목소리를 담보로 잡고 있던 악마.
칠죄종처럼 저들도 악마, 마왕군인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만약 저들도 같은 악마였다면.
“아하하하, 저희 본진에 스탭 분들이 계시거든요.”
앤디가 황급히 단탈리온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음? 왜 그러느냐, 앤디여.”
“몰라서 물어!? 정체 들키면 안 되잖아!”
“지금 자네 때문에 더 들키게 생겼구나.”
저런 것도 그냥 콘셉트 놀이일 수 있다.
왜, 다들 그러지 않는가.
특히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저렇게 역할 놀이를 하는 게 유행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SNS에서는 일진과 찐따의 사랑극도 하면서 놀고 있는 초딩들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들도 그런 콘셉트으로 밴드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허나, 정말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 목으로부터 느껴지는 해방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대들도 노력하거라. 근성이 부족하다 근성이.”
“!! 네!”
다른 참가자들이 갑자기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아니, 처음에도 의욕은 있었다.
다만 그 의욕이 아주 얕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누구도 최선, 그 이상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
“미치도록 해 봐야겠다.”
“저런 공연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있겠냐고!”
“PD님! 저희 준비 시간 1시간만 더 주시면 안 되나요? 아니, 30분, 10분이라도!”
신태정도 RRR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는 알고 있다.
<파멸의 불청객>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불청객에게 일침을 날리는 노래.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뮤지션 비긴즈에 참가했던 이들의 양심을 쿡쿡 찌르는 노래.
그리고 그 양심이 찔리는 이 중에는 신태정도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는 대가로 얻게 된 목소리와 작곡 실력.
그걸 기회로 삼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였으니까.
그래서 RRR의 노래를 듣자마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불청객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
그 가사가 자신에게도 깊이 다가왔다.
악마의 힘을 빌려 이 자리에 올라온 신태정.
자신은 이 프로그램, 뮤지션 비긴즈에서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는가.
아니, 자신이 선배라면서 다른 참가자들을 가르치고 조언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
이 자리에서 가장 극명한 불청객은 바로 자기 자신.
그렇기에, 여기에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 준 RRR, 단탈리온 데스맨에게 보답을 해 주어야 한다고.
산태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하게 된 것도, 뮤지션 비긴즈 촬영 초반부터 단탈리온이 자신의 마력을 둘러 둔 덕분도 있었지만.
신태정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건 신태정이 RRR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신태정은 핸드폰을 들고는 단탈리온에게 달려갔다.
“저기, 데스맨 씨!”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가 저열한 필멸자, 불청객 신태정이여.”
단탈리온이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지금 매우 중요한 시점이거늘. 언제까지 널브러져 있을 것인가.”
“죄, 죄송합니다!”
“알면 되었다. 자네도 노래를 준비하거라.”
“그게…….”
신태정이 우물쭈물하며 단탈리온을 보며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렸다.
그러자 단탈리온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쯧. 또 용무가 남았느냐.”
“아, 네! 저기 음……. 사진 찍어도 될까요?”
“사진?”
그 말에 단탈리온은 물론이고 앤디, 제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진!?”
“태정 씨랑!?”
신태정 같은 음악계의 거물이 자신들과 셀카를 찍어 준다?
이건 홍보의 기회였다!
“PD님! 이번 뮤지션 비긴즈! 쓰리알 팍팍 밀어주죠! 어때요!”
앤디와 제인의 반응에 힘을 얻은 신태정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탈리온은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하였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후원인가. 옳은 판단이로다.”
“네! 저도…….”
저도 불청객 따위로 인식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태정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고는.
“자 여기! 여기 봐주세요!”
“태정 씨 옆에는 내가 서야지!”
“앤디 넌 뒤로 가. 기타 걸리적거려.”
“아, 두고 찍으면 되잖아!”
“자, 자, 다들 질서를 지키십시오. 신태정 씨 옆에는 제가 서겠습니다.”
“진태가 이렇게 새치기를……!?”
