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그날 밤처럼 예쁘면 위험한데……. (49/92)

16. 그날 밤처럼 예쁘면 위험한데…….2022.01.23.

16549832846892.jpg“아, 그게, 그러……니까 친구가 임신을 해서 선물로 주려고 샀어요.”

16549832846898.jpg“그래? 친구 누굴까?”

16549832846892.jpg“있어요. 당신은 몰라요.”

지훈은 실제로 소연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결혼식 때 잠깐 인사한 것이 전부니까. 해인의 그럴듯한 변명에 지훈은 별 의심 없이 아기 양말을 다시 서랍장에 넣었다. 이후 해인이 옷을 찾았고 그것을 본 지훈이 먼저 드레스 룸을 벗어났다. 해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그는 물 한잔을 들고 서 있었다.

16549832846898.jpg“약은 어딨는지 몰라서 일단 물만 가져왔어. 약 어딨는지 말하면 내가 가져다줄게.”

16549832846892.jpg“알아서 먹을게요.”

해인이 물잔을 받아 들었다. 옷을 갈아입었지만 개운치는 않았기에 일단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지훈이 버티고 서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16549832846892.jpg“이제 괜찮으니까 혼자 있어도 될 것 같아요.”

16549832846898.jpg“…….”

16549832846892.jpg“좀 씻어야 할 것도 같고.”

16549832846898.jpg“그래. 그렇게 해.”

16549832846892.jpg“오늘 고마웠어요.”

16549832846898.jpg“그래.”

기분이 좋아진 지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집에 머무를 수도 있게 된 것도 좋은데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지훈이 나간 후 해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치사는 확실히 받는 스타일인지 고맙다는 말을 냉큼 받아먹는다. 이상하게 뭔가 속은 느낌인데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일단 가운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부러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편한 옷으로 다시 갈아입은 후 그가 줬던 물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지훈은 슈트 차림 그대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16549832846898.jpg“이제 좀 괜찮아? 약은 먹었어?”

16549832846892.jpg“먹었어요.”

16549832846898.jpg“좀 어때?”

16549832846892.jpg“게워내고 나니까 한결 편해지긴 했어요.”

16549832846898.jpg“체한 게 맞나보네. 그나마 다행이야. 어디서 뭘 먹고 체한 거야?”

16549832846892.jpg“집에 다녀왔어요. 아빠가 오라고 해서. 그때 봐서 알잖아요. 내가 거기서 편하게 밥 먹을 상황이 아니란 거.”

16549832846898.jpg“또 뭐라고 했어? 내가 쫓아가?”

지훈이 벌떡 일어서고는 허리에 손까지 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제 편을 들어 주는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16549832846892.jpg“아니에요. 별일 없었어요.”

16549832846898.jpg“그럼 다행이고.”

하여간 또 건들기만 해라. 절대 가만 안 둘 것이라고 생각한 지훈이 결의를 다지듯 다시 소파에 앉았다.

16549832846892.jpg“근데 몸만 온 거예요?”

16549832846898.jpg“하 비서가 술 한잔하자고 해서 차를 회사에 그냥 두고 갔거든. 대리 부르기 귀찮아서 택시 타려고.”

16549832846892.jpg“그럼 택시에서 내려서 나를 본 건가요?”

16549832846898.jpg“그랬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처음엔 해인인 줄 모르고 달려갔는데 가까이서 보니 해인이었다. 많이 아픈 건 아닌지 처음엔 정말 놀랐었다. 민망해진 해인이 슬쩍 말을 돌렸다.

16549832846892.jpg“그래서 캐리어가 없구나.”

16549832846898.jpg“오늘은 뭐, 어쩔 수 없지. 내일 아침에 상진이가 차 가지고 오기로 했어.”

16549832846892.jpg“하 비서님이 고생이 많네요.”

지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먼저 술을 먹자고 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다 생각하며.

16549832846898.jpg“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16549832846892.jpg“그래야겠어요.”

16549832846898.jpg“먼저 들어가. 나도 물 좀 마시고 들어갈 거니까.”

소파에서 일어선 지훈이 해인이 반쯤 마신 물잔을 받아 들었다. 물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마시고는 주방으로 향한다. 갈 곳 없는 객이라든가 아직 숙박비도 계산하지 않은 세입자라든가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그 몸짓이 집주인보다 더 당당해 보인다. 피식 미소를 짓던 해인이 뭔가 생각이 난 듯 후다닥 안방으로 내달렸다. 단순히 아기 양말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화장대 서랍장에는 산모 수첩도 있었다. 얼른 수첩을 챙겨 다른 서랍장의 맨 아래를 열어 그곳에 넣고는 켜켜이 옷을 쌓아 보이지 않게 했다. 이 정도면 불시에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 . . 일찍 자야겠다 싶어 침대에 누웠는데 부친과 나누었던 대화가 자꾸만 머리를 떠돌았다. 솔직히 아빠가 밉고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했다. 해인은 아빠가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16549832932342.jpg‘네 엄마는 참, 사람이 어질고 착했었는데…….’

