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슴은 그때부터 뛰었을까.2022.01.09.
해인은 들고 있던 수첩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날 만큼 큰 소리였다. 지훈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스스로도 꽤나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그렇게 정수리만 보이는 남자를 향해 해인이 담담히 말했다.
“고독은 뭐, 외롭다 보면 한 번씩 얼어 죽는다 치고.”
“…….”
“언제부터 자유가 빌어먹었을까요?”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말들이 부끄러움에 불을 지른다. 빌어먹을. 지훈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미안. 잠시 헛생각을 하느라 헛……소리를 한 것 같네.”
“헛생각도 하긴 하나요?”
“…….”
“참 살다 살다 지훈 씨 헛소리를 듣는 날이 오네요.”
열심히 브리핑하는데 헛생각을 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지훈은 부끄러운 한편 미안해졌다.
“그, 그러게. 아까 하던 거나 계속해. 잘 들을게.”
“잠시 머리 좀 식혀야 할 것 같은데. 지훈 씨, 지금 다른 생각 하고 있잖아요.”
“그럴까?”
해인의 말대로 이대로는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는데 잘됐다 싶어 지훈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의 정리를 위해 일단 제 방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제 입술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자고 그런 헛소리를 했을까. 충격적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바보 같은 실수는 한 적이 없다. 회사는 아니었지만 분명 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사적 감정으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게 된 것인지……. 냉정하자. 냉정. 뭔가를 후회하고 돌이키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니 아무래도 여기 있다 보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싶었다. 예정대로 여기에는 잠시만 머무르고 그만 나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해인의 가족들이 찾아와 또 행패를 부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뭐, 그건 그때 가서 또 도와주면 될 일이고. 지훈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해인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자신의 수첩을 보고 있었다.
“일단 방향은 잘 잡은 것 같아.”
“듣기는 들은 거예요?”
“당연하지. 잠깐 헛생각했을 뿐, 제대로 들은 건 확실해.”
“알았어요. 그런 걸로 해요.”
“그런 걸로 해요, 가 아니라 그런 거야.”
지훈이 단호히 말하며 힘주어 해인을 바라보았다. 잘못 말했나 싶어 해인이 멍하니 마주쳐 오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쩌라고.’
‘제대로 들었다고.’
‘알았다고 했잖아.’
‘그런 걸로 하자며.’
‘그래서 지금 나 째려보니?’
‘아아니. 그건 아니고.’
무언의 말을 주고받다 지훈의 눈동자가 먼저 힘을 잃었다. 눈꼬리마저 축 처지며 저도 모르게 해인의 입술로 시선이 향한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그때, 그날처럼 예……쁘다. 그 날을 떠올린 순간 분위기가 갑자기 묘해졌다. 순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지훈이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아까 하던 말 계속해 봐.”
“그, 그래요.”
해인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빤히 쳐다보던 눈동자가 점점 이상해지더니 급기야 그 눈동자가 제 입술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은 그때부터 뛰었을까. 아니, 사람이 갑자기 왜 그래? 분명 기분이 상한 것 같았는데 돌연 눈빛이 미묘해졌다.
“아, 음 그러니까 젊은 층들의 빌어먹을 자유와…….”
“…….”
“미안……해요.”
해인이 민망한 듯 수첩으로 제 얼굴을 감싸버렸다. 미묘하게 제 입술을 바라보던 지훈의 눈빛 탓에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니 말이 제대로 나올 수가 있나. 정말이지 이건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다. 물론 지훈에겐 분명 아까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까는 건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역시 집에서는 일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그,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했다. 지훈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엔 해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부끄러운 사람처럼. 아니, 까기는 자기가 까놓고 왜 부끄러워해? 그럼 까지를 말든지. 방으로 돌아온 지훈은 팔짱을 끼고 방문에 기댄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피차 실수가 오고 가는 상황. 역시 여기 오래 머무르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언제 나왔는지 해인이 테라스 난간에 기대 양치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 옆으로 간 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양치를 돌아다니면서 해?”
