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절대 안 놓습니다. 이제 다시는.2021.12.23.
해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감춰둔 진실을 일깨웠다. 기가 막힌 지훈이 매섭게 난영을 쏘아보았다. 그 매서운 시선에 난영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사위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이혼까지 한 사람이 왜 이곳에 있으며, 왜 저렇게 해인의 일에 열을 올리는 건지 모를 일이다.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으니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
“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자네, 너무 흥분했어.”
“맞아요. 형부. 이혼까지 하셨으면서 남의 일에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주춤거리며 서 있던 세나가 끼어들었다. 남의 일이란 말에 지훈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이 왜 이렇게 서운하게 들리는 것일까. 기분이 상한 지훈이 세나를 향해 거칠게 쏘아붙였다.
“바보야? 남이라면서 왜 아직도 내가 네 형부야!”
세나가 입을 삐죽이며 난영의 팔을 붙잡았다.
“엄마. 가자. 다음에 다시 오…….”
“다음에 다시 오면 주거침입으로 고소할 거니까 다시는 안 오는 게 좋을 거야.”
경고하듯 내뱉은 지훈이 말없이 서 있는 해인을 바라보았다.
“나, 월세 내고 당분간 여기 머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외부인 오는 거 질색이니까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고.”
그 말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두 모녀는 결국 간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해인은 부서진 화분을 살폈다. 지훈과 눈을 마주하기도 민망하고 스노우 사파이어가 걱정되기도 하고. 뿌리가 드러나긴 했지만, 흙이 묻어 있으니 옮겨 심으면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집에 빈 화분이 있으니 거기다 옮겨 심어야겠다. 지훈은 자신이 아끼는 화분이라고 했지만 아마 이름도 모를 것이다. 이 상황이 부끄럽고 민망하면서도 제가 당하지 않게 도와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조심조심 화분을 정리하는데 길쭉하고 우람한 손이 불쑥 다가온다. 손끝으로 그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손대지 마. 그러다 다쳐.”
걱정이 가득 담긴 조심스러운 목소리. 해인은 그의 다정함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괜찮아요. 금방 치워요.”
“맞으면서…….”
“…….”
“자란 거야?”
혹시나 저로 인해 묵혀둔 상처가 드러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면서도 지훈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은 의외로 쉽게 들려왔다.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그랬어요.”
“힘들었겠네.”
무거운 한숨이 이어졌다. 너는 이렇게 자랐었구나. 그래서 피난처를 찾아 나와 결혼을 했었고. 지훈은 해인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해졌다.
“견딜 만했어요.”
지훈의 걱정과 달리 해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 어린 해인은 이미 자랐고 지금은 새엄마가 딱히 두려운 존재도 아니었다.
“내가 간섭해서 불쾌했어?”
“아니요.”
쪼그리고 앉은 해인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담담히 대답했다. 이런 가정사를 들킨 것이 좋을 리는 없지만 이런 것으로 자존심을 세우기도 싫었다.
“그럼 내가 너무 심했나?”
“그런 것 같기는 한데…….”
해인의 동의에 지훈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해인이 배시시 웃으며 다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속은 시원했어요.”
“그래. 그럼 됐어.”
“언제부터 들은 거예요?”
“들어오는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어.”
세나가 고래고래 악을 쓴 것부터 들은 듯했다. 화분이 깨지는 소리에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묻혔을 것이고.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어요.”
“들어올 때 초인종을 눌러야 했나?”
“그건…….”
“습관이 안 돼서 힘들 것 같아.”
네 맘대로 할 거면 왜 물어봤니? 해인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지훈을 응시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당당함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한 남자의 모습이 한편으론 부러웠다. 자신이 저렇게 했더라도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엄마와 세나를 도망치듯 나가게 한 것은 그가 힘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말의 양심도 자존심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근데 벌써 들어온 거예요?”
“아냐. 저녁에 수출 관련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다시 나가야 해. 두고 온 자료가 있어서 다시 가지러 왔어. 혹시 내가 다시 와서 불편해?”
“아, 음. 일단 치우던 거나 마저 치워야겠어요.”
해인은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전남편이 집에 와 있는데 불편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저 남자는 왜 당연한 것을 물어볼까 생각하며 천천히 깨어진 화분 조각을 집어 들었다.