그것은 분명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부친은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엄마랑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결혼을 조건으로 새엄마의 부모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을 받았으니 일종의 빚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저 역시나 세나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분명 달랐지만, 부친의 뜻대로 하다 보면 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화보 촬영은 구실이고 그렇게 하다 특채로 채용을 하는 것이 부친의 계획일 것이다. 세나를 포기한 부친이 제게 회사를 물려준다고 하면 새엄마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텐데……. 어찌 됐든 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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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해인은 허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 어제 먹은 것을 게워낸 후 내내 빈속이라 일어나자마자 뭐가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에 뭐가 있을까. 세수도 하지 않고 부스스한 얼굴 그대로 안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들이 밀려왔다. 이게 뭐지 싶어 주방으로 향하려는데 거실 소파 테이블 앞에 한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앉아 있는 한 남자. 놀란 해인이 테이블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훈 역시 그녀를 보았다.

16549832846898.jpg“어서 와. 이제 일어난 거야?”

해인은 잠옷 차림인 것도 잊고 다다다 달려 테이블 앞에 이르렀다. 전복죽과 된장국, 그리고 스테이크에 샐러드까지. 마치 골라서 먹으라는 듯 펼쳐져 있는 음식들을 보며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어젠 분명히 입맛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먹음직스러울까.

16549832846892.jpg“이게 다 뭐예요?”

16549832846898.jpg“속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 식탁에 차리려다 여기서 편하게 먹으라고.”

16549832846892.jpg“나 소파에서 뭐 먹는 거 완전 좋아하는데.”

16549832846898.jpg“그럴 것 같더라. 일단 속부터 풀려면 죽부터 먹어. 혹시 죽이 싫으면 된장국 먹어도 되고. 스테이크는 내가 먹을…….”

지훈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멍하니 해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포크를 챙긴 해인이 이미 먹기 좋게 썰어져 있는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고 있었다.

16549832846898.jpg“그래. 아무거나 맛있게 먹어.”

고기를 입안에 넣은 채로 우물거리던 해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었다. 배도 고팠지만, 한우의 질감이 아주 좋아 입맛에 딱 맞았다. 뭔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분명해진 느낌이랄까. 정신없이 먹다 보니 비로소 지훈이 아직 출근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16549832846892.jpg“근데 오늘 쉬어요?”

16549832846898.jpg“아니. 해인이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그냥 가기 뭐해서 밥이나 먹는 거 보고 나가려고 기다렸어. 아픈데 혼자 밥 먹으면 힘들잖아. 어제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오늘이라도 기분 좋게 먹으라고.”

아침부터 감격이 밀려온다. 전남편이 꼭 친정엄마처럼 다정해진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먹을 것도 챙겨주고 대신 싸워주기도 하고. 이혼하고 나니 무슨 봄날이라도 맞이한 기분이다. 이혼하길 잘한 걸까. 슬며시 차오르는 웃음을 삼키며 또 한 점의 고기를 입에 넣었다. 지훈은 그런 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호텔 특급요리로 주문을 했는데 아무래도 참 잘한 일 같다. 해인에게 뭔가를 해줄 때마다 기쁨이 솟아난다고나 할까. 지훈은 그 이유를 이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16549832846892.jpg“저기…….”

16549832846898.jpg“…….”

16549832846892.jpg“시계는 왜 또 두고 갔어요?”

16549832846898.jpg“아, 그건…….”

그냥 두고 가고 싶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 시계를 남겨두면 뭔가 또 어떤 일의 구실이 되지는 않을까 해서. 아마도 널 다시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겠지.

16549832846898.jpg“마지막에 챙기려 했는데 깜박하고 또 두고 갔네. 그냥 해인이 가져.”

16549832846892.jpg“남자 시계는 필요 없는데…….”

16549832846898.jpg“그것 팔면 돈 꽤나 될 거야.”

16549832846892.jpg“나, 돈 많은데. 누가 아주 많이 줘서.”

16549832846898.jpg“아!”

지훈이 멋쩍은 듯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와중에도 해인은 포크로 고기 조각을 찍어 입에 넣는다. 기분 나쁘지 않게 팩트를 콕콕 찍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저렇게 잘 먹는지도 모르겠다.

16549832846898.jpg“물이 없네. 물 가져올게.”