“그러, 아 되나음?”
그럼 안 되나요, 라며 해인이 고개를 갸웃한다. 지훈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혼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기도 하고.
“양치하면서 말도 해?”
“느으으음, 으으으음.”
네가 말 시켰잖아, 라며 응수한 해인이 칫솔질을 멈추지 않고 똑바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물론 지훈은 해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칫솔을 물고 음음거리는 그녀가 귀여울 따름이었다.
“내 시계 어디 있어?”
“…….”
“전에 내 시계 돌려주러 공항에 오려고 했었다며. 그거 주라고.”
잠시 지훈을 보던 해인이 기다리라는 듯 손을 한 번 들더니 이내 안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해인은 명품 시계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요.”
정말 시계 때문이었나.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계를 건네는 해인의 모습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계가 아니라 희고 고운 해인의 손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들어오지 않으면 호텔로 갔다고 생각하고 기다리지 마.”
“기다린 적 없는데…….”
칫솔질을 하는 게 귀여운 해인은 실상 아주 냉정한 여자다. 알았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기다린 적이 없다고 야무지게 돌려주지 않는가. 손은 저렇게나 희고 고우면서 입술은 차가운 여자. 마찬가지로 차가워지면 될 일인데 갑자기 힘이 빠지는 이유가 뭘까. 지훈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래. 혹시나 해서.”
* * * 돌계단을 한참이나 오른 우영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나온 은하가 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그녀는 잠자기 직전의 모습으로도 곱고 우아했다.
“이제 오니?”
“이제 옵니다.”
“해인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잘 지내고 있어요.”
우영은 대충 간단한 인사만 하고 2층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쪼르르 따라 올라간 은하가 다그쳐 물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혼을 한 거래? 잘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잘살다가도 이혼도 하고 그러죠. 오히려 얼굴이 좋아.”
“얼굴이 좋기도 하겠다. 이혼했는데. 내가 한번 가봐야겠어. 근데 너는 그 회사 계속 다닐 거야?”
“다닙니다.”
“로스쿨 입학해서 네 아빠랑 형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니?”
“나 없이도 잘하고 있잖아요. 악덕 기업 변호도 해주면서 돈도 잘 벌고.”
“너 진짜 왜 그러니. 사춘기 소년처럼.”
“저 씻고 잘 겁니다. 그만 내려가세요.”
우영은 셔츠를 훌러덩 벗어 던지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을 황망히 보던 은하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무작정 악덕 기업을 변호한다며 로스쿨 입학을 거부하는 아들을 보며 걱정이 앞섰다. 살인자조차도 변호받을 권리가 있다며 아무리 아들을 설득해도 도통 듣지를 않았다. 젊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계속 저럴까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욕실로 들어온 우영은 샤워할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거울만 바라보았다. 해인이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해인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를 향해 걸었을 때의 그 불같은 분노. 그리고 미칠 것 같은 허전함. 그래서인지 더더욱 연락할 수 없었다. 해인이 엄마의 초대를 받아 집에 왔을 때도 부러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하기도 했었다. 간혹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사적으로 연락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이혼 소식을 들었을 땐 물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편안한 해인의 얼굴을 보며 잠시 기대감도 들었다. 그러나 우영은 알고 있었다. 해인이 결코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그녀에게 쉽사리 고백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로 인해 친구로서도 옆에 있지 못할까 두려웠다. 겨우 그녀의 옆으로 돌아왔는데 그런 섣부른 고백으로 다시 찾은 이 자리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 옆자리로 만족하기엔 뭔가가 꺼림칙했다. 전남편이 돌아왔고 그의 행보가 이상하다. 만일 그가 이혼을 후회라도 하고 있다면……. 해인의 곁에 있게 된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하루하루 애가 타는 것도 사실이었다. * * *
“오랜만이야.”
“그러네요.”
“잘 지냈어?”
“잘 지냈어요. 형준 씨도 잘 지냈죠?”
해인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낮에 사무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안형준이라는 이름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내가 갑자기 연락해서 당황했지?”
