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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어젯밤은……. (3/92)

03. 어젯밤은…….2021.12.09.

물러설 것이라는 듯 지훈은 잠시 뜸을 들였다. 빛을 잠식하는 어둠이 그러하듯 세상의 모든 검은색은 빛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훈은 검은색도 빛나는 것을 보았다. 떨리는 듯 흔들리는 해인의 검은 눈동자가 그랬다. 시선은 홀리듯 붉은 입술 쪽으로 향했다. 가슴은 이미 뜨거워졌지만 해인이 원치 않는다면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시 기다렸음에도 입술은 멀어지지 않았다. 달콤한 와인 향기가 어우러지던 그때 해인이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은 그렇게 빛났고 두 사람은 그 빛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살포시 입술이 맞물리고 거친 호흡들이 오고 갔다. 열기가 더해갈수록 더 큰 욕구와 함께 몸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순식간이었다. 지훈은 해인의 몸을 안아 올려 침대가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도착해 다시금 거부할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또렷이 자신을 응시해오는 시선은 수줍으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멈출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지나버렸음을 피차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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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49612424353.jpg“어젯밤은 즐거……웠……어요.”

음…….

16549612424353.jpg“어젯밤은 없던 일로 해요.”

아니, 둘 다 이상해.

16549612424353.jpg“어젯밤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해인은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연신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훈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 하! 진짜 미칠 노릇이다. 오늘 이별할 남녀가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지난밤 자신을 유혹했던 지훈의 얼굴을 떠올린 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장 한 번 바라보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무릎에 얼굴을 묻기도 하고. 물론 그럴 때면 여지없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인이 일어났을 때 지훈은 옆에 없었다. 문밖에서 계속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거실에 있는 것 같았다. 연차를 냈다는 말은 없었는데 출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저 남자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쿨하게,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은데 그게 될까? 해인은 제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듯 쥐어짜다 나중엔 콩콩 쥐어박았다. 구체적으로 지난 밤 일에 대해서 말하면 오히려 더 어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16549612424353.jpg‘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갑자기 날씨 이야기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을까? 아! 몰라 몰라. 진짜 미쳤어. 주해인. 어쩌자고 넘어가 버린 거야. 대체 어쩌자고. 솔직히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혼을 결심하긴 했지만 좋아하는 남자였고 마지막이니 부부로서의 추억 하나 즈음은 남기고 싶었다. 물론 유혹을 뿌리치기엔 지훈의 모습이 지나치게 매혹적이기도 했다. 그윽한 목소리며 뜨겁게 타오르던 눈동자며 탄탄한 팔근육까지. 그가 저를 지그시 응시했을 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한 번도 그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이글거리는 듯한 그 눈동자를 혼란스럽게 바라보던 그때 점령하듯 귓가를 파고들던 목소리.

16549612424383.jpg‘원치 않으면…….’

그 말을 들었을 땐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그 아찔함에 그저 눈을 감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명백히 아니었다. 오랜 시간 그를 좋아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6549612424353.jpg“하아!”

신기루처럼 찾아왔던 지난 밤이 꿈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이불 속에 있을 수도 없고. 일단은 샤워하고 옷부터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이불을 살짝 들쳐 제 몸을 바라보는데 가슴 위쪽이 울긋불긋.

16549612424353.jpg“으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이 질러졌다. 진짜 미쳤나 봐. 그때였다.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이미 문을 연 지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문 열고 노크하는 법도 있나. 혹시나 비명을 지르는 제 모습을 봤을까 싶어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16549612424383.jpg“아, 노크했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16549612424353.jpg“그……, 그럼 기다렸어야죠.”

16549612424383.jpg“미안. 아직도 자는 줄 알고.”

자는 줄 알았다고? 그럼 비명을 지르는 건 못 봤다는 말인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16549612424353.jpg“이……, 이제 막 일어났어요.”

16549612424383.jpg“씻고 나와. 모닝커피 내려놨어. 어제 남은 반찬으로 간단하게 밥도 차려놓았으니까 주방으로 와.”

