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한밤중에 전남편이. (4/92)

04. 한밤중에 전남편이.2021.12.12.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여자가 자연스럽게 지훈의 팔짱을 끼는 모습이 보였다. 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고 말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그 즉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택시를 잡아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집에 도착한 후였다. 택시 안에 있을 때 지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16549612618187.jpg‘어젯밤 나는 진심이었어.’

그래. 그 밤은. 그리고 그 밤은 이미 지나고 없는 것이다. 다 잊어버리라고 했던 말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해인은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

16549612618192.jpg‘주해인.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어떤 기대감을 안고 공항까지 달려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고 아빠라는 남자에게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정작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다. 무엇을 바랐을까. 아이 아빠로서의 책임, 그 이상을 기대했던 걸까. 솔직히 그가 여자와 함께 떠나는 것은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이미 이혼한 사이니 상관할 일이 아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라는 서운함이 얼핏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또한 우습지 않은가. 해인은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혼을 원했던 건 자신이었고 아이가 생겼더라도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지훈이 알아야 할 일이긴 하지만 굳이 지금일 이유는 없었다. 아이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굳이 지훈을 떠올릴 이유도 없었다. 우린 이미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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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몸도 나른하고 마음도 힘들었지만, 해인은 탈피를 하듯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다. 무럭무럭 자라야 할 태아를 위해서도 그것이 최선이었다. 저녁을 먹은 직후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던 우영과 소연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혼 소식을 듣고 나름 위로를 해주고 싶었던 모양인지 맥주를 잔뜩 사 와서는 치킨까지 시키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16549612618201.jpg“집 진짜 좋다. 전망도 좋고.”

16549612618192.jpg“진즉 초대할 걸 그랬어.”

16549612618201.jpg“너도 바쁘고 나도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지.”

넋두리처럼 내뱉은 소연이 힐끗 해인의 눈치를 살핀다. 이혼한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처했다. 남편의 집안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이혼을 선택했다고 들었다. 어차피 사랑 없는 정략결혼이었으니 이제라도 진짜 사랑을 찾아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막 이혼한 친구에게 축하를 건네기도 애매했다.

16549612618192.jpg“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괜찮아.”

16549612618201.jpg“그럼 다행이고.”

소연이 건배나 하자는 듯 맥주캔을 들어 올릴 때였다. 그녀의 가방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 통화를 하는가 싶더니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선다.

16549612618201.jpg“해인아! 나,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16549612618192.jpg“지금? 자려고 준비까지 하고 왔잖아.”

16549612618201.jpg“미안. 다음에. 우영아! 너 갈 거면 지금 가자. 가는 길이니까 나 좀 내려 줘.”

16549612646697.jpg“됐다. 나는 더 있다 갈 거야.”

16549612618201.jpg“그래. 그럼. 나는 먼저 간다.”

그렇게 소연이 가고 우영이와 단둘이 남았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우영이와는 꽤 오랜 친구였다. 그의 엄마와 자신의 엄마가 친구여서 어릴 때부터 이모라 부르며 알고 지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영의 엄마는 저를 아껴주었고 새엄마의 히스테리를 피해 집에서 도망칠 때면 자고 가라며 방도 내주셨다. 엄마처럼 따스했던 그분의 품의 아니었다면 정말 견뎌내기 힘들었던 유년이 되었을 것이다.

16549612646697.jpg“나, 너희 집 회사 다니고 있다.”

16549612618192.jpg“뭐? 언제부터?”

어릴 때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던 해인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 아버지 회사에? 우영은 법학부를 졸업했고 부친은 유력 로펌의 대표님이셨다. 당연히 가업을 이어받을 줄 알았는데 다 기울어가는 패션 회사에 입사하다니 이게 무슨 일일까.

16549612646697.jpg“삼 개월?”

맥주캔을 빙빙 돌리던 우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16549612618192.jpg“네가 패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16549612646697.jpg“이거 왜 이래? 패션 회사가 단순히 옷만 만드는 건 아니잖아. 관리도 해야 하고 브랜드 마케팅도 해야 하고 법률자문도 필요하잖아.”