지훈은 괜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오물거리며 고기를 씹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자꾸만 쳐다보고 싶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컵에 물을 채워 정신 차리라는 듯 먼저 한 모금을 넘겼다. 몸은 시원해지는데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름 정신을 수습한 지훈이 새 컵에 물을 담아 테이블로 돌아와서는 맞은 편으로 가지 않고 해인의 옆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인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들고 있는 포크를 빼앗아 스테이크 한 점을 뺏어 먹는다.

16549832846892.jpg“먹고 싶었어요? 진작 말하지.”

16549832846898.jpg“워낙 맛있게 먹어서 한 대 맞을까 봐.”

16549832846892.jpg“흐흐. 양이 많으니까 괜찮아요.”

해인이 해맑게 웃었다. 지훈은 그 웃음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있으니 꼭 그날 밤 그때처럼 해인이 예쁘게 보인다. 저렇게 웃지 말지. 사람 설레게. 그날 밤처럼 예쁘면 위험한데…….

16549832846892.jpg“어제오늘 물 셔틀 하느라 고생이 많네요.”

16549832846898.jpg“알아줘서 고마워.”

16549832846892.jpg“외부 촬영을 할 장소를 알아보러 가야겠어요. 우영이랑.”

16549832846898.jpg“나랑 가.”

16549832846892.jpg“직접 가려고요?”

16549832846898.jpg“응.”

16549832846892.jpg“그럼 우영이랑 셋이 가요.”

16549832846898.jpg“아니. 우리 둘이 가.”

16549832846892.jpg“셋이 가서 봐야 더 좋은 장소를 고르지 않을까요?”

16549832846898.jpg“됐어. 무조건 둘만 가는 거야.”

지훈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해인도 결국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이크 잘 먹고 갑자기 표정이 굳어버린 이유를 모르겠다. 그나저나 오수빈이 함께 촬영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아직도 모르는 건가. 수빈이 금방이라도 달려갈 줄 알았는데…….

16549832846898.jpg“같이 술 마시고 싶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해인의 귓가로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16549832846898.jpg“술 마시면 실수한다며. 말도 많아지고 헤실헤실 웃기도 하고. 나 그런 해인이 모습 보고 싶은데…….”

16549832846892.jpg“굳이…….”

해인이 말꼬리를 늘이며 별일이라는 듯 지훈을 바라보았다. 뜨끔해진 지훈이 눈을 내리깔았다.

16549832846898.jpg“그러게. 내가 왜 이럴까.”

굳이 여기까지 와서 왜……. 어쩌면 그 이유들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웃는 모습이 귀엽고 예쁘고 심지어 사랑스럽다. 그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뭐, 이미 끝난 거겠지. 지훈은 제 가슴을 간질이는 것들에 대해 조금씩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6549832846898.jpg“사람이 실수도 하고 그럴 수 있잖아. 한 번씩 헛소리도 하고. 그러다 진심도 알게 되고 뭐 그런 거 아닐까?”

실수? 갑자기 무슨 실수? 해인은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한다는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윽하게 변한 그의 눈동자.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어쩌라는 건데……. 이내 고개를 돌린 해인이 나직이 말했다.

16549832846892.jpg“그렇죠. 뭐. 사람이 가끔 실수도 하고 그래야 재미도 있고, 뭐…….”

말을 끝내고는 어색하지 않게 방긋 웃어주었다. 그 웃음이 지훈의 본능을 자극한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16549832846898.jpg“내가 재미없었단 뜻이야?”

16549832846892.jpg“그게 아니라…….”

사실 그 뜻이긴 한데……. 너무 완벽하니 쉽게 말 걸기도 어려웠는데 재미가 있을 틈이나 있었겠냐고. 근데 이 남자가 좀 이상해지긴 했다. 미국 다녀온 이후 말도 많아지고 헛소리도 하는 것 같고.

16549832846898.jpg“괜찮아.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건 잘 아니까.”

별일이다. 하여간 별일이다 싶은 해인이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고해성사를 하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알쏭달쏭하지만 뭔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16549832846898.jpg“변화와 새로운 시작. 어때?”

16549832846892.jpg“뭐가…….”

순간적으로 말이 끊겼다. 마주하는 지훈의 눈동자가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미묘해진 것 같은데……. 괜스레 심장이 거칠게 뛰는데 이건 또 왜 이러나 싶다. 지훈은 그런 해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날 밤 그때처럼 너는 또 예쁘다. 그 입술을 향해 그대로 다가갔다. 짧은 입맞춤이 해인의 입술에 닿았다 사라졌다. 해인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지훈을 응시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저 얼얼할 뿐이다.

16549832846898.jpg“아! 이건 실수 아니야.”

16549832846892.jpg“…….”

16549832846898.jpg“지금 너무 예쁘잖아. 그날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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