“네. 조금.”
“편하게 생각해. 우리가 못 만날 사이는 아니잖아.”
형준은 지훈과 결혼하기 이전 잠깐 결혼이야기가 오가던 사람이었다. 형준의 부친이 사장인 안성 모직은 엘브보다는 조금 더 큰 규모의 남성복 전문 회사였다. 신온과 혼담이 오가기 전에는 사업적으로 나름 좋은 관계였었다. 서로의 신상품을 광고해주며 가끔 가족끼리 식사도 함께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끼리의 사업적 친분 관계였을 뿐이다. 해인은 새엄마 모녀의 등쌀에 가족끼리 식사하는 자리도 꾸역꾸역 참여하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친은 결혼 이야기를 꺼내며 따로 형준을 만나게 했다. 그 자리가 불편했던 해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며 의사 표현을 분명히 했었다. 그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중요한 일이 아니면 만날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건.”
“그냥 너랑 밥 먹고 싶어서 불렀어. 너한테 밥 한 끼 사주는 게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라서. 너 나 거절하고 갈 때도 제대로 밥 안 먹고 갔잖아. 난 그게 마음에 많이 남았었거든.”
“아, 그땐 미안했어요.”
“괜찮아. 다 지난 일인데 뭘. 널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일단 먹기나 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해인은 그가 편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나온 자리였는데 같이 밥을 먹고 싶어서 불렀다는 말이 당혹스러웠다. 그냥 만나서 밥을 먹을 만큼 막역한 사이도 아니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 굳이 서로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절할 마땅한 명분도 없고, 일단 만났으니 적당히 먹고 일어서야겠다. 그가 시켜놓은 코스 요리가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해인이 샐러드를 맛본 후 가볍게 물을 마셨다.
“회사에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어.”
“…….”
“넌 잘할 거야.”
“네. 고마워요. 근데 누구한테 들었어요?”
“세나. 세나랑 가끔 연락하거든. 언니가 회사 먹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던데?”
“아, 네.”
역시 기대할 것이 없는 동생이었다. 그나저나 형준과 세나가 만나고 있었다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딱히 둘이 만날 이유가 없을 텐데…….
“그래서 내가 그랬지. 언니가 너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당연한 거라고. 너는 그럴 깜냥이 안 되니까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세나가 그 말을 듣고 가만있어요?”
“가만있기는. 커피 마시고 있었는데 그걸 확 뿌려버리고 싶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고. 그래서 얼른 일어서서 먼저 간다며 나왔어.”
형준이 웃으며 말했지만 해인은 함께 웃을 수 없었다. 마침 로브스터가 나왔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해인은 묵묵히 음식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온 음식을 다 먹어야 했다. 요리를 먹는 동안에도 형준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건넸다. 대부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해인은 거의 듣기만 했고 질문에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형준은 시종 미소를 지었지만 해인은 그 시간이 어색하고 지루했다.
“오늘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밥 한번 사는 걸로 뭘.”
형준이 계산을 하고 나오는 동안 해인은 밖에서 기다렸다. 그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직 초저녁인데 같이 술 한잔 어때?”
술이라는 말에 해인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으로 형준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밥을 먹는 것과 술을 마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에요. 이만 가볼게요.”
간단히 인사를 하고 한 걸음을 떼는데 갑자기 손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형준이 돌아서는 해인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놀란 해인이 의아한 얼굴로 형준을 바라보았다. 이내 붙잡은 손을 놓은 형준이 멋쩍은 듯 제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미안. 그럼 데려다주기라도 하고 싶어서.”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정말 중요한 일인 줄 알고 나왔어요. 오랜만인데 뭐, 같이 밥 한번 먹을 수는 있죠. 그럼 잘 가요.”
“정말 중요한 일일 수도 있잖아.”
“네?”
해인이 재차 형준을 바라보았다. 말투와 눈빛까지 종전까지와는 살짝 다른 모습이다. 말투는 차갑고 눈빛은 살짝 매섭다고나 할까.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