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새벽에 그렇게 헐벗고 나오면. (9/92)

09. 새벽에 그렇게 헐벗고 나오면.2021.12.30.

16549613797489.jpg“무슨 말이에요?”

해인이 되묻자 지훈은 비로소 아차 싶었다.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 튀어나온 말.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16549613797494.jpg“아, 아까 아파트 입구에서 내리는 거 봤어. 빨간 스포츠카에서.”

16549613797489.jpg“아아. 친군데요?”

16549613797494.jpg“친구 누구?”

친구라는 말에 또다시 되묻고 말았다. 친구일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했다. 문제는 어떤 친구냐가 관건인데……. 솔직히 지훈은 이 질문 역시나 후회스러웠다. 해인이 누구를 만나고 다니건 굳이 제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해인이 그것을 자신에게 말할 의무는 더더욱 없고. 생각은 분명히 그렇게 하는데 왜 제 입은 멋대로 그런 질문을 쏟아낸 것인지 한심할 뿐이다.

16549613797494.jpg“아냐. 됐어. 밤늦게 다니니까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16549613797489.jpg“아직 열 시도 안 됐는데…….”

16549613797494.jpg“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뭔가 말하려던 지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럼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처음부터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이렇게 꼬이는 것이려니…….

16549613797494.jpg“그냥 그렇다고. 난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

지훈은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침대에 걸터앉은 지훈이 마른세수를 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아무것도 모른 척하기로 했는데 왜 계획대로 되지 않은 걸까. 나란 남자가 지금까지 살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일이 있기나 했나. 어릴 때를 제외하면 적어도 최근에 그런 일은 없었다, 가 아니라 최근에도 한 번 있기는 했었구나. 미국에서 갑자기 돌아왔을 때. 성인이 된 후 즉흥적으로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매사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계획대로 움직이는 철저한 남자였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 보니 모두 주해인 때문이었다. 해인의 일만큼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이혼의 과정까지는 완벽했는데 이혼을 한 이후에 뭔가가 달라진 느낌이다. 별일은 아닐 것이다. 해인의 말처럼 이혼을 했으니, 전처 생각이 날 수도 있고 걱정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지훈은 이 모든 류의 혼란이 그런 것들의 일환일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 * *

16549613797523.jpg“엄마. 이대로 가만있을 거야?”

16549613797527.jpg“생각 중이니까 보채지 말고 기다려.”

16549613797523.jpg“나 진짜 그 아파트 갖고 싶단 말이야. 응? 엄마.”

세나가 소파에 앉은 난영의 옷자락을 붙들며 매달렸다. 한남동에 다녀온 이후 난영은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해인만 생각하면 늘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남편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난영에게 회사 출입 금지령이 내려진 지 벌써 1년째다. 그래도 은밀히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있기에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인을 회사로 데려오려고 준비 중이라 했다. 처음엔 가볍게 일을 시키고 그다음엔 중책을 맡길 것이다. 그럼 세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분명히 이 회사는 세나에게 물려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갖고 있는 주식을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그건 무언의 약속이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곤 결혼식 때 선물로 받은 3%의 지분이 전부였다. 그것으로는 세나를 지켜줄 수가 없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아 난영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16549613797523.jpg“아니. 형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집에 다시 들어온 거야? 이혼했잖아. 그런데 왜?”

집은 이미 해인의 명의로 넘어온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많은 위자료도 의외였지만 위자료보다 더 비싼 집을 넘겨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난영은 이를 악물었다. 세나의 말대로 딸이 고등학생만 아니었어도 그 자리는 세나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할 리도 없었다. 실상 그 결혼이 난영에게는 무척 모순되는 상황이었다. 회사를 위해선 정략결혼을 해야 했지만, 해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몹시도 못마땅했다. 또한 해인이 이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회사를 위해서는 좋지 못한 일이었다. 난영은 해인의 행복이 싫었고 해인의 추락이 은근 좋았다. 그래서 해인의 이혼이 좋으면서도 회사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만일 신온에서 투자를 결정해주지 않는다면 회사가 힘들어지고 그건 세나에게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16549613797527.jpg“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구나.”

난영은 해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좋은 자리를 왜 박차고 나왔는지, 지훈이 왜 그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것인지…….

16549613797523.jpg“엄마. 나도 디자인학과 갈 것을 그랬나?”

