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원치 않으면…….2021.12.05.
“무슨……, 일이죠?”
“아, 그게, 그러니까…….”
좋은 일이 아니라서 막상 이야기하려고 하니 난감해진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혹시 오늘 회장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어?”
“그건 왜…….”
“들은 거야?”
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지훈은 이혼의 이유가 필시 그것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일전에도 해인이 투자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참담했고 염치없는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 투자는 어렵지 않게 결정되었다. 엘브가 무너지는 건 신온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할 것이었다.
“혹시 그 일 때문에 이혼에 대해 생각한 거라면…….”
“아니에요. 물론 그 일 때문에 결론을 내린 건 맞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시작은 훨씬 전부터였어요.”
이런 걸 확인사살이라는 하는 걸까. 지훈은 스스로 얻어낸 처참한 결과물에 구정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들었긴 했는데…….”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 아까 아내의 방문 앞에서 느꼈던 상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 말처럼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단 쉬시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그랬지. 오늘은 많이 늦었다고 했지.”
비서에게 전화 따위 하지 말고 잠이나 잤어야 했나. 입안이 바짝 마르면서 몸에 힘도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나 물 마시러 가는 길이었는데…….”
“마셔. 내가 물도 못 마시게 하는 남자는 아니잖아.”
“그게…….”
“말해.”
“길을 막고 있어서요.”
“아!”
짧게 내지른 탄성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지훈은 곧장 방문 앞에서 물러났다. 문득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아무래도 평소의 저답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 이야기 하기로 했으면서 왜 한걸음에 달려왔을까. 방문 앞에서 이렇게 마주한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훈이 지나갈 길을 더 터주었다. 하지만 해인은 쉽사리 그 앞을 지나쳐가지 못했다. 사실 언제 이혼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부부였는데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모습이 못내 미안해진 까닭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았다. 피차 어떤 표정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잠시 그렇게 서로를 보았고 이번에도 지훈이 먼저 돌아섰다. * * * 물을 마시고 돌아온 해인은 침대에 누워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처음 그와 결혼하기로 했던 날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 결혼을 정말 할 거야?’
당시 자신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일곱 살이나 많은 그의 말투는 친절했지만 어린 저로서는 위압적이고 무서웠다. 그가 마치 거절을 바라는 것처럼 들려왔기에.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저로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기 힘들어요.’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계모와 여동생으로부터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 부차적인 이유였다. 실상은 그가 좋았었다. S 대학교 선배이자 신온의 상무인 그는 이쪽 업계에선 유명한 사람이었다. 차갑고 냉철한 리더십, 일에 있어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사업 능력까지 갖춘 남자. 아버지가 결혼 상대자로 그를 지목했을 때 뭔지 모를 환희와 해방감을 느꼈다. 비로소 지긋지긋한 집에서 나갈 수 있었고 평소 흠모했던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서. 스물넷. 졸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제 결혼은 나름 성공적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를 좋아해 홀로 외로웠던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던 것을 제외하면. 실상 그를 좋아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뭔가를 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나 여자들에게 시달리기 싫어서 한 결혼이라 했으니 혹시라도 저로 인해 불편해지는 상황이 될까 염려한 탓이다. 그렇게 물이 흐르듯 우리의 시간도 흘러왔다. 정략의 이유가 되었던 상황은 이제 오히려 정략을 깨야 하는 이유가 되어 있었다. 지훈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인생에 짐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지금껏 준비했던 것을 서서히 이뤄나갈 시점이기도 했다. 해인은 현재 청담동 부티크에서 일을 배우며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준비 중이었다. 남편의 회사나 아버지의 회사에는 발도 붙이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혼을 잘했다 생각할 날도 있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와 더 가까워질 것을 기대하며 그를 기다렸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고, 그 선을 넘어 그에게 부담을 주었던 여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뭔가를 기대하기엔 그는 지나치리만큼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지훈은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전부터라니? 도대체 왜. 피차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했던 결혼이었다. 이제 와서 원하는 것이 달라진 것인가. 해인은 자기 일을 잘하는 똑똑한 여자였다. 다른 여자들처럼 관심을 가져달라 보채지 않고 귀찮게 하지 않아 편했었다. 공식적으로 유부남이니 대외적으로 관심도가 줄어든 것도 만족스러웠다. 불필요한 말을 섞지 않으니 집으로 오는 마음이 가벼웠고 선을 지켜주는 해인이 마음에 들었었다. 본인 일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 바쁜 남편을 존중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3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이어오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전부터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을 해보았지만, 이혼을 원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종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일찍 퇴근을 했다. 그렇게 그녀와 마주 앉아 어제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평소 마시던 커피를 내린 해인은 지훈에게도 한잔을 건네며 소파에 마주 앉았다.
