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건 다 너 때문이다.2022.01.16.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는 수빈에게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지훈의 마음을 얻지는 못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무심한 남자이니 제게 했던 것처럼 수빈에게도 별다른 관심이 없겠지. 그렇다면 둘은 왜 같이 미국에 갔을까. 마음은 없으나 어머니 뜻대로 하겠다는 뭐, 그런 뜻인 건가. 아이의 존재에 대해 말하려 했는데……. 아이로 인해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 * * 그날 저녁. 지훈은 정확히 아홉 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해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았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에요.”
“일정이 늦어져서 회의 참석도 못 하고 미안하게 됐네. 회의는 잘했어?”
“잘했어요.”
오늘 왔으면 수빈의 얼굴을 봤을 텐데……. 모델로 발탁되었다는 건 그녀가 직접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 팀장에게 전화는 받았어. 이미지 작업 잘되어가고 있다는 말도 들었고. 이번엔 바빠서 못 갔지만 다음 회의 때는 나도 꼭 참석하도록 할게.”
“네. 그래요.”
해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지훈은 묘하게 무거운 해인의 분위기를 금방 알아챘다. 아침에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가 가볍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아침에 할 말 있다고 했지?”
질문을 받고도 해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가 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한강그룹의 딸과 결혼이야기까지 오가는 사이인데 여전히 전처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아침에 하려던 말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
“지훈 씨랑 계속 이렇게 같이 사는 거 많이 불편해요.”
역시 이거였구나. 지훈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불편한 거 이해해.”
“미안해요.”
“아니야. 해인이가 미안할 일이 아니지.”
지훈의 목소리가 축 처진다. 그런 지훈을 보는 해인은 낯선 기시감을 느꼈다. 그에겐 어울리지 않지만 최근 들어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가 이 집에 다시 들어왔을 때의 모습은 당당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마치 싸움에 진 패배자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때린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풀죽은 사람처럼 앉아 있을까.
“지훈 씨가 먼저 나간다고 해서 편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 알아.”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사람? 누구?”
조근조근 해인의 말에 수긍하던 지훈의 눈동자가 커진다. 같은 집에 사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모님도 모르고 있을 텐데…….
“앞으로 그런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 말이에요. 지훈 씨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혼한 전처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말이 돌면 좋을 게 없잖아요.”
“좋을 게 없다니?”
지훈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딱히 그런 것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해인은 지훈의 반응을 이해했다. 타인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예요. 내가 부담스럽고 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 그게 중요해요.”
그는 어떨지 모르지만 해인은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다. 이래저래 시댁 쪽 눈치도 봐야 하고 부친의 회사에서 혹시라도 다른 말이 나올까 그것 또한 걱정이다. 지훈에게 뭔가를 기대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저 남자가 나간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그와 함께 떠났던 여자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를 들었다. 나름 기대했었던 그 무언가가 또다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랄까. 낮에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우리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지훈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리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해인이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어디까지나 집주인이지 않은가. 지훈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먼저 나간다고 했으면서도 막상 해인의 입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지훈은 당장의 서운함 탓에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같이 사는 게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그게 또 사람 마음 먹기에 달린 것 아닌가. 아니, 이 경우엔 사실 나가는 것이 맞다. 실상은 할 말이 없었다. 난 대체 여길 왜 온 걸까.
“내가 너무 냉정한가요?”
“아니야.”
솔직히는 아주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집을 다시 돌려주고 자기가 나가겠다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굳이 서운해할 이유는 없는데……. 내가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훈은 마음을 다잡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먼저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이해해줘서 저도 고마워요.”
“고맙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인데. 그런데 설마 지금 당장 나가란 뜻은 아니지?”
“아니에요. 그건.”
“그래. 그럼 내일 아침에 짐 챙겨서 나가는 것으로 할게.”
해인은 가슴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음에도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이제 남남이니 다시는 이전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 거라며.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이후 아침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여 어색한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해인이 일어났을 때 지훈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지훈이 들고 왔던 캐리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침대 옆 협탁에 해인이 주었던 시계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의문이다. 대체 저 시계는 왜 자꾸 두고 가는 걸까.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훅 치밀어 올랐지만, 해인은 기실 그 감정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이혼을 하던 그 날. 그가 떠나고 홀로 남았을 때. 그리고 공항에서 혼자 돌아왔을 때 익히 느꼈던 어떤 허전함이었다. 물론 그 강도가 훨씬 약해져 이젠 그러려니 하면서도 감정이란 것은 늘 파편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흔적을 남기고야 만다. 익숙해졌던 일상에 침입자처럼 나타난 그로 인해 다시 흔들렸었다. 이젠 그 흔들림을 지우고 다시 또 익숙해져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렇게 해인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 * *
“상무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결재, 부탁드린다고 했잖습니까.”
“아!”
그래. 이미 다 읽었고 사인만 하면 되었는데 문득 멍해지고 말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호텔 예약 좀 해라.”
“예에?”
책상 앞에 서 있던 비서 상진이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두 분이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가 잘 안 됐을까.
“혹시 형수님과 싸우셨어요?”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쫓겨났지. 좋게 말하면 정중히 나가 달라 부탁을 한 거지만 결과적으로 쫓겨난 것이다. 하지만 비서 앞에서 있는 그대로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남자 자존심이 있지.
“그럼 쫓겨나신 거예요?”
