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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 (13/92)

13.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2022.01.13.

16549615328469.jpg“데려다줄게. 일단 내 차 타자. 편하게 가.”

16549615328474.jpg“나는 택시가 더 편해요. 미안해요. 먼저 가볼게요.”

해인은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는 뒤를 돌아 걸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기껏 중요한 일이라며 불러놓고는 고작 밥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고는 같이 술을 먹자며 저렇게 차가운 얼굴이라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해인은 이내 그 마음을 떨쳐내었다. 아이를 위해서 좋은 생각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지훈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짐은 방에 그대로 있었다. 불쑥 그런 말을 꺼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나간다고 생각하니 또 서운한 느낌이다. 아이가 있다고 먼저 말해 볼까. 솔직히 그의 반응이 두려웠다. 딱히 수빈을 만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원치 않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밤이 깊어도 지훈은 들어오지 않았다. 열두 시가 넘어 해인이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제 들어온 모양이다. 이미 불을 끈 상황인지라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 아랫배를 주무르며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아이에게도 아빠를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지훈 역시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일단은 알아야 할 것이다. 원하지 않을지라도 그가 이 아이의 아빠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지 않은가. ‘언젠가 알게 되겠지’라는 안이한 마음이었던 해인의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급기야 다음 날 아침. 해인은 임신에 대해 지훈과 대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야기하다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아이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해인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을 땐 그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는 중이었다.

16549615328474.jpg“저기, 저녁에 이야기 좀 해요.”

16549615328482.jpg“이야기?”

지훈이 가방을 든 손을 바꾸며 흥미롭다는 듯 해인을 바라보았다.

16549615328474.jpg“할 말이 있거든요.”

16549615328482.jpg“오늘 회의는 나도 참석하긴 할 거야.”

16549615328474.jpg“회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16549615328482.jpg“그래? 그럼 아홉 시 정도 집에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겠어?”

16549615328474.jpg“그래요. 그럼.”

16549615328482.jpg“그래. 그럼 먼저 나갈게.”

홀로 남은 집 안은 고요했다. 해인은 소파에 앉아 편안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잘될 거라는 믿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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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49615357909.jpg“오늘 회의는 윤 상무님도 참석한다고 하셨는데. 좀 늦으시나 봐. 우리끼리 먼저 시작합시다. 해인 씨, 이미지 리서치는 잘되고 있나요?”

승윤의 질문에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16549615328474.jpg“최근 트랜드로 자리 잡았던 이미지들을 모아 보고 있기는 한데, 아직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회사의 전속 포토그래퍼와 함께 컬러 콘셉트를 잡고 포즈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기에 미리 체크를 하고 있었다. 아직 구체화 되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대충 이미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16549615357909.jpg“그래요. 그건 해인 씨가 잘 알아서 할 거니까 믿고 맡길게. 심 대리는 오수빈 씨랑은 통화했어?”

16549615357909.jpg“흔쾌히 한다고 하셨어요. 윤 상무님하고 친분이 있던데요?”

16549615357909.jpg“그래?”

승윤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재벌들이야 그들만의 리그처럼 서로 알고 지내는 격이니. 심 대리의 말을 들은 해인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오수빈이 결국 한다고 했구나. 둘이 사귀었다는 소문은 대학 3학년 즈음 친구에게서 들었었다. 오수빈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의 친구가 수빈을 알았고 그녀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라고 했었다. 그땐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그 말을 옮긴 적도 없었다. 당시에는 오수빈이 모델이 되기 직전이라 기사화되지도 않았었다.

16549615357909.jpg“남자 모델은 누구로 할까요?”

16549615357909.jpg“나는 요즘 뜨고 있는 아이돌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해인은 팀장과 대리의 대화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영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감지하며 주의 깊게 그녀를 살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갈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문이 열릴 때 만해도 다들 지훈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지훈이 아니라 오수빈이었다. 검은색 크롭탑에 찢어진 보이프렌드진을 입고 와인색 라이더 재킷을 걸친 그녀는 옷 분위기만으로 자유분방함이 넘쳐 흐르는 듯했다.

16549615357936.jpg“안녕하세요.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심 대리님이 통화하실 때 오늘 회의에 지훈 오빠도 참석한다고 해서, 오빠 얼굴이나 보려고 왔어요.”

인사와 함께 그녀는 자신이 온 목적을 분명히 했다. 이곳이 공적 모임의 장소라는 걸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오빠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친밀하다거나 친밀함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의 하나일 것이다.

16549615357936.jpg“근데 아직 없네요?”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해인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16549615357936.jpg“아!”

저 짧은 탄성은 무슨 의미일까. 해인은 자신에게서 멈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다. 수빈은 곧장 승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16549615357936.jpg“제가 잘못 온 건 아니죠?”

16549615357909.jpg“아, 아닙니다. 잘 오셨어요. 어차피 미팅 약속 잡으려고 했어요.”

16549615357936.jpg“환영해주셔서 감사해요.”

16549615357909.jpg“감사하긴요. 그런데 아직 상무님이 오지 않으셨는데,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

그때였다. 승윤의 핸드폰이 울렸고 액정을 확인한 그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잠시 통화를 한 그가 통화를 종료하며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16549615357909.jpg“어쩌죠? 상무님, 일정이 늦어지셔서 못 온다고 하시는데…….”

16549615357936.jpg“아! 그래요?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말도 없이 왔는데, 어쩔 수 없죠. 전화해서 따로 만나야겠네요.”

16549615357909.jpg“기왕 오셨는데 같이 차라도 한잔하면서…….”