“여기 다 치우고 가라고 할 것을 그랬나?”
지훈이 해인의 손에 들린 조각을 조심스레 뺏으며 묻는다.
“아녜요. 1초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그럴 것 같아서 그냥 보냈어. 이건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흙 담을 것이나 가져와.”
그의 손이 간지럽게 부딪혀 온다. 고작 손가락 몇 개 닿았을 뿐인데 몸 전체가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흔적처럼 자리한 그 날 밤의 터치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급히 일어난 해인이 도망치듯 뒤 베란다로 향했다. 잠시 진정을 한 후 흙을 담을 비닐봉지를 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실로 돌아왔다. 뒤처리는 지훈이 담당했다. 원래 이렇게 집안일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별일이다. 옆에 앉아 바닥을 쓰는 지훈을 보는데 자꾸만 뭔가가 가슴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해인은 애써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모른 척했다. . . . 그날 밤. 다시 집을 나선 지훈은 해인이 잠든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괜스레 몸이 피곤하고 무거운 탓에 해인은 일찍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그는 또 나가고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불편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인 줄 알면서도 해인은 뭔가가 아쉬웠다.
* * * 지훈은 잠깐 짬을 내 평창동 본가로 향했다. 독립한 이후로는 거의 발길을 끊었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들렀다. 그런 지훈을 보는 엄마 애란은 서운한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녀가 노란 봉투에 담긴 서류철을 아들에 내밀었다.
“이게 그렇게 급했니? 평소엔 오지도 않더니.”
“어머니가 너무하셨죠. 외할버지께서 제 몫으로 남겨주신 주식인데 어머니가 너무 오래 갖고 계셨어요.”
“이거 믿고 집까지 네 처에게 준거야? 내가 그 많은 위자료에 동의한 건 집까지 덜컥 넘겨줄지 모르고 한 말이야.”
“왜 이러세요. 돈도 많으신 분이.”
“어머. 아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돈은 가질수록 갖고 싶은 거야.”
“그러다 돈에 파묻혀 못 나오시는 수가 있어요. 돌아가실 때 가지고 가실 것도 아니시면서 너무 돈, 돈 하지 마세요.”
“하! 내 아들이라도 어찌나 웃기신지…….”
애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지훈은 봉투를 열어 서류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지훈이 서류를 자신의 가방에 넣을 때였다. 애란이 상큼하게 웃고 있는 여자 사진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여자 어떠냐?”
“이혼하자마자 또 시작이세요? 제발 포기란 것 좀 배우세요. 여자 관심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고애란 여사님!”
“이보세요. 늦둥이 아드님. 아드님 아버지께서 낼모레면 일흔이시거든요. 더 늦기 전에 손주는 안겨 드려야지요. 손주 보고 싶어 하는 네 아버지 생각은 안 하시나요?”
“거기까지는 미처…….”
“이런 인정머리 없는 놈.”
“그건 어머니 닮은 것 같고요.”
평소 잔정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애란의 말문이 막혔다. 아들놈들 키워놓아 봐야 소용없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고.
“그러게 적당히 태어났으면 좀 좋니? 청담동 뚜쟁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서 나도 미치겠다고 정말.”
“그러게 적당히 좀 빚으시지 뭘 이렇게 잘나게 빚으셔서 그 고생을 하십니까.”
“그렇게 잘나서 이혼은 왜 당해? 네가 뭐가 부족해서.”
“당한 게 아니라 서로 동의하에 한 겁니다.”
“해인이가 먼저 하자고 했잖아. 그럼 당한 거지.”
“…….”
“너 설마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예?”
“그 있잖아. 밤에 그거. 그 문제가 아니면 네가 이혼을 왜 당해? 내가 진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온다.”
“그거 어떠세요? 다 좋은데, 밤에 그게 문제라고 소문내는 거.”
기가 막힌 건 지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렇다고 그게 문제냐니, 말이 돼? 이혼은 서로 함께 결정한 일이었는데 왜 이혼을 당했다고 하는 건지…….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참 이상한 정신세계를 갖고 계신다.
