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아기 양말. (48/92)

15. 아기 양말.20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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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이 상진과 술을 마시고 있을 그 시각, 해인은 성북동에 있었다. 낮에 부친으로부터 가족 식사를 하자는 전화를 받았었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새삼스러웠지만,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성북동으로 향한 것이다. 난영과 세나는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16549832587946.jpg“너는 우리가 네 집에서 쫓겨나듯 그렇게 나왔는데 전화 한 통 없더구나.”

1654983258795.jpg“맞아. 언니, 은근 냉정한 구석이 있어.”

은근 냉정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해인은 별다른 대꾸 없이 부친을 향해 인사를 했다.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던 주석현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16549832587953.jpg“다들 가서 앉아. 밥 먹을 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느새 표정을 고친 난영과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세나가 먼저 식탁으로 들어갔고 해인이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식탁엔 나름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맛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식욕이 없는 탓에 해인은 먹는 것이 시원찮았다. 그 모습을 보던 석현이 퉁명스레 물었다.

16549832587953.jpg“왜 그렇게 못 먹는 거냐? 맛이 없어?”

16549832587961.jpg“아니에요.”

1654983258795.jpg“언니가 원래 뭘 많이 먹지는 않았죠.”

가만있어도 될 세나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석현은 탐탁지 않은 듯 세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난영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느라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식사가 끝나고 석현은 서재에서 해인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16549832587953.jpg“그래. 일은 잘되는 것이냐?”

16549832587961.jpg“잘되고 있어요.”

16549832587953.jpg“실은 부탁이 있다.”

16549832587961.jpg“무슨…….”

16549832587953.jpg“M&A 말이다. 윤 서방에게 안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넌지시 말해 보아라. 아직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으니 네가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를 일이 아니냐.”

16549832587961.jpg“아빠!!!”

해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투자의 조건이었을 텐데 이제 와서 부탁이라니 부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16549832587953.jpg“알아. 네 성격에 그런 말 잘 못한다는 거. 그래도 우리 엘브는 이제 해인이 네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네가 잘해볼 생각을 해야지.”

16549832587961.jpg“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에요. 지훈 씨는 이미 M&A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아빠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만에 하나 투자금을 거둬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16549832587953.jpg“그러니 네가 이야기를 해보란 것이다. 네가 이야기하면 달라질지도 모르잖니.”

16549832587961.jpg“우리 이미 이혼했어요. 그 사람은 사업적으로 냉정한 사람이라 제 말을 듣지 않을 거고요.”

16549832587953.jpg“그렇게 냉정한 사람이 왜 끝까지 너를 챙긴단 말이냐. 듣자 하니 한남동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있다며.”

16549832587961.jpg“잠깐 있었을 뿐이에요. 지금은 호텔로 다시 갔고.”

호텔로 갔다는 말에 석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에 그늘이 깊어진다.

16549832587953.jpg“그러게, 네 시어머니가 회사 일 해보라고 했는데도 왜 말을 듣지 않고 부티크만 주구장창 다닌 게야. 내가 너를 신온그룹에 시집 보낸 건 거기서 단단히 한몫 챙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야. 똑똑한 네가 잘할 줄 알았지.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주는 밥그릇도 차버릴 줄 누가 알았냐고.”

16549832587961.jpg“아빠는 얹혀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세요?”

16549832587953.jpg“얹혀살긴 누가 얹혀살아. 그쪽에서도 우리 엘브가 필요해서 한 결혼인데.”

16549832587961.jpg“그거야 엘브가 무너지기 전이었죠.”

해인이 냉정히 쏘아붙였다. 주 사장도 그것만큼은 부인하지 못했다.

16549832587953.jpg“그러니 더더욱 신온에서 네 몫을 챙겼어야지. 넌 똑똑하니까 네가 뭐라도 했으면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을 거야. 그거야 뭐, 이제 물 건너갔으니 이젠 우리 회사라도 잘 일으킬 생각을 해. 어차피 세나 저것은 틀린 것 같으니까.”

