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심장 떨어질 뻔.2022.01.02.
불꽃이 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눈동자 사이로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승윤이 지훈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모두 자리에 앉았다. 해인은 가볍게 머리만 숙이고는 지훈의 시선을 외면했다. 승윤은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게 식은 이유가 전남편과 전처의 재회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제 잘못이 아니었다. 클라이언트에 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훈은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회의를 주관했다.
“이번 화보 촬영은 특별 기획으로 우리 회사에서 발행하는 라임 트리라는 잡지에 실을 예정입니다. 개성과 빈티지라는 주제로 진행될 예정이니…….”
“잠깐만요. 저희가 왜 라임 트리의 화보를 맡는 거죠? 저는 특별 기획 촬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해인이 날을 세우며 지훈을 바라보다 이내 승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그를 불렀다.
“팀장님?”
“아, 그게 사장님이…….”
승윤으로서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클라이언트의 지시만 따르면 된다고 하셨을 뿐이니.
“음, 다들 갑작스럽긴 할 겁니다. 자세한 설명은 차후 하기로 하고 일단 브리프부터 살펴보시죠.”
간단히 말한 지훈이 승윤에게로 서류를 건넸다. 승윤은 그 서류를 곧장 해인에게로 전달했다. 브레인스토밍이야 함께 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해인의 몫이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해인은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회사의 오너인 부친의 결정이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그 결정에 불만을 표출해 보일 수는 없었다. 회사가 어려운 것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모른 척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어려워질 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회사로 부르는 부친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또 다른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브리프를 받아든 해인은 천천히 서류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간단한 회의가 이어졌다. 지훈은 간혹 힐끔거리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긴 생머리만 본 것 같은데 오늘은 웨이브가 있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화장도 제대로 한 것 같고. 원래는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뭔가 원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긴장한 탓인지 표정은 어두웠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 또한 사정이 있었다. 간단한 지시사항을 전달한 지훈은 또 다른 일정을 위해 먼저 회의실을 떠났다. * * *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섰다. 비서 상진과 친구 재원을 만난 지훈은 술을 홀짝이면서도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 해인에게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문자 하나 없었다. 약간 충격을 받았을 텐데……. 몇 시에 들어가야 조금은 안전할까.
“그나저나 네가 웬일이냐. 먼저 술을 다 하자고 하고?”
“금요일이잖아.”
“상무님이 언제부터 금요일에 술을 마셨는지 참 모를 일이네요.”
상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술을 잘하면서도 정작 술은 좋아하지 않는 재미없는 상사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친구까지 불러내 술을 마시고 있다. 좀 이상한 것이라면 자꾸 시간을 확인한다는 건데…….
“밤에 무슨 일이 또 있으세요? 아니면 기다리는 전화라도…….”
“그런 거 아니야. 재원이 넌 일은 어때?”
“이제 좀 적응이 되는 것 같아. 늘 사람 의심하면서 취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다행이네.”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난 재원은 이제 2년 차 검사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그로서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어했지만 이제 나름 적응이 된 듯했다.
“그럼 이제 그만 갈까? 밤도 늦었는데…….”
“아냐. 좀 더 있다가.”
“벌써 열두 시야. 왜, 호텔에 혼자 있기 싫어? 같이 가줄까?”
“됐어.”
