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이제 남남이니까. (8/92)

08. 이제 남남이니까.2021.12.26.

갑자기? 해인이 멍하니 지훈을 바라보았다.

16549613523322.jpg“미국에 갔는데 네가 자꾸 생각났거든. 그 이유가 뭘까.”

16549613523328.jpg“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16549613523322.jpg“이상한가?”

16549613523328.jpg“당연하죠.”

대체 뭐라는 거야. 자기가 생각해놓고 이유를 왜 나한테 물어.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하다 보면 전처 생각이 한 번쯤은 나기도 하겠지. 그럼 아예 생각이 안 날 줄 알았나. 해인은 문득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16549613523322.jpg“아! 물론 공항에서 받은 전화 때문이기도 할 거야. 온다고 했으면서 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았었으니까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그게 가장 컸겠지.”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었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해인은 신경이 쓰였다.

16549613523328.jpg“어쨌든 3년을 같이 산 전처인데 생각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잘 지내는지 생각도 나고 걱정도 되고 그러겠죠. 나도 당신 미국에 잘 갔나, 일은 잘하고 있나, 그 정도 생각은 했거든요.”

16549613523322.jpg“그런가?”

해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지훈 역시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16549613523322.jpg“맞아. 생각해 보니까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던 것 같아.”

16549613523328.jpg“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졌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죠.”

16549613523322.jpg“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저렇게 금방 수긍하는 지훈을 보니 또다시 서운해지는 해인이다. 딱히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했다. 뭐, 그건 그렇고.

16549613523328.jpg“이혼하기 전에는 해인 씨라고 하더니 이제는 왜 해인이라고, 너라고 해요?”

16549613523322.jpg“이제 남남이니까.”

16549613523328.jpg“…….”

16549613523322.jpg“결혼을 유지하고 있을 땐 나름 존중의 의미였고, 지금은 그냥 선후배니까. 그렇지, 해인아?”

해인아……. 정말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런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해인은 또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16549613523328.jpg“혹시…… 우리, 만난 거 기억하시는 거예요?”

16549613523322.jpg“당연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

16549613523328.jpg“말을 안 하니까.”

16549613523322.jpg“나는 네가 못하는 줄 알았지. 아무 말도 안 하길래.”

대학 2학년 때의 일이었다. 패션 디자인학과의 전통으로 홈커밍데이 행사가 있었다. 그때 교수님들의 강력 추천으로 그 역시 그 자리에 오게 되었다. 당시의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기대되는 인물로 잡지의 1면을 장식하며 학교를 빛낸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가 행사 장소에 나타났을 때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 그에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었다. 다과회 시간이 되었을 때 교수님이 몇 명을 함께 불러서 그와 인사를 하게 해 주었었다.

16549613553175.jpg‘여기는 주해인.’

16549613523328.jpg‘안녕하세요.’

16549613523322.jpg‘그래. 해인아. 안녕.’

그 후 그는 몇 명과 더 인사를 나누었고 무리에 섞여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해인은 당시 그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은 진로에 관해 묻거나 디자인 관련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해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쭈뼛쭈뼛 서서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스쳐 가듯 이루어졌던 단 한 번의 만남.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기억은 해인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물결 위로 떨어지는 햇살처럼 빛나던 남자. 그가 그 한 번의 만남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결혼 전 서로가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16549613523322.jpg“기분 나쁘면 다시 해인 씨라고 할게.”

16549613523328.jpg“아녜요. 괜찮아요.”

기억 속을 헤매던 해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가장 순수했을 그 순간을 기억해주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옷이라도 갈아입을까 생각하며 지훈을 보는데 시야에 듬직한 그의 상체가 보인다. 운동이라도 한 건지 몸에 딱 붙는 기능성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우람한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날 밤 자신이 저 품에 안겼구나 싶어 괜스레 가슴이 뛰던 찰나였다.

16549613523322.jpg“그래. 그럼 호칭 정리는 됐고, 같이 맥주 마실까?”

16549613523328.jpg“아니요. 저는 밖에서 밥을 많이 먹어서.”