“어제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할 것 같아서.”
“네.”
“정말 장인어른과는 무관한 이유야?”
“무관해요. 그냥 내가 하고 싶었어요.”
결혼은 아버지가 이유가 되었지만, 이혼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어차피 정략에 의한 결혼이었으니 지훈을 원망할 생각도 없다. 냉정하긴 했으나 그는 신사적이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새어머니와 여동생을 피해서 한 결혼이었지만, 이제는 혼자 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젠 독립해서 내 삶을 꾸려가고 싶어요.”
“그 일이라면 굳이 이혼이 아니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이혼이에요.”
둘 다 이 결혼으로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건 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의 해인은 아닌 듯했다.
“돌이킬 여지는 없어?”
“없어요. 혹시 나를 설득하는 건가요?”
“지금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까. 힘든 고비라도 넘기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해서.”
“아니요. 나는 지금이 가장 좋아요.”
지훈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해인은 단호히 대답했다. 계모 밑에서 자라며 딱히 힘들지 않을 때가 없었기에 그녀의 그늘을 벗어난 지금이 가장 좋았다. 마주 앉은 시간은 길었지만 대화는 길지 않았다. 해인의 말을 들으며 지훈의 침묵이 길었던 까닭이다. 그는 해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이제 그녀가 이 결혼에서 원하는 건 자유뿐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다. 이혼의 과정은 순조로웠다. 지훈의 모친은 이혼을 환영했고 부친은 놀란 듯했으나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지훈이 법적 절차에 따라 이혼에 관한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했기에 해인의 입장에선 꽤 친절한 이혼이 되어가고 있었다. 변호사들의 대리출석으로 피차 법원에 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이혼의 절차가 완료될 마지막 밤이 되었다. 가로등 사이로 벚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저녁이라도 같이하자는 해인의 부탁으로 지훈은 이른 귀가를 했다. 그가 샤워하고 가벼운 옷을 갈아입는 순간에도 해인은 쉼 없이 요리를 이어갔다. 한참 후 지훈이 식탁 앞에 왔을 땐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무슨 반찬이 이렇게 많아?”
“제대로 된 식사 한번 같이 못 한 것 같아서요.”
“제대로 된 남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됐어. 원래 각자 알아서 시간 나면 먹기로 한 거잖아.”
“그래도 미안했어요.”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던 지훈은 문득 울컥해진다. 버리고 갈려니까 미안하긴 한가 봐?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또 그것에 화가 치밀었다. 버리고? 의미가 이상하잖아. 지금 내가 버림받는 건 아닌데. 내가 누구한테 버림받을 사람은 아니지. 그럼. 절대 아니고말고. 속으로는 마음이 복잡했지만 지훈은 평온한 얼굴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평소 좋아하던 잡채가 있었기에 가장 먼저 그쪽으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맛은……, 솔직히 별로였다.
“맛있네.”
이혼하는 마당에 굳이 솔직한 말로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다른 것도 먹어봐요.”
다른 것도 역시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먹는 만찬이 굳이 맛있을 필요는 없으니 딱히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대충 식사를 마치고 지훈은 와인을 가져왔다. 해인은 사과를 깎아 테이블에 얹고는 자연스럽게 잔을 받아 들었다.
“처음으로 같이 마시는 술이네.”
“두 번째……인데.”
“으음?”
“신혼 첫날밤. 같이 술 마셨어요. 아, 물론 지훈 씨는 한잔 마시는 중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갔지만.”