석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평판이 안 좋은 세나를 후계자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난영이 두 눈 부릅뜨고 반대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회사를 다시 일으킬 사람은 이제 큰딸뿐이었다. 원래는 신온에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었다. 사돈 집안에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였기에 가만히만 있어도 해인이 신온의 안주인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만하면 죽은 해인의 엄마도 만족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제 딸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이혼을 선택했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 석현은 자신의 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성북동에서 나온 해인이 택시를 타고 한남동 아파트 입구에서 내렸다. 억지로 밥을 먹은 탓인지 속이 뉘엿거렸다. 어쩌면 그 입덧이란 것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입맛도 없고 먹고 나면 속이 불편하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밀려왔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한 번 주저앉았고 가까스로 일어나 다시 걸어 인도의 한편에 앉아 잠시 쉬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힘을 내어 일어서려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아 다시 휘청일 때였다.

16549832645353.jpg“괜찮아?”

이 목소리는…….

16549832645353.jpg“어디가 아픈 거야?”

지훈이다.

16549832645353.jpg“가자. 병원에.”

이 남자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분명 아침에 캐리어까지 들고 나갔는데.

16549832587961.jpg“여긴 어떻게.”

16549832645353.jpg“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순식간에 해인을 안아 올린 지훈이 이내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대로 병원에 가면 임신이라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다급해진 해인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16549832587961.jpg“아니에요. 잠시 피곤해서 그래요.”

16549832645353.jpg“주저앉아 있었잖아. 거의 쓰러질 뻔했어.”

16549832587961.jpg“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 돼서 그래요. 그냥 집으로 갈 거예요. 집에서 소화제 먹고 쉬고 싶어요.”

의사의 허락이 없는 소화제를 먹을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먹는다고 해야 지훈이 안심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지훈은 해인이 정말 괜찮은지 살피려는 듯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혈색은 조금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괜찮은 듯했다. 정말 이대로 집으로 가도 괜찮은 걸까.

16549832645353.jpg“내가 보기엔 그 정도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16549832587961.jpg“괜찮아요. 좀 쉬면 좋아질 거예요.”

품에 안긴 해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얼굴과 얼굴이 너무 가까워 내쉬는 서로의 숨결이 뒤엉킨다. 그가 왜 여기 있을까라는 의문도 잠시, 어느새 가슴은 뛰고 있다. 이미 남이 되어버린 사람이 힘들 때마다 나타나 위로자를 자처한다. 가족에게마저도 늘 이용만 당하는 것 같은 현실에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사람.

16549832645353.jpg“정말 괜찮겠어?”

따스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며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해인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억거렸다. 분명 어제 나가라고 했었는데 오늘은 또 왜 이럴까.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여길 왜 나타나냐고. 하필 이런 상황에 말이다. 잠시 내려다본 지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16549832587961.jpg“나, 걸어갈 수 있는데…….”

16549832645353.jpg“됐어. 그냥 있어.”

16549832587961.jpg“무거울 텐데…….”

나 2인분이야. 넌 모르지? 내가 무거운 건 다 너 때문이야. 해인이 입술을 뾰로통 내밀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 한 번이라도 안겨봤으면 모를까, 이건 정말 당황스럽다. 지훈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걷고 있다.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지만 다 큰 성인 여자를 안고 걸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아주 쉽게 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엔 단둘만 있었다. 내쉬는 숨소리까지 적나라하게 들리는 상황. 몸이 안 좋으니 설렐 겨를도 없어야 하는데 가슴은 착실하게도 짝사랑했던 남자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격동을 시작한다.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그 격동 소리가 엘리베이터의 소음을 집어삼킬 것만 같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16549832587961.jpg“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16549832645353.jpg“뭐가.”

16549832587961.jpg“짐 들고 나갔잖아요. 나가기로 했고.”

16549832645353.jpg“올라가서 이야기하자.”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성큼 걸어간 지훈이 현관 앞에서 멈춰 선다. 내려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끄떡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바람에 해인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비번을 눌러야 했다. 근육질의 남자라 체력이 좋은 것인지 그는 별로 힘든 기색이 없었다. 솔직히 본인이 안고 온다고 했으니 힘들어도 티를 낼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안으로 들어와 지훈의 몸에서 벗어나기 직전. 급기야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오래 흔들린 탓에 속이 더 안 좋아졌는지 품에 안긴 채로 토하고 말았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토사물은 고스란히 제 가슴 위쪽으로 쏟아졌다. 놀란 지훈이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해인을 내려 주었다.

16549832645353.jpg“괜찮아?”