어차피 술을 먹을 수는 없다. 같이 마셔줄 수가 없어서 거절했지만, 안주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6549613523328.jpg“안주 좀 갖다 줘요? 마른오징어 있는데.”

16549613523322.jpg“아냐. 됐어. 나도 그만 해야겠다.”

지훈은 아쉬운 표정으로 캔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 다시 묻는다.

16549613523322.jpg“그럼 내일 저녁에 밖에서 식사나 같이 할까?”

16549613523328.jpg“내일은…….”

술에 이어 저녁 식사까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하자고 하는 것이 많은 걸까. 해인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순간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솔직히 그의 식사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편한 선후배로서? 결혼 생활 내내 그와 단둘이 외식을 한 것은 일 년에 두 번 정도였다. 자신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있는 3월. 이제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외려 마음이 편해진 건가. 하지만 해인은 결코 아니었다.

16549613523328.jpg“약속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요.”

전남편을 여타의 선후배로 생각하기엔 이런 사소한 것 하나로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짝사랑을 하며 느낀 것은 기다림이란 정말 쓸모없는 감정 소모라는 것이다. 계약과 계획, 그리고 재단한듯한 의무감으로 사는 남자를 바라보는 것은 지난 3년으로 충분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지훈 역시나 갑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열정적으로 구애할 리도 없을 것이다. 다시는 외로웠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16549613523328.jpg“그럼, 난 옷도 갈아입고 치워야 할 것도 있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해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씻기도 해야 하고 낮에 치우지 않고 두었던 주방 정리도 해야겠다.

16549613523322.jpg“주방 정리 내가 했어.”

16549613523328.jpg“예? 그걸 왜요?”

16549613523322.jpg“물 마시려고 들어갔다가 봤어. 그냥 나오기도 뭐해서 치우고 나왔는데, 좀 의외이긴 했어. 이혼 전엔 한 번도 못 보던 모습이라…….”

16549613523328.jpg“급하게 나가느라…….”

16549613523322.jpg“그럴 수도 있지.”

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해인은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혼 전엔 한 번도 못 보던 모습이라니,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뭐든 제때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사람과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지훈의 방이나 서재는 굳이 해인이 청소를 하지 않아도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그의 성격을 알았고 그에 맞춰 자신도 늘 집안을 정리 정돈하기 바빴다. 이제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좀 느슨해도 될 것 같았는데.

16549613523328.jpg“네, 뭐. 치워줘서 고마워요.”

16549613523322.jpg“별것도 아닌데 뭐가 고마워.”

지훈이 무심히 말하며 캔에 남아 있던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사실 기분이 별로였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뭔가 한 방 먹은 느낌이랄까. 아무리 약속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단칼에 거절할 수가 있을까. 이제껏 살면서 저녁 먹자는 약속을 거절당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소한 내일은 안 되고 모레는 어때요, 라고 되묻지 않는 것도 의외였다. 무슨 약속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은 그 약속을 취소하고서라도 자신과 밥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해인, 너는 왜…….

16549613523328.jpg“왜 그렇게 봐요?”

별생각 없이 봤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16549613523322.jpg“내가 어떻게 봤는데?”

16549613523328.jpg“기분 나쁜 사람처럼.”

16549613523322.jpg“아니야. 그런 거.”

눈치는 빠르네. 자유를 찾아 결혼을 원했고 또다시 자유를 찾아 떠난 여자. 그녀의 자유를 침해할 생각은 없지만 뭔가 엄청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이 아니면 그다음 날 하는 건 어떠냐고 되묻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주방 정리도 해줬잖아. 근데 왜 아무 말이 없냐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주방 정리까지 해두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칼 같은 거절뿐이니 괜스레 울적해진다. 한 사람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이 삶이 해인은 아무래도 좋은가 보다. 지훈은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담담히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그런 지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인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기분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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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49613640146.jpg“해장국 먹고 싶었냐?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어?”

16549613523328.jpg“응. 없어.”

16549613640146.jpg“불쌍하게 됐네. 기왕 나왔으니까 술도 한잔할까?”

16549613523328.jpg“됐어.”