16549615357936.jpg“아니에요. 다음에 미팅 약속 잡아서 제대로 올게요. 아, 그리고 지훈오빠에게 제가 모델이라는 건, 제가 말할 때까지 비밀로 해주세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던 수빈이 문득 멈춰 선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해인이었다. 그녀가 돌아섬과 동시에 고개를 숙인 해인은 눈앞에 불쑥 나타난 찢어진 청바지로 인해 적잖이 당황했다.

16549615357936.jpg“안녕하세요.”

16549615328474.jpg“아, 네. 안녕하세요.”

16549615357936.jpg“오빠랑 미국에 같이 갔었어요. 그날 공항에 있을 때 전화하셨죠?”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수빈과는 사적으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멍하니 있던 해인은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화르르 얼굴이 붉어졌다. 이쯤 되니 자신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인지 모르고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녀와 통화를 한 심 대리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굳이 그녀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16549615328474.jpg“그 이야기가 지금 이 자리에서 중요한가요?”

16549615357936.jpg“아! 미안해요. 괜히 사적인 질문을 했네요. 실례했어요.”

해인은 알 수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말 속에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대기업의 딸이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면 친근해진다. 사진은 그 환한 웃음만 담을 것이니. 물론 그녀는 정말로 친근하고 순수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저의가 너무나 뻔했다.

16549615357936.jpg“잠시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지금 회의 중이라며 거절을 하려 했는데 자신과 눈이 마주친 승윤이 먼저 고개를 끄덕여버린다. 하는 수없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옆 회의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수빈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16549615357936.jpg“지훈 오빠랑 같이 일하는 거 안 불편하세요? 이혼까지 했는데…….”

수빈이 작정이라도 한 듯 물었다. 남의 사생활을 저렇게 여과 없이 치고 들어와도 되는 건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다.

16549615328474.jpg“미안하지만 내가 수빈 씨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16549615357936.jpg“실례했다면 죄송해요. 난 그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되어서요. 지훈 오빠 이미지도 있는데…….”

16549615328474.jpg“지훈 씨가 먼저 제안한 일이에요. 그렇게 걱정되면 지훈 씨 만나서 직접 이야기해 보세요.”

16549615357936.jpg“나, 지훈 오빠 어머니 자주 만나고 있어요. 집안끼리 결혼이야기도 오고 가고 해서 어머님은 내가 며느리로 들어올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거든요. 이번에야말로 제법 그럴듯한 결혼을 시키고 싶다면서요.”

수빈은 다짜고짜 화제를 전환했다. 해인의 말문이 막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법 그럴듯한 결혼이라! 제 시어머니였던 그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한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이미 이혼한 상황이니 그분의 욕심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법 그럴듯한 결혼이라며 은근 비하하는 말을 내뱉는 저 여자는 몹시도 불쾌했다.

16549615328474.jpg“그래서요?”

16549615357936.jpg“지훈 오빠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했지만 이번엔 양가 부모님들도 기대하고 계세요. 알잖아요. 해인 씨도 그런 결혼을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전부인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니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일을 하기로 했으니 하는 동안엔 뒷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줬으면 좋겠어요. 오해하진 마시고 부탁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그런 결혼. 해인에게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었다. 처음엔 저 자신도 그랬다. 지훈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으면서도 그 결혼은 도피이며 계약일뿐,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지훈은 수빈과 그런 결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울적해진다. 저런 말을 대놓고 하면서 오해하지 말라고?

16549615328474.jpg“몰랐네요. 기정사실이라면 어느 정도 떠들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16549615357936.jpg“집안끼리 조용히 진행하고 있어서 그렇죠.”

16549615328474.jpg“지훈 씨도 모르는 것 같던데…….”

해인의 결정적 한마디에 수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6549615357936.jpg“어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오빠, 그러니까 지훈 오빠를 따로 만나기라도 한 건가요?”

따로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직 한집에서 지낸다고 하면 이 여자는 어떤 얼굴을 할까. 맘 같아선 저 무례한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미 나간다고 한 남자를 무기로 삼을 수는 없었다.

16549615328474.jpg“나한테 이러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지금 나한테 했던 이야기 그대로 지훈 씨와 다시 이야기하세요.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16549615357936.jpg“어머. 시간 낭비라뇨? 내가 지금 할 일 없이 여기서 이러고 있단 뜻인가요?”

16549615328474.jpg“네. 그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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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은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해인의 태도에 수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공항에서 전화를 받은 지훈은 그 후부터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계속해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뭔가 잊고 온 사람처럼 자신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비행기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고 결국은 미국에서 식사를 같이하자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한국으로 와버렸다. 뭔가 이상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며칠 전 심 대리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알아보니 지훈이 이 회사에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럴수록 비행기에서의 지훈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혹시 지훈이 후회라도 하는 것이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서 그의 마음을 또 뺏기기는 정말 싫었다. 수빈이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터치를 하더니 그 핸드폰을 해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메시지 창이 열려 있었다.

16549615471336.jpg[나도 그래. 나한테 이제 며느리는 꼭 수빈이 너였으면 좋겠구나.]

16549615357936.jpg“어머니께 온 메시지예요. 내가 이번엔 꼭 어머니 며느리 되고 싶다고 하니까 보내주신 메시지예요. 우린 이런 사이라고요.”

16549615328474.jpg“그래서요?”

16549615357936.jpg“그래서라뇨?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알아서 처신 잘하라는 소린데?”

하! 해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16549615328474.jpg“이봐요. 나는 처신을 잘못한 적이 없거든요. 그렇게 어머니 며느리가 되고 싶으면 알아서 지훈 씨 마음 잘 잡아보세요. 그럼.”

해인이 수빈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상대방을 향한 배려도 없고 심지어 무례하기만 한 여자와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만나봐야 한다고 대중에게 비쳐지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는 많이 다른 듯했다. 차마 회의실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는데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둘 중 하나일 텐데……. 자신감, 아니면 불안함. 전자일까 후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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