우영이 아무 이유 없이 입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16549612646697.jpg“됐고, 우리 팀장님이 너 꼭 데려오래. 이번에 특별 기획으로 화보 촬영을 맡으셨는데 스타일리스트로 네가 꼭 필요하대.”

16549612618192.jpg“특별 기획?”

16549612646697.jpg“응. 나도 어떤 주제인지는 아직 모르는데, 꼭 너하고 하고 싶다더라.”

16549612618192.jpg“너네 팀장님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16549612646697.jpg“모르긴 왜 몰라. 네 디자인이나 스타일링 은근 좋다고 소문났다던데? 부티크에서 일했던 것도 알고 계시더라고.”

우영이 표정을 관리하며 담담히 덧붙였다. 사실 팀장은 핑계고 해인의 부친이 지시한 일이었다. 해인의 부친인 주 사장이 우영을 채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녀를 회사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난영 모녀의 갑질로 회사가 쑥대밭이 되기 전까지는 딱히 해인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16549612618192.jpg“소문은 무슨.”

해인이 싱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충 이해는 되었다. 사실 일주일 전 제발 회사로 와달라는 아빠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프리라도 좋으니 어떤 일이든 맡아달라고. 우영이 이러는 것도 결국 팀장의 뒤에 아빠가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이러시니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무작정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이쯤 되면 새엄마와 여동생이 회사에 발도 붙이지 말라고 경고라도 할 법한데 어쩐지 잠잠하다. 하기야 갑질 논란 이후 두 사람 모두 몸을 사리고 있는 터라 이제 회사 일은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16549612646697.jpg“그나저나 좀 야윈 것 같다? 마음고생이라도 한 거야?”

16549612618192.jpg“그런 거 아냐.”

16549612646697.jpg“술은 왜 안 마시는데? 같이 한잔하려고 했는데…….”

16549612618192.jpg“그, 그냥. 요즘은 술이 안 들어가.”

아직 그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친한 친구인 소연에게도. 이제 7주에 접어들었는데 몸이 살짝 나른한 것 빼고는 큰 변화는 없었다. 입맛이 조금 떨어진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임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16549612646697.jpg“너는 왜 이혼했냐. 네 아버지 회사 그렇게 됐다고 나가래?”

16549612618192.jpg“아냐. 그런 사람. 그냥 성격 차이야.”

16549612646697.jpg“왜? 남자랑 사는 것 같아서 싫대?”

16549612618192.jpg“응.”

해인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어이없는 건 오히려 우영이다. 친구가 좀 뻣뻣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그게 이혼 사유는 아닐 것이다. 우영이 나름 진지하게 되물었다.

16549612646697.jpg“나는 상관없는데 이제라도 나 어때?”

16549612618192.jpg“정신 차려. 나 이혼녀야.”

16549612646697.jpg“이혼녀니까 버프 같은 거 있지 않을까?”

16549612618192.jpg“장난이 심하다?”

16549612646697.jpg“나는 너네 집 회사 망해도 너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 나한테 올래?”

16549612618192.jpg“이 새끼가 어디서 남자 흉내를 내고 있어. 우리 어렸을 때 내가 네 새하얀 궁둥이도 봤거든? 너는 네 궁둥이 본 여자한테 그러고 싶냐?”

갑자기 등장한 궁둥이에 우영의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기억조차 하기 싫은 어떤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여섯 살 때였었나.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복이 엉덩이에서 밀린지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아주 가물가물한 오래된 기억이다.

16549612646697.jpg“진짜 궁금한데…….”

16549612618192.jpg“…….”

16549612646697.jpg“내 궁뎅이가 아직도 기억나?”

16549612618192.jpg“응.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 어찌나 토실토실하던지…….”

해인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괜히 물었다 싶은 우영의 귓불이 붉어졌다. 깨복쟁이 친구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본 적도 없는 해인의 궁둥이를 같이 봤다고 할 수도 없고. 이게 남자랑 여자랑 같은 급도 아닌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싶은 우영이 잔뜩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16549612646697.jpg“나, 여기서 자고 간다.”

16549612618192.jpg“장난하지 말고 얼른 가.”