지훈이 딱 잘라 거절했다.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직 비밀이었다. 딱히 비밀로 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말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무섭다고 해야 하나. 왜 이럴까. 내가 누군가를 무서워할 사람이 절대 아닌데……. 무섭다고 느껴지는 사람 자체가 없는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래. 이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은 것이다. 해인에게 이런저런 상황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지훈은 역시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사실은 해인이 회사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투자를 결정하고 M&A를 준비하고 있었다. 똑똑한 여자이니 이미 뭔가를 짐작했을 것이다. 회의하는 내내 굳은 얼굴이었는데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담담해 보이기도 하고. 사실 속을 잘 모르겠다. 어차피 거긴 이제 내 집도 아닌데 그냥 호텔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오늘만 안 들어가기도 이상하잖아. 꼭 죄지은 사람처럼. 아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난 도움을 주려고 했을 뿐이야. 그러니 당당하게 들어가자. 그렇다고 당당하게 들어가기엔 그곳은 더 이상 제 집이 아니고. 아! 뭐 어쩌라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발걸음이 이끄는 곳은 한남동 집이었다. 시계를 보니 열두 시 삼십 분. 잠이 들었겠지? 저번에 새벽 두 시에 안 자고 나와 있던데……. 열두 시 보다는 새벽 두 시가 더 위험할지 모르니 슬쩍 들어가면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들어갔다.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니 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나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은밀한 움직임으로 통로를 지나 거실로 들어설 때였다. 반짝하니 불이 켜지고 순식간에 주위가 환해진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턱 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해인이 보인다.
심장 떨어질 뻔했다.
“아, 안 자고 있었어?”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
“발소리가 안 나서 들어온 지 모를 뻔했어요.”
지훈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기껏 친구를 붙잡고 시간을 죽이다 왔는데 왜 아직도 깨어 있을까. 잠이 보약인데, 잠 좀 일찍 잘 것이지 왜 깨어 있냐고.
“그게, 나도 쿵쿵 걸으려 했는데 아래층에 실례잖아. 이 밤에.”
“그렇죠. 잘했어요.”
“고마워.”
지훈이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세 살 때도 저런 칭찬에 고마워 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런 말이라도 해서 해인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있기는 한데, 난 집에서는 일 이야기 안 하는 성격이라…….”
“그래요? 그럼 지금 회사로 가죠.”
해인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옷 갈아입고 바로 나올게요. 거기서 딱 기다려요.”
목소리는 어찌나 살벌한지 기다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말로 들린다.
“아니야. 여기서 해.”
지훈은 어쩔 수 없이 해인을 불러세웠다. 내일로 미룬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니 그녀도 알 건 알아야 할 것이다. 근데 무슨 여자가 저리 칼 같을까. 원래 저랬나. 분명 수줍어서 고개도 잘 못 드는 성격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욱 그랬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나 상견례, 그리고 결혼식 때에도. 생각해보니 그녀는 이혼하자고 할 때부터 용감해졌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사람이 달라지나? 그게 이혼이었고, 이혼했으니 이제 무서울 것이 없는 건가. 혼란스러운 지훈을 앞에 두고 해인은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는 소파에 앉는다. 나도 무서울 게 없는 사람, 너도 그런 사람. 우린 그렇게 서로 닮았다 생각하며 지훈도 같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왜 저절로 팔이 풀리고 손이 공손히 무릎 위로 올라가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다.
“나는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장인어른과, 아……! 그러니까 주 사장님과 거래를 했어.”
지훈이 담담히 말했다. 역시 뭔가가 있었구나 싶은 해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무슨 거래를요?”
“해인 씨가 회사 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투자를 하기로.”
“내가 일을 할지 말지를 왜 당신이 결정하는 거죠?”
“그건 아니지. 난 투자만 하기로 했고 일의 결정은 전적으로 해인 씨가 한 거야.”
“그러니까요. 왜 투자의 조건이 나냐고요.”
“겉도는 것 같아서. 능력도 있는데 왜 회사 일은 안 하고 부티크에서만 머무는지…….”
“나는 그냥 그것도 좋았어요. 디자인도 하고 VIP 고객들 스타일링도 하고, 나중엔 그럴듯한 레이블로 론칭도 하고 싶고. 그게 다예요.”
“그거야 회사 일도 하면서 같이 하면 되지. 그 부티크 사장님, 어머니도 아시는 분이야. 그 사장님이 해인이는 똑똑해서 경영을 해도 잘할 거라고 하셨다더라고. 그냥 디자인만 하기엔 아까운 인재라고. 그 말 들었을 때부터 해인 씨가 회사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해인은 뭔지 모르게 울컥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훈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 자체로는 고마운 일이었다.