“그럼 그냥 수빈이하고 결혼해. 재계 17위나 하는 한강 그룹의 딸이 네가 좋다잖아. 오 회장이 수혁이보다 수빈이를 더 예뻐한다던데 잘만하면 그 회사 네가 꿀꺽할 수도 있어. 오 회장이 어려서부터 너를 눈여겨본 것도 사실이고. 이번에 둘이 미국도 같이 갔다면서?”
애란의 목소리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자식이 둘인 것도 아니고 달랑 하나인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다시 결혼을 시키려면 살살 달래는 수밖에.
“수빈이는 그냥 동생이에요. 공항에선 우연히 만난 거고.”
“살다 보면 여자로 느껴지기도 하겠지.”
“여자는 관심 없고요.”
“관심 가져. 애지중지 키워놨으면 나한테도 돌아오는 게 있어야지. 이번처럼 밑지는 장사는 한 번으로 족해.”
“정말 저 팔아먹으려고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신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되묻는 애란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저렇게 잘난 아들을 대기업의 딸이 죽고 못 산다고 한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이혼할 날만 기다렸다는 말도 있고.
“우리 고 여사님. 참 이제 대놓고 너무하시네요.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내가 나만 좋으라고 이러니? 다 좋자고 하는 말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기왕이면 대기업 딸이 좋다는 말이고.”
“오늘따라 장난이 심하시네요. 멀쩡한 아들을 고자까지 만들고. 더 할 이야기 없으시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지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태도에 애란도 심통이 났다.
“그 서류 다시 돌려 줘. 넌 아직 받을 자격이 안 되는 것 같다.”
“전 제 수중에 들어온 것은 절대 안 놓습니다. 이제 다시는.”
지훈이 서류를 들고 유유히 본가를 나섰다. 돌아오는 내내 이혼을 당했다는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해인은 분명 제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정작 어머니는 제 탓이라고 한다. 설마 정말 자신이 문제라서 이혼을 당한 건가. 완벽한 남자인 내가 왜? 자유를 원하는 그녀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고 한 번도 구속하지 않았으며 재정적으로도 넘치게 주었었다. 그 정도면 완벽함을 넘어 박애를 실천한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자신이 왜 문제라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역시 어머니 말씀은 새겨들을 것이 없었다. * * *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은 해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찌나 세게 뛰던지 마치 아이가 엄마 나 살아 있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 집에 오기가 아쉬워 백화점에 들렀다. 가볍게 샌드위치를 먹은 후 아이 쇼핑을 하는데 아기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앙증맞고 귀여워서 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사고 싶었다. 그렇게 양말을 사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훈이 거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인은 재빨리 가방으로 아기 양말을 담은 작은 쇼핑백을 가렸다.
“어디 다녀와?”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어요.”
“뒤에 그건 뭔데 감춰?”
“감추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해인은 달리듯 거실을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왔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지훈의 시선이 계속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일단 서랍장에 아기 양말을 감추어 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요?”
“피곤해서. 아무래도 살던 집이 편하니까.”
해인도 그 말에 공감했다. 호텔보다는 살았던 집이 익숙하고 좋을 것이다. 그가 떠난 이후로 하나도 변한 게 없고 심지어 버리라고 했던 것까지 모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저기…….”
“……”
“저기, 그게 그러니까…….”
지훈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어머니 말씀을 새겨들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확인은 하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듯했다. 어차피 남자로서 문제가 없다는 것은 그날 밤 아주 제대로 알았을 것이고. 이혼 전이나 후나 자신은 그녀의 자유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주었으면 한다. 다시 물으려 자세를 고쳐 잡을 때였다.
“편하게 말하세요. 전 언제든지 이 집을 다시 돌려줄 의향이 있거든요.”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 들려왔다. 참, 사람을 뭐로 보고. 저 여자는 왜 한결같이 헛다리를 짚을까. 들고 있던 맥주캔을 빙빙 돌리던 지훈은 그저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왜 웃을까.”
지훈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해인은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 다른 할 말이라도…….”
“있었는데…….”
“…….”
“그냥 하지 않으려고.”
“왜요?”
“쓸데없는 질문 같아서.”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때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그때 하지 않은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이야기할 거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국에 있었을 때 네가 많이 생각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