16549612646697.jpg“너도 우리 집에서 많이 잤잖아. 내 흑역사는 기억하고 그건 잊어버렸냐? 너도 우리 집에서 많이 잤으니까 나도 잘 거야. 방도 많잖아.”

16549612618192.jpg“웃기지도 않아. 진짜.”

자리에서 일어난 해인이 우영에게로 다가가 사정없이 어깨를 후려치며 말했다.

16549612618192.jpg“차우영. 나 샤워하고 나오기 전에 가라! 그때까지 안 가고 있으면 가만 안 둔다.”

16549612646697.jpg“으윽. 아파. 아프다고. 살살 좀 때려.”

우영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엄살을 부렸지만 해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우영이 화풀이를 하듯 맥주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셔댔다. 방도 많으면서 한번 재워주는 게 뭐 어때서.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진짜 너무하네. 우영이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놓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현관으로 가서는 신발을 신발장 안으로 감추고는 이내 비어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에 부드러운 이불. 하룻밤 잠들기엔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았다. * * * 샤워 가운을 걸친 해인이 거실로 나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가보니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살짝 문을 열어보았는데 엘리베이터 앞엔 아무도 없었다. 이미 갔구나 생각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이제 점점 배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니 임부복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잉태했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축하 한마디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럴 게 아니라 자축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곧장 드레스룸으로 가서는 서랍장을 열었다. 거기엔 한 번도 입지 않은 빨간 슬립이 있었다. 지훈이 선물해 준, 아니 정확히는 지훈의 비서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1년 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며. 선물을 받았을 당시에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나중에 물어보니 비서가 알아서 챙겨 주었고 자신은 대충 옷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선물한 사람이 내용물도 모르고 있어서 얼마나 서운했던지.

16549612618192.jpg“이게 아직도 있었네. 한번 입어볼까?”

어차피 앞으로도 입지 못할 것 같으니 혼자 기분이라도 내야겠다. 샤워가운을 벗은 해인이 슬립을 걸쳐 입었다. 고혹적인 붉은 빛이 조명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거울 앞에서 멋들어지게 한 바퀴를 돈 해인이 방을 나왔다. 곧장 냉장고로 가서는 와인 잔에 포도 주스를 담아 테라스로 나갔다. 7층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홀로 보기엔 아까울 만큼. 순간적으로 밀려든 외로움에 와인을 마시듯 포도 주스를 밀어 넣었다.

16549612618192.jpg“아가야. 이건 술이 아니라 포도 주스야. 엄마는 기분만 낼게.”

아직 태명도 지어주지 못해 번번이 아가라고 부르는 것이 못내 미안하다. 지훈이 있었다면 지어줬을까. 괜스레 떠나고 없는 사람을 떠올린 해인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테이블 위엔 치킨 몇 조각과 맥주와 과자 부스러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치우긴 해야 하는데 막상 앉아 있으니 잠이 솔솔 밀려온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가 넘었다. 조금 쉬었다 치우고 자자 싶어 조명을 어둡게 낮춘 후 소파에 몸을 기댔다. 태명을 뭐로 할까. 축복이, 보배, 사랑이 등등. 이런저런 이름들을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그 와중에 얼핏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올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잘못 들었겠거니 했다. 눈도 뜨지 않고 다시 잠에 빠져드는데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 가까워진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통로를 지나 체격 좋은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건장한 체격이 전남편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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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다. 포도 주스 마시고 취해서 헛것이 보이나? 아니면 어두워서? 헛것으로 보이는 그 형체를 향해 해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16549612618192.jpg“귀신이면 썩 물러가고 사람이면…….”

16549612618187.jpg“…….”

16549612618192.jpg“아! 사람이어도 썩 물러가야겠네. 여긴 내 집이니까.”

16549612618187.jpg“저기, 일단 나 귀신 아니고 문이 열려 있…….”

16549612618192.jpg“하아! 귀신이 말도 하네. 그래. 귀신도 입은 있으니까.”

중얼거린 해인이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한밤중에 전남편이 집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버젓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봤는데.

16549612618192.jpg“바보야. 주스 마시고 취하면 어떡하냐고. 그 나쁜 놈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분명히 그럴 리가 없는데……. 귓가에 머무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순간 피식 헛웃음이 터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주해인. 그냥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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