“단순히 투자만 하는 건가요?”
“솔직히 M&A할 때가 이미 지났지.”
역시 예상대로였다. 결혼으로 이루어져 있을 땐 어차피 같은 회사로 볼 수 있지만, 이혼한 후에는 달라진다. 이미 회사가 많이 어려워 다시 투자를 받는다면 M&A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부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엘브의 직원들은 어떻게 되나요?”
“숙녀복의 로제나 브릿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흑자를 보는 곳이 거의 없어. 특별히 아동복은 처참하고.”
“그래서, 버릴 건가요?”
“이건 사업이야. 냉정하게 생각해.”
“버릴 거냐고요.”
“수선팀의 상황도 심각해. 다른 회사들은 개인사업자 등록을 해서 수선팀을 운영하는 상황이야. 근데 엘브는 이 모든 것을 회사가 책임지고 있잖아. 거기도 적자가 심하고,”
“원래 의류사업은 디자인을 시작으로 판매 수선까지 모두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거기까지가 한 가족이고.”
“그게 이상적인 기업이긴 하지.”
거기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기업이라는 것은 흑자를 보지 못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주 사장이 이 선택에 동의한 이유도 이미 회사가 어려워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계획한 거예요?”
“이혼 전부터.”
“나를 포함하는 것도요?”
“그래.”
그에게 더 이상 손 벌리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현실에 해인은 못내 속이 쓰렸다. 착잡했지만 해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어차피 의견을 낼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몇몇은 회사를 떠나야 하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이젠 직원들을 챙겨야 할 때였다.
“최소한으로 해줘요. 무슨 뜻인지 알죠?”
“그건 당연히 내가 할 일이야.”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여 주는 해인의 모습에 지훈도 마음이 놓였다. 오너 가족으로선 회사가 팔려가는 기분일 텐데……. 그래도 전남편이 듬직하긴 한가 보다.
“믿어줘서 고마워.”
“지훈 씨를 믿는 게 아니에요.”
“…….”
“돈과 현실에 굴복했을 뿐이에요. 당신한테도 폐를 끼쳤고.”
씁쓸히 말하는 해인으로 인해 지훈은 맥이 풀린 기분이다. 그렇게까지 비약할 필요는 없는데……. 전 남편 한번 믿어 보지. 지훈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애써 웃었다.
“그 기분으로 자면 잘 못 잘 거야. 같이 술 한잔할까?”
“술 끊었어요.”
“왜?”
“실수할까 봐요.”
“실수?”
지훈의 머릿속으로 아련히 떠오르는 밤이 있었다. 설마 그날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실수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혹시라도 그 밤을 후회하고 있다면……. 실수가 아니었던, 그 날 진심이었던 나는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실은 주사가 있어요. 안 좋은.”
해인이 변명하듯 둘러댔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 그날 밤을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해인 역시나 충분히 오해할 만한 말이라 생각이 되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뱉게 된 건지 차마 모를 일이었다.
“주사가 있었어? 무슨 주사야?”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궁금하네.”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나한테 무슨 주사가 있는지. 아직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셔본 적이 없어서 주사라고 느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뱉은 말이 있으니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그가 그날 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말이 좀 많아져요. 헤실헤실 웃고.”
“그래?”
지훈이 뭔가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는다. 해인은 그 웃음이 불길했다.
“왜 웃어요?”
“그냥. 그날은 많이 안 마셨구나 싶어서. 말이 많지도, 헤실헤실 웃지도 않았으니까.”
결국 지훈의 입에서 그날, 이란 말이 나오고 말았다. 해인은 본의 아니게 얼굴이 붉어졌다.
“술이 센가 봐? 혹시 궤짝으로 마시는 타입이야?”
그럼, 그날 취해서 실수를 한 건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지훈의 두 눈이 유독 반짝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