비서란 놈이 그 자존심을 완전 뭉개 버린다.
“너는 내가 누구한테 쫓겨날 사람으로 보이냐?”
“아, 아니요. 아닙니다. 절대 그럴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 왜…….”
“해인이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알아서 나왔어. 편하게 지내라고.”
“아! 역시 쫓겨나셨군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지훈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이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시끄럽고. 서류 들고 나가.”
“그러게. 제가 평소에 잘 좀 하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결국 뿌린 대로 거둔다고…….”
“안 나가냐!”
“나갑니다. 나가. 에휴.”
상진이 궁시렁거리며 문을 열고는 차마 나가지 못하고 잠시 멈춰 선다. 차려준 밥상의 의미도 모를 저 상사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염탐이라도 해야겠다.
“저녁에 술 한잔할까요?”
“됐다.”
“한잔합시다. 저도 요즘 힘들어서 술이 먹고 싶었단 말입니다.”
“힘들어?”
“예. 여러모로 지치고 힘들고 뭐, 그렇습니다.”
“네가 힘들다면야 뭐,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 * * 상진은 어려서부터 지훈을 알았다. 일찍 부친을 잃은 그는 신온이 후원하는 장학생들 중 하나였다. 연말이면 장학생들을 초청해 행사를 열어 장기자랑도 하고 회사를 견학시켜 주기도 했다. 지훈이 그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장래의 꿈을 말하던 상진을 본 것이었다. 자신보다 겨우 두 살 어린 중학생이 신온의 미래가 될 것이라며 당찬 포부를 밝히는 모습을 인상 깊게 봤었다. 그 후 상진은 당당히 신온에 입사했고 지훈의 콘택트로 비서가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잘 계시지?”
“그럼요. 늘 상무님께 감사하다고.”
“내가 뭘.”
“가끔씩 한우를 들고 집에 찾아와 주셨던 걸 말씀하시곤 합니다.”
“어머니 집밥이 맛있어서 간 거야.”
“하하. 생각나면 언제든지 오시라고 늘 그러십니다.”
감사했다는 듯 웃으며 상진이 지훈의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지훈은 천천히 그 맥주를 마셨고 상진은 안주로 나온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더니 술은 안 마시고 치킨으로 배를 채우고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지훈은 천천히 남은 맥주를 들이마셨다.
“근데 요즘 너도 무슨 힘든 일 있냐?”
“외로워서 그럽니다. 연애해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납니다.”
“하면 되잖아.”
“연애를 뭐, 혼자 합니까. 솔직히 누구 때문에 그럴 시간도 없고요.”
“누구?”
“음……, 있습니다. 수시로 불러내서 일을 시키시는 어떤 상…….”
사, 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 상진이 흘깃 눈치를 살피며 말을 끊었다. 기껏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나저나 형님 이야기나 한번 해보십시오. 어쩌다 쫓겨나시게 된 겁니까.”
“쫓겨난 거 아니라고.”
쫓겨났다는 말에 지훈이 울컥하고 말았다.
“네, 네. 그러니까 제 말은 어쩌다 다시 나오셨냐고요.”
“해인이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나온다고 했어.”
“큰맘 먹고 거기까지 가셨으면 이렇게 쉽게 물러나시면 안 되지요.”
“무슨 말이야?”
“그걸 꼭 제가 제 입으로 말해야 압니까. 형님도 참.”
지훈이 정말로 못 알아듣는 것처럼 대답하자 상진은 속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저 아둔한 상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물러나고 말 것도 없어. 이미 이혼했는데 같이 사는 게 더 이상하지.”
“형님은 형님이 이미 이상해진 거 모르시지요?”
“내가 뭘…….”
“미국 간다고 일정 길게 잡아놓고 어쩔 때는 얼른 떠나버리고 싶다고 하시고, 또 어쩔 때는 가기 싫다고 하시고,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랬어?”
“네. 그랬습니다. 그래놓고는 미국 가자마자 돌아오셨죠.”
지훈은 자신이 그랬나 싶은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되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죠?”
“……?”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실 겁니다.”
상진은 연애 바보 상사에게 기초적인 조언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알아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가슴이 왜 뚫리냐.”
“그게 원래 그런 거니까 얼른 인정하시고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시면 됩니다.”
“나는 원래 정신이 똑바른 사람이거든.”
상진이 보기에 지훈은 이미 이상해져 있었다. 간혹 얼빠진 사람처럼 굴고, 굳이 계획을 변경하고. 그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일을 바로잡아 가급적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다시 찾아오시면 됩니다.”
“찾아오긴 뭘 찾아와. 자꾸 헛소리하지 마라.”
“하! 진짜 답답해서 미치겠습니다.”
“그럼 미치든지. 정신병원은 내가 알아봐 줄게.”
“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상진이 제 가슴을 치며 온몸으로 답답함을 표출했다. 지훈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상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정말 그의 말처럼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고,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설마 해인이었을까. 해인. 그 이름 자체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지훈은 아직 이 감정에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 한들 이대로 그 감정을 묵살하지도 못할 듯했다. 하여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못 나간다. 이건 다 너 때문이다. 나는 좀 더 너를 지켜봐야겠다. 아주 가까이에서. 뻔뻔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설마 길거리에 나앉게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냉정한 여자는 아닐거야. 결론을 내리고 나니 아침에 들고 나온 캐리어가 원망스럽다. 하루만 더 있다 나간다고 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