16549613797527.jpg“넌 경영을 할 건데 굳이 디자인을 배울 필요가 뭐 있어. 그런 건 아랫사람 시키면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16549613797523.jpg“그래도 공부 좀 할걸.”

세나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성적에 맞춰 경기 인근의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그 학교에는 패션에 관련한 과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언니인 해인과 비교되는 것이 많았다. 늘 최고의 성적과 꾸미지 않아도 예쁜 얼굴의 해인에 비해 자신은 성적도 언니보다 떨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멋을 부려야 언니의 미모와 견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소리 없는 비교에 시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다. 언니의 결혼도 부럽고 이젠 심지어 언니의 이혼도 부러워진다. 세나는 습관처럼 팔짱을 끼고 이를 맞부딪혔다. 언니보다 늦게 태어난 것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 * * 지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사흘은 된 것 같다. 집에는 꼬박꼬박 들어오는데 새벽같이 나가주는 덕분에 얼굴 마주칠 일이 없다.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와의 대화는 빨간 스포츠카가 마지막이었다. 궁금한 듯 물어보더니 갑자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 남자.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아까 들어오는 문소리가 났지만 굳이 밖으로 나와보지는 않았다. 지금 즈음 잠이 들었겠지. 사실 저도 자려고 누웠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우영에게 내일 미팅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드디어 내일 아빠의 회사로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새벽 한 시. 우유를 따듯하게 데워 거실 창가에 섰다.

16549613797489.jpg“아가야. 우유 먹고 쑥쑥 커라.”

멀리 한강 다리 위로 지나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수없이 점멸을 반복했다. 해인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크면 이 풍경을 함께 보겠구나 생각하며. 왠지 뿌듯해지는 건 아기에 대한 기대감과 사랑 때문일 것이다.

16549613797489.jpg“우리 겨울에 만나자.”

해인이 중얼거리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하체에 수건을 둘러맨 지훈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16549613834642.jpg

16549613797489.jpg“뭐, 뭐예요? 소리도 없이.”

16549613797494.jpg“금방 부르려고 했는데, 먼저 뒤를 돌아서…….”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16549613797489.jpg“아니, 오면 온다는 발걸음 소리라도 낼 수 있잖아요. 진짜 귀신이에요?”

졸지에 또 귀신 취급을 받고 있다. 발소리를 낸 것 같은데 못 들었나 보다. 아니, 내가 귀신도 아니고 설마 진짜 발소리가 안 났겠냐고. 괜히 짜증을 낸다 싶었지만 지훈은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했다.

16549613797494.jpg“미안. 다음엔 쿵쿵거리며 걸어 다닐게.”

16549613797489.jpg“옷차림도 신경 써줘요. 그게 뭐예요?”

16549613797494.jpg“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설마 새벽 한 시에 나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어.”

16549613797489.jpg“나도 지훈 씨가 새벽 한 시에 그렇게 헐벗고 나올 줄은 몰랐네요.”

그를 바라보는 해인의 시선이 당황스러운 듯 흔들렸다. 섬세히 빚어진 조각 같은 근육이 광택이라도 입힌 듯 빛나고 있다. 저렇게 하체에 수건을 둘러맨 모습은 결혼 전에도 본 적이 없어 괜스레 가슴이 뛰었다. 그냥 수건으로 둘러매기만 했는데도 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치명적이었다.

16549613797494.jpg“미안. 정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다음엔 잘 입고 다닐게.”

픽 웃은 지훈이 오른손을 허리에 올리며 짝다리 포즈를 취했다. 그 바람에 수건이 가볍게 찰랑거리며 구릿빛의 허벅지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시선이란 것이 움직이는 것을 향해 자동으로 따라갈 때가 있다. 해인은 무심코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헉, 하며 다시 지훈을 바라보았다. 흥미롭게 저를 응시해오는 지훈의 눈동자. 볼 주위로 화르르 열감이 차올랐다. 보려고 해서 본 게 아니라 동체 시력이 뛰어났을 뿐인데……. 일부러 보라고 저런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해진 해인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16549613797489.jpg“그, 그래요. 다음엔 잘 입고 다녀요.”

16549613797494.jpg“밤이 늦었는데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16549613797489.jpg“그냥 잠이 안 와서요.”

16549613797494.jpg“잠이 왜 안 와?”

16549613797489.jpg“낮에 낮잠을 많이 자서…….”

16549613797494.jpg“아! 그럼 당연히 안 오겠네.”