16549832587961.jpg“으……윽.”

16549832645353.jpg“가만있어. 닦아야 할 것 같은데…….”

16549832587961.jpg“화장대 위에 각 티슈 있어요. 일단 그것 좀.”

재빨리 티슈를 가져온 지훈의 손이 해인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놀란 해인이 그의 손을 툭 쳐내며 휴지를 빼앗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아찔한 상황이 연출 될 뻔했다. 지훈도 그제야 자신의 손이 향하려던 위치가 어딘지를 깨닫고는 멋쩍은 듯 뒤로 물러났다.

16549832645353.jpg“미안. 응급처치만 생각하느라.”

16549832587961.jpg“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그보다는…….”

16549832645353.jpg“…….”

16549832587961.jpg“아까 내가 물은 말에 대답이나 해줘요. 어떻게 여기 있는지.”

16549832645353.jpg“갈 데가 없어서.”

16549832587961.jpg“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16549832645353.jpg“정말이야. 갈 곳이 없어. 본가도 싫고, 호텔도 싫고. 나도 모르게 다시 여기로 오게 되었어.”

지훈은 아직 솔직할 수가 없었다. 이 집을 나가서, 아니 이혼한 이후로 뭔가를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전했다고 한다면 해인이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16549832645353.jpg“그런데 네가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환자를 두고 갈 수는 없지.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 있어야겠지?”

16549832587961.jpg“핑계가 그럴듯하네요.”

16549832645353.jpg“전처럼 없는 듯 지낼게. 당분간만이라도 있을 수 있게 해줘. 어떤 식이든.”

지훈은 동정을 구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해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너를 곁에 두고 봐야 이 마음을 알겠다. 내가 너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왜 이곳을 나가기 싫은지.

16549832587961.jpg“나, 지훈 씨 쉽게 내보낸 거 아니었어요. 어쨌든 이 집은 지훈 씨가 나를 위해서…….”

16549832645353.jpg“소유권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 난 정말 이 집에 더 이상 지분이 없으니까. 자꾸 그 이야기를 하면 내가 나갈 수밖에 없지.”

16549832587961.jpg“…….”

16549832645353.jpg“정말 내가 그렇게 불편해?”

낮게 가라앉은 지훈의 목소리에 해인은 말문이 막혔다. 불편해서가 아니라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였다. 근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불쌍하게 보이는 걸까.

16549832645353.jpg“내가 있는 것이 정말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다. 동정심에 의지하는 수밖에. 지훈은 최대한 눈꼬리를 내리고 불쌍하게 보이려 애를 썼다.

16549832645353.jpg“그렇다면 나갈게. 하지만 난 정말 여기가 편하고, 또 알아봐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잠깐만 있겠다는 거야. 하지만 해인이 네가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내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16549832587961.jpg“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꼴도 보기 싫다고는 안 했는데…….”

16549832645353.jpg“난 정말 집도 절도 없는 심정으로 들어온 거거든. 근데 네가 날 또 쫓아내면 난 그런 심정이 들 것 같아. 그래도 나가야 한다면 나갈게.”

16549832587961.jpg“아니, 내가 무슨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래. 넌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날 쫓아내지 마. 지훈은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동자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 순수한 눈동자를 해인도 어쩔 수는 없었다.

16549832587961.jpg“알았어요. 당분간만이라면…….”

16549832645353.jpg“그래. 고마워.”

혹시라도 취소할까 무서운 지훈이 냉큼 감사를 표했다. 어느새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흘렀다.

16549832645353.jpg“옷부터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 기다려. 가져다줄게.”

지훈이 곧장 침실 옆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탁을 할 때의 목소리와 고맙다는 말을 할 때의 목소리가 아주 달랐다. 뭔가 깨발랄해진 분위기랄까. 나, 낚인 거야? 기분이 이상했다. 그 순간 해인의 정신이 번쩍 뜨인다. 대충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가지고 오면 될 텐데……. 혹시나 서랍장을 열어보면 어떡하나. 당황한 해인이 재빨리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열려 있는 서랍장 앞에 서 있는 지훈의 손엔 해인이 감추고 싶었던 물건이 들려 있었다.

16549832645353.jpg“이게 뭐야?”

16549832587961.jpg“그게…….”

16549832645353.jpg“아기 양말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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