“오로바스……. 너무해.”
“그런데 스타트PC방 모자 써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서로 떠들썩한 분위기를 형성하던 RRR 밴드 멤버들이 있었고.
그저 신이 난 멤버들과 달리, 두 눈을 지그시 뜬 채 신태정을 바라보고 있는 단탈리온 데스맨이 신태정의 옆에 섰다.
찰칵-
그렇게 신태정은, 이번 뮤지션 비긴즈의 시작을 홍보하는 시즌3 첫 사진을, RRR 밴드 멤버들과 함께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뮤지션 비긴즈에서 만난 천재 메탈 밴드!! 이번 뮤지션 비긴즈 시즌3에서 쓰리알의 메탈을 찬양하라!! Rock and Roll!!>
이 짧은 세 문장이.
라이징 밴드를 보지 않던 시청자들과 음악인들에게.
“어? 이런 밴드가 나와?”
“엄청 잘하나 본데?”
“신태정이 주목한 밴드라…….”
RRR 밴드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 * *
“에잉 쯧쯧. 이런 식으로 올려서야 쓰겠는가.”
단탈리온이 혀를 차며 신태정의 SNS를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
“이러니 신태정이 탐욕의 마기에 집어삼켜지는 거다. 겨우 이 정도 센스라니.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너 그거, 단탈리온이라고 이름 언급 안 해서 그런 거지?”
“흥. 당연한 거 아니더냐. 적어도 이 몸의 밴드라면 리더인 이 몸의 이름을 반드시 넣어야 하거늘.”
“……리더는 나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이래서 필멸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 팔멸자들이란……!
탐욕의 마력과 마기를 쫓아내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말이지.
“그저 답답할 노릇이구나. 이걸 어떻게 해킹해서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더냐.”
“아서라……. 그랬다간 진짜 범죄자로 잡혀 간다.”
앤디가 단탈리온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발 이 미친놈……. 아니, 미친 악마가 더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아멘…….”
“감히 이 몸의 앞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가.”
“의지할 곳이 거기뿐이라 그렇다, 왜!”
“그래서 자네가 소인배라는 것이다.”
“야! 네가 열반 밴드 스님들 다 휘어잡아서 석가는 힘도 없고! 악마는 너니까 의미 없고! 그나마 남은 게 천사들이잖아! 내가 기댈 데가 거기 말고는 없다고!”
결국 참다못한 앤디가 삿대짓을 마구 해 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뮤지션 비긴즈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했고, 기대치도 올라갔지만! 이제 라이징 밴드 결선! 결선 준비해야 하잖아! 그럼데 SNS을 해킹한다느니 한심하다느니! 지금 그게 중요하냐! 당장 내일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야지! 내가 이래서 너 때문에 인마!”
“아…… 안녕하세요…….”
그때 합주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금발의 여성이 들어왔다. 앤디의 손가락이 단탈리온에게로 향하다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성에게로 향했다.
“내가 네놈 때문에……!! 헉!!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천사님께!!??”
앤디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거두었다.
“아, 아뇨! 괘, 괜찮아요! 나중에…… 올까요……? 훈육 중이신 거 같은데…….”
“이 몸이 앤디 따위에게 훈육을 받는다니. 가당치도 않구나.”
고오오오
“진정 뒈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히익! 죄송합니다!”
금발 여성이 고개를 조아리며 단탈리온과 앤디을 향해 사과했다. 앤디는 그러지 마시라면서 쩔쩔매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고, 단탈리온은 코웃음을 날리며 금발 여성에게 물었다.
“도미니온의 수하인가. 용건은 무엇이더냐.”
“아 그게…… 우, 우선 인사 올립니다!”
쿠웅!
도미니온의 수하인 최하급 천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단탈리온과 앤디에게 예를 갖췄다.
“도미니온 선배님의 전언을 들고 왔습니다! 용사의 동료, 천칭의 대마도사 리온 님의 후계자이신 단탈리온 데스맨 님께 꼭 전달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천칭의 대마도사?”