소소한 대화들이 어색하게 이어졌다. 지훈은 벗었든 말든 이 순간이 더 길게 이어지길 바라며 또 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 찰나 해인이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

16549613797489.jpg“지훈 씨는 이 시간에 왜 나온 거예요?”

16549613797494.jpg“아까 들어왔는데 일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더라고. 씻고 자려다가 야경이나 잠깐 볼까 해서 나왔어.”

저 남자도 야경이란 걸 보긴 보는구나. 그냥 주구장창 일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해인은 이혼 후에야 지훈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 같은 이 상황이 조금 의아했다.

16549613797489.jpg“그래요. 그럼 난 이만 들어갈 거니까 보고 들어가요.”

16549613797494.jpg“나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그냥 들어갈게.”

16549613797489.jpg“아니에요. 이제 막 들어가려고 했어요.”

오랜만에 보는 야경일 텐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해인이 무심히 지훈을 지나쳐 갈 찰나였다.

16549613797494.jpg“겨울에 누구랑 만나자고 한 거야?”

등 뒤로 날아온 질문에 해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걸 또 들은 거야? 아니, 저 남자는 왜 갑자기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졌냐고. 뭐라고 해야 하나.

16549613797489.jpg“치, 친구예요. 친구. 프랑스에 유학 간 친구가 그때 온다네요.”

대충 둘러댄 해인이 도망치듯 안방으로 내달렸다. 혹시 그 앞에 한 말도 들었을까? 들었으면 물어봤겠지? 문까지 걸어 잠근 해인이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스럽게도 아가라고 했던 말은 못 들은 모양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해인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모처럼 제대로 화장도 하고 차이니스 칼라 블라우스와 스커트도 꺼내 입었다. 너무 딱딱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첫 만남이니 그게 나을 듯했다. 회사에 도착한 해인이 긴장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주의 딸이지만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해인은 이곳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엄마를 따라 회사에 들락거렸던 세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영이 긴장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툭 친다. 가볍게 미소를 지은 해인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중년의 남자와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16549613922657.jpg“만나서 반가워요. 해인 씨. 마케팅 팀장 박승윤이라고 합니다.”

16549613797489.jpg“만나서 반갑습니다. 팀장님.”

곁에 서 있던 여자는 자신을 심은진 대리라고 소개했다. 겉으로 보기엔 귀여워 보이는 외모인데 나이가 많은 것 같아 해인이 깍듯이 인사를 하며 예의를 갖췄다. 인사를 마친 승윤은 처음엔 가벼운 안부로 해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책상 위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허브차를 마시며 해인도 긴장되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16549613922657.jpg“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번 화보 촬영은 특별히 외부 투자로 진행되는 건 알고 계시죠?”

16549613797489.jpg“외부 투자라뇨?”

우영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깜박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16549613922657.jpg“아, 음, 그게 회사가 어렵다는 건 알고 계셨죠?”

16549613797489.jpg“그렇긴 한데…….”

16549613922657.jpg“투자자님께서 투자도 해 주시고 이번 화보 촬영은 특별히 직접 담당하시기로 하셨거든요. 나도 이 부분은 사장님께 전해 듣기만 했습니다. 딱히 별말씀을 안 하시고 그냥 때가 되면 안다고만 하셔서 솔직히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는 상황이라 답답하긴 했어요. 이따 온다고 하시니까 그때 만나죠.”

해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부친이 제게 전화를 했을 때도 그런 말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조건이 있는 투자를 받은 듯했다.

16549613922657.jpg“따로 어시는 구하지 않고 우영 씨가 담당할 거니까 시키실 일 있으시면 우영 씨에게 부탁하시고, 그리고 음, 해인 씨는 지금은 프리여도 앞으로 우리 식구가 될 거나 마찬가지니까 같이 잘해봐요.”

승윤은 마치 해인이 상사라도 되는 듯 공손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해인은 정지한 듯 굳어버렸고 잠시간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승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옆으로 나와 선다.

16549613922657.jpg“혹시……, 투…….”

16549613797494.jpg“맞습니다. 투자자 겸 클라이언트 윤지훈이라고 합니다.”

담담히 말한 지훈이 해인을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줄 알았기에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인의 맞은편에 의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제 침대에서 드러누워 자던, 감히 얼마면 돼, 라는 말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내뱉던 놈. 그가 왜 여기 있을까. 지훈은 삐딱한 시선으로 우영을 바라보았고 우영 역시나 전의를 불태우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1654961395165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