“그래. 기억이……, 나네.”
갑자기 회사에서 일이 생겨 어쩔 수가 없었다. 바빠서 신혼여행 갈 겨를도 없어 서울의 한 호텔에서 1박을 하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었다.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미안한 일이 많았다. 남편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니 떠나는 해인을 잡을 명분도 없는 것이다. 그저 떠나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 지훈은 멋쩍은 표정으로 해인을 향해 술잔을 기울였다. 별일 아닌 듯 해인 역시 마주 술잔을 기울였다.
“혹시 나랑 살면서 불행했어?”
“그럴 리가요.”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사생활만큼은 철저하게 보장받고 있었다. 대화는 늘 평이하게 이루어졌고 대부분은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감정들의 나열이었다. 그 적당한 거리감이 결혼생활의 평화를 이끌어갔다고 볼 수 있다. 벽을 치진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벽이었고 더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와도 같았기에 그를 좋아하면서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더 구차해지기 전에 헤어지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린 것도 그 이유였다.
“우리 마지막 밤이네.”
“…….”
우리, 그리고 밤이라고 하니 의미가 조금은 오묘하게 들려왔다. 수없이 많은 밤이 지나갔지만 딱히 의미 있는 밤은 없었다. 아마 오늘 밤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해인은 소주를 마시듯 단숨에 와인을 들이켰다.
“술을 잘하나? 무슨 와인을 물 마시듯 마셔?”
“오늘은 그냥 마시고 싶어요. 아! 그리고 위자료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한남동에서도 특히나 고가인 이 아파트까지 내 명의로 해줬는데…….”
“그 이야긴 됐어. 나를 무능하거나 파렴치범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면 내가 주는 대로 받아. 더 주고 싶은데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돈이 거기까지야. 그러니 내 자존심 세워준다 생각하고 그냥 받아.”
자기 자존심까지 내세워서 저를 챙겨주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혼마저도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깔끔했고 또한 신사다웠다.
“염치없지만 고마워요.”
“고맙긴. 겨우 그 정도로.”
“본가로 들어갈 생각인가요?”
“아니. 잠깐 호텔에서 지내려고. 해외 출장이 길어질 것 같아서. 한 몇 년 나가 있을 생각도 있고.”
이상한 남자였다. 이혼을 말한 건 저인데,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른 것을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지려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제 욕심이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마음에 숨긴 해인은 말없이 지훈을 응시했다. 직업적으로 관찰해보자면 그는 슈트가 잘 어울리는 서구적 체형이었다. 검은색이나 네이비색을 즐겨 입지만 색으로 표현하자면 정열의 빨간빛이 어울리는 남자다. 신사적인 매너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만 강렬하고도 열정적인 본능이 다분한 기질의 남자일 것이다. 그런 남자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사는 것은 얼마나 무감한 일이었을까. 결혼 전 잠깐 만났다는 여자에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지금과는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 해인의 입가로 자조적인 미소가 스쳤다. 어느새 두 사람은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와인이 더 필요할 것 같군.”
“그럼 난 과일 좀 더 가져올게요.”
해인이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채 한 걸음도 못 가 휘청하며 몸이 비틀렸다. 반사적으로 다가간 지훈이 해인을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은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아요.”
해인은 가까스로 숨을 뱉어내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바라본 그의 눈동자가 유독 뜨겁게 느껴진다.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지훈의 팔에서도 열기가 전해져왔다. 그 열기와 함께 제 몸도 뜨거워지는 것만 같다.
“이제 놔주셔도 될 것 같은데…….”
“그래야 하는데…….”
놓기가 싫다. 그녀를 안은 것만으로도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열망이 솟구치는 것만 같다. 순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몇 번 이런 감정이 들었다. 어쩌면 헤어짐의 아쉬움 때문이려니. 그냥 그렇게 치부하고 넘겼었다. 이렇게 품 안에 두고 그녀를 바라보니 평소에도 예뻤던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 그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면 우스운 일일까. 이렇게 이혼으로 끝날 결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기듯 스파크가 일었다. 해인의 입술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원치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