지훈이 피식 웃으며 문을 닫고 나갔다. 저 웃음의 의미가 뭘까. 설마 본 거야? 그걸 봤으면 웃기기도 했겠지.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질러댔으니 엄청 웃겼을 것이다. 해인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절규에 가까운 탄식을 하고 말았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해인은 문밖을 나서기에 앞서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부터라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젯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했던 여느 날처럼 대면하면 되는 것이다. 할 수 있어. 주해인.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주방으로 가기 위해 거실을 지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가엔 미소까지 머금었다. 빙구 같은 모습을 들켰다고 해서 고개도 못 들면 더 바보처럼 보일 거야. 해인은 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탁 맞은편에 있던 지훈이 웃으며 자신을 반긴다. 원래 잘 웃지 않는 남자인데 오늘은 별일이다. 두 번씩이나 웃음을 날려주시고.

16549612424353.jpg“일찍 일어났나 봐요?”

됐어. 자연스러웠어. 그렇게 스스로 만족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앉았다.

16549612424383.jpg“그래. 해인 씨는 늦었네?”

16549612424353.jpg“피곤했나 봐요.”

16549612424383.jpg“그럴 만도 하지. 이해해.”

뭐가 그럴 만하고 뭘 이해해? 대놓고 지난밤 때문이라는 것 같아 살짝 민망해졌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야겠다.

16549612424353.jpg“커피 냄새가 좋네요.”

16549612424383.jpg“일단 밥부터 먹어. 다 식겠다.”

고개를 끄덕인 해인이 눈앞에 차려진 밥과 반찬들을 바라보았다. 죄다 자신이 만든 음식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새엄마에게는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이 남자가 이렇게 자상한 면도 있었나. 새삼 이제야 알게 된 그의 면모에 기분이 묘해졌다. 지훈은 잠잠히 해인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깐 왜 그러고 있었을까. 머리를 쥐어박으며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어젯밤 일이 많이 당황스럽긴 하겠지. 그렇다고 귀한 머리를 쥐어박을 것까지야. 실없이 웃음이 터지는데 그 순간 해인과 눈이 마주쳤다.

16549612424353.jpg“왜 웃어요?”

16549612424383.jpg“귀여워서.”

생각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지훈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 이별인데 한 번 즈음은 솔직해져도 상관없겠지.

16549612424353.jpg“네?”

16549612424383.jpg“잘 먹으니까 귀여워. 귀여워서 웃었어. 어서 먹어.”

해인의 두 볼이 붉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남자를 보는 것이 어색했다. 막상 헤어지려고 하니 그동안 무심했던 것이 미안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은근한 설렘을 느끼면서도 해인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제 이 남자가 집을 나가면 우린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어젯밤도 이제 추억으로만 남게 되겠지. 마지막인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 그가 내린 커피를 들고 마주 앉았다.

16549612424383.jpg“어제…….”

16549612424353.jpg“신경 쓰지 말아요.”

행여나 지훈이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 해인이 먼저 당차게 말했다.

16549612424383.jpg“으음?”

16549612424353.jpg“그러니까 내 말은 부담 갖지 마시라고요. 어제는 우리 둘 다 술을 마시기도 했고……, 뭐, 아무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냥 우리의 마지막 추억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이 정도면 불편하지 않게 들렸을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단 말은 했는데 막상 찾아오는 민망함이 커서 도저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다. 아! 이런 불편함은 딱 질색인데…….

16549612424383.jpg“마지막 추억이라!”

지훈은 자신의 눈동자를 피하는 해인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떨릴 만큼 말을 더듬으면서도 내용은 쿨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부러 담담한 척 애쓰는 모습이라니……. 지훈은 픽 웃으며 원래 하려던 말을 했다.

16549612424383.jpg“어제 장인어른께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내가 안 한 것 같아서…….”

16549612424353.jpg“아……!”