다음 날 저녁, 해인은 부친의 회사 근처에서 우영을 만났다. 아무래도 회사로 와달라는 부친의 부탁을 무작정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새엄마 모녀를 피해 살고 싶었는데 지금의 행태로 보면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왜 저만 피해야 하나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지훈이 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네가 왜 왔냐며 길길이 날뛸 두 모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지만 이젠 저도 그런 것에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았다.

16549613640146.jpg“일은 생각해봤냐?”

16549613523328.jpg“할 거야.”

16549613640146.jpg“그래. 잘 생각……, 뭐? 뭐라고?”

16549613523328.jpg“한다고.”

살이 제법 붙은 뼈를 바르던 우영의 젓가락이 그대로 멈췄다. 예상치 못했던 건지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16549613640146.jpg“정말?”

16549613523328.jpg“왜? 하지 말까?”

16549613640146.jpg“아니. 그게 아니라, 야, 우리 팀장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다. 팀장님하고 상의해서 미팅날짜 잡아서 연락할게.”

우영은 신이 난 아이처럼 흥분했다. 멈추었던 젓가락질이 다시 시작되고 큰 뼈에 붙은 고기들이 발라져 갈 때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16549613640146.jpg“전남편은 어떻게 된 거야?”

16549613523328.jpg“따로 집 구할 때까지는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호텔에서 지내기가 불편한가 봐.”

16549613640146.jpg“그게 다야?”

16549613523328.jpg“당연하지. 다른 의미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미 다른 여자가 있는데. 해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자가 있든 말든 그는 이미 한 번 떠나간 남자일 뿐이다. 하지만 우영의 생각은 달랐다. 집까지 주고 떠난 전남편이 다시 돌아온 의도가 심히도 수상했다. 일 중심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은 체질상 호텔이 잘 맞고 혼자가 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혼까지 했으면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듯했다.

16549613640146.jpg“나는 있잖아. 나 그렇게 가고 바로 다음 날 너한테 전화 올 줄 알았다.”

16549613523328.jpg“아, 그러려고 했는데 깜박했어. 그래서 내가 오늘 밥 사잖아.”

16549613640146.jpg“나 쫓아내고 잘 잤냐?”

16549613523328.jpg“잠이야 잘 잤지.”

16549613640146.jpg“진짜 너무하네.”

16549613523328.jpg“그래서 밥 사준다니까.”

16549613640146.jpg“술도 사줘. 술을 마셔야 서운한 마음이 없어질 것 같아.”

마침 두 사람의 테이블 옆으로 종업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해인이 그를 향해 말했다.

16549613523328.jpg“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잔은 하나면 돼요.”

16549613640146.jpg“너는 안 마셔?”

16549613523328.jpg“술 끊으려고. 몸에 안 맞는 것 같아서.”

16549613640146.jpg“그럼 밥이나 제대로 먹든지. 해장국은 왜 먹다 마냐?”

16549613523328.jpg“볼 때는 맛있을 것 같았는데, 별로 맛이 없다.”

16549613640146.jpg“맛없어? 난 괜찮은데?”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맛을 음미했다. 회사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 맛집을 잘 몰랐다. 식당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싶으면서도 우영은 나름 맛있게 해장국을 잘 먹었다. * * *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고 듣고 있던 음악의 볼륨을 낮췄다. 회의가 길어져 아홉 시가 되어서야 회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던 찰나 지훈은 빨간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해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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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기까지 한다. 저 여자가 저렇게 밝게 웃는 여자였었나. 문득 저 웃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혹시 집에서 자고 있던 그 친구일까. 아니면 제3의 남자? 저 스포츠카의 주인이 여자일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미간이 구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스포츠카는 그대로 아파트를 벗어났고 해인은 아파트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지훈은 잠깐 마음을 다스렸다. 해인이 누구를 만나든 이젠 간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서류상으로도 완벽한 정리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거라곤 말 그대로 학교 선후배로서가 전부였다. 자꾸 그녀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심히도 걱정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유니까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한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누가 행패를 부리면 도와주고. 뭐, 그 정도로 옆에 있어 주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 본 척해야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안방을 나오는 그녀가 보인다.

16549613523328.jpg“이제 와요?”

16549613523322.jpg“아까 빨간 스포츠카는 누구랑 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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