앤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단탈리온은 그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래서 용건은 그 전언뿐이더냐.”
“예, 예. 그렇습니다. 이걸…….”
금발의 천사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편지……?”
“네 앤디 님. 도미니온 선배님의 편지입니다.”
편지는 RRR 밴드 멤버들 모두에게 한 장씩 적혀 있었다.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씨체였다.
마치 컴퓨터로 적은 글씨처럼, 깔끔하고 예쁘기 짝이 없는 글씨체.
“편지로 우리를 포섭하려는 것인가.”
“포, 포섭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품에 있는 그것은 무엇이더냐.”
“……헉!”
천사가 숨을 턱 삼키며 불안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이, 이 구슬은…….”
“천계의 옥인가.”
단탈리온이 여성으로부터 물건을 집어 들었다.
반투명색으로 이루어진 구슬. 주먹만 한 크기의 구슬에서는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천계에서 사용하는 신성력. 그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구슬.
단탈리온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지금 이따위 물건을 이 몸에게 소지하라는 것인가!
“히이이이익!!!”
콰앙!
단탈리온이 발을 한 번 구르자 구슬이 절반으로 똑, 쪼개졌다.
“과거고 지금이고. 천계는 변함이 없구나.”
“그, 그런…….”
쪼개진 구슬 사이로 단탈리온의 얼굴이 비쳐졌다. 천계에 대한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스산하게 쪼개진 구슬의 표면에 나타났다.
“도미니온의 편지는 잘 받았다.”
“……네?”
“허나 도미니온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단탈리온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도미니온의 편지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단탈리온의 손을 타고 오르더니 이내 허공에서 사라졌다.
도미니온이 RRR 멤버들을 위해 보호 마법을 걸어 둔 신성력이었다.
“어, 어떻게……!?”
“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탈리온의 손에서 작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편지지를 한 번 감싸며 편지의 안쪽으로 스며들어 갔다.
“편지지에 숨겨 둔 신성력도,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
“그럼…….”
“그러하다.”
단탈리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1년, 아니 십 년이 걸리더라도 수련을 완벽하게 마치고 나오라고 전하거라.”
“……!!”
“그것이. 이 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
본디 수련이란 것은 완벽을 도모해야 하는 법.
어설프게 마치고 나왔다가 라이징 밴드나 다른 공연 프로그램에서 사고를 치는 순간.
RRR의 발목만 잡을 게 뻔하다.
……그리고 귀찮기도 하고.
단탈리온은 상세한 사고 과정은 생략하고 천사에게 말했다.
“어설프게 일찍 나오는 순간, 어둠에 집어 삼켜질지니. 완벽을 해내지 못한다면 튀어나올 생각도 하지 말도록 전하거라.”
“네,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천사가 감격에 겨운 눈동자를 하고는 단탈리온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단탈리온은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는 천사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 * *
“몇 년이 걸리더라도 수련을 ‘완.벽.하.게.’ 마치고 오라고……?”
도미니온에게 단탈리온의 이야기를 전한 천사가 고개를 숙였다.
“네, 선배님.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신성력도 제거하고…….”
정말로.
그래도 괜찮은 걸까?
아니다.
어쩌면 이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
“…… 예상보다도 더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네?”
“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신 거야……!”
단탈리온 데스맨이라면.
탁기도 집어삼키고, 프린시펄리티의 악행도 막아 낸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방해만 되는 천사 따위…… 더는 있을 이유조차 없다는 뜻일지도 몰라…….”
그럴 수야 있나!
그런 건 주천사 도미니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예상보다 일정을 당기겠어. 당분간 나 찾지 마!”
“아! 선배님! 잠시만요!”
콰앙!
수련실의 문을 닫은 도미니온을 보며 수하의 최하급 천사가 중얼거렸다.
“…… 어설프게 일찍 나오면 더 큰일 난다고 하셨는데.”
최하급 천사의 우려 섞인 혼잣말이 수련실 문 앞에서 메아리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