해인의 입에서 탄식처럼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16549612424383.jpg“이혼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냐고 하셔서 나는 해인 씨 뜻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했어.”

16549612424353.jpg“네. 잘했어요.”

16549612424383.jpg“그래. 그리고 나도…….”

16549612424353.jpg“…….”

16549612424383.jpg“추억으로 남길게. 기왕이면 좋은 추억으로. 덧붙이자면 술기운에 실수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술기운 때문이 아니야. 어젯밤 나는 진심이었어.”

16549612424353.jpg“그, 그래요. 나도 뭐, 진시……임, 아, 그……, 근데 생각해 보니까 욕실에 물을 안 끄고 나온 것 같아요. 내가 왜 이러지? 제정신이 아니네?”

급하게 일어선 해인이 안방으로 가려 했다. 전신에 밀려오는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지훈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해인은 몸에 전류라도 일어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손목이 잡히니 또다시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며 눈앞이 아찔해진다.

16549612424383.jpg“잘 살아. 해인아! 혹시나 이곳에서 나쁜 기억이 있었다면 다 잊어버리고.”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던 진지하고 온화한 음성. 심지어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손목이 허전해진다.

16549612424383.jpg‘해인아!’

설마 결혼 전 그 한 번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학교 행사였던 홈커밍데이에 그는 지금처럼 이름으로 저를 불렀었다. 해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쁜 기억은커녕 좋은 기억만 남게 생겼다. 왜 당신은 마지막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냉정하고 모질었다면 잊기라도 편할 텐데……. 길었던 짝사랑과 이별을 고하게 되니 왠지 눈물이 차오른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 안방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잠깐 눈물을 흘렸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 . . 해인이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을 땐 지훈은 떠나고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공허했고 그 텅 비어 버린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며칠 동안은 하늘 한번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이면서도 도저히 혼자 같지 않은 시간이 한 달은 족히 이어졌다. * * * 한 달 후. 해인은 제 손에 들린 초음파 사진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 하룻밤으로 아기가 생길 줄이야. 열기에 취한 와중에도 지훈이 피임은 확실히 챙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소중히 환영받아야 마땅한 이 귀한 생명에게 기쁨과 고마움의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그저 당황만 하고 있었다. 종일 하루를 고민하던 해인은 지훈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16549612424383.jpg‘술기운 때문이 아니야. 어젯밤 나는 진심이었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단 한 번의 만남도, 심지어 통화조차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통해 이혼 서류가 구청에 접수되었다는 것을 연락받은 것이 다였었다. 사흘을 고민한 그녀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환영할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로서 아이를 지울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단지 그에게 알릴지 말지가 고민이었다. 그 고민도 길지는 않았다. 어쨌든 생물학적 아빠인 사람이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실이지 않겠는가. 이미 남남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사람이지만 그렇더라도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연락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용기를 내야 했다. 해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연락처에 입력된 지훈의 번호를 지그시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9612424383.jpg-여보세요.

16549612424353.jpg“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16549612424383.jpg-괜찮아. 근데 무슨 일이지?

16549612424353.jpg“만날 수 있을까요?”

16549612424383.jpg-나 지금 공항 가는 길인데…….

16549612424353.jpg“언제 와요?”

16549612424383.jpg-서너 달 걸릴 거야. 리서치도 해야 하고 수출계약도 맺어야 하고. 가서 할 일이 좀 많아.

16549612424353.jpg“꼭 할 말이 있어요. 내가 지금 공항으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해인은 즉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널을 뛰었다. 이렇게 알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지만 전화로 하기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였고 서너 달 후는 너무 늦었다. 택시에서 내린 해인은 빠른 걸음으로 출국장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순간 익숙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를 부르려 할 때였다. 그 남자의 옆에 한 여자가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한눈에 그녀가 결혼하기 전 잠깐 만났던 모델이자 한강 그룹의 막내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이 정지한 듯 굳어버렸다. 설마 두 사람이 같이 떠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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