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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지금은 이혼 전이 아니라는 걸. (50/92)

17. 지금은 이혼 전이 아니라는 걸.2022.01.27.

이게 무슨……. 놀란 해인의 두 눈이 커진다. 예뻐서 했냐? 그럼 난 수백 번도 더 했을 거야. 네가 잘생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참나. 이런 것으로 맞짱 뜨자고 할 수도 없고. 뭔가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같은데……. 이미 이혼까지 한 마당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6549833112559.jpg“왜 가만있어?”

16549833112565.jpg“그러게요. 뺨이라도 날려야 하는데 순발력이 없어서 늦어버렸네요.”

16549833112559.jpg“그건 너무 심하다.”

16549833112565.jpg“심한 건 전남편이죠. 지금은 이혼 전이 아니라는 걸 잊은 것 같습니다만.”

결국, 뼈를 얻어맞고 말았다. 진짜 맞은 건 아니지만 그 말은 지훈을 충분히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제게 있어서 실수가 있다면 아마도 그 이혼일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해인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으로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16549833112559.jpg“안 잊었어. 그래서 애석하게 생각하는 중이야.”

16549833112565.jpg“…….”

16549833112559.jpg“우리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당황한 해인은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석하다고? 뭐가? 진지하게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데 그의 얼굴엔 푸근한 웃음이 걸려 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이게 다 넙죽넙죽 뽀뽀를 받아줘서 그런 것이다. 주해인. 진짜 이렇게 쉬운 여자 아닌데…….

16549833112565.jpg“출근 안 해요?”

16549833112559.jpg“먹는 것 봤으니까 이제 가봐야 하긴 하는데…….”

시계를 확인한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테이블 아래 두었던 가방을 챙겼다.

16549833112559.jpg“저녁은 혼자 먹어야 할 거야. 너무 늦지 않게 올게. 우리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번엔 목소리가 꽤나 진지했다. 가벼운 듯 가볍지만은 않은 지금의 상황. 해인은 멍하니 멀어지는 지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갈 곳이 없다며 다시 들어온 남자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왜, 어째서라는 의문이 해인의 가슴을 휘젓는다. 저 남자는 자기 집안 돌아가는 사정은 전혀 모르나 보다. 오수빈과 자주 만나는 것 같지도 않고. 만약 만났다면 오늘 모델에 관해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해인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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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리 없건만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아 또다시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인 걸까. 해인은 이미 결정을 내린 일에 대해 후회를 한다거나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돌아섰을 때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 배 속의 태아만 아니었어도 다시 연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미 끝나버린 사랑에 미련을 남기긴 싫었다. 지훈이 혹시 자신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해도 이미 엇나간 인연이지 않은가. 해인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공항으로 가게 만들었던 이유. 바로 지훈과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그것이었다. 해인은 여전히 지훈을 보며 설레면서도 아이만 아니라면 흔들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제 본심을 비켜나갔다. * * *

16549833141668.jpg“정말 안 드실 겁니까?”

16549833112559.jpg“응. 가서 혼자 먹고 와.”

16549833141668.jpg“해장하셔야지요.”

16549833112559.jpg“나 어제 술 별로 안 먹었다. 그리고 어차피 아침에 해장도 했고.”

사무실 책상에 앉은 지훈이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일어나지 않고 서류만 검토하고 있다. 때때로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데 그 모습이 뭔가 살짝 맛이 간 느낌이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상진이 의미심장하게 다시 물었다.

16549833141668.jpg“진짜 안 드십니까?”

16549833112559.jpg“응.”

16549833141668.jpg“배고프실 텐데…….”

16549833112559.jpg“신경 끄고 가서 먹으라니까.”

16549833141668.jpg“나중에 후회할 텐데…….”

16549833112559.jpg“빨리 안 나가?”

급기야 지훈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펜을 들고 곧 던져버리겠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도 살벌하다. 어깨를 으쓱한 상진은 어쩔 수 없이 홀로 밖으로 나왔다. 아무렴 상사가 좋아서 같이 밥 먹자고 했겠는가. 행여나 어제 또 쫓겨난 건 아닌지 염려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밥이라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그런데 어쩐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헤실헤실 웃는 저 얼굴을 보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상진이 나간 얼마 후였다. 문이 활짝 열리고 요란한 구두 소리와 함께 수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수빈의 등장에 지훈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6549833112559.jpg“갑자기 회사에는 무슨 일이야?”

16549833168718.jpg“오빠. 나 점심 좀 사줘. 밖에서 하 비서님 만났는데 오빠 식사 안 하셨다 하더라고.”

지훈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다.

16549833112559.jpg“내가 회사로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 아침을 늦게 먹어서 점심 생각 없는데.”

16549833168718.jpg“그럼 나 먹는 거 지켜봐.”

16549833112559.jpg“내가 왜.”

16549833168718.jpg“아이. 진짜.”

수빈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지훈의 팔짱을 끼며 응석 부리는 아이처럼 매달렸다. 가히 친동생이라 할 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16549833168718.jpg“그냥 좀 사주면 안 돼? 나 배고프단 말야.”

16549833112559.jpg“내가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랬지. 너 공항에서도 이래서 나한테 혼났잖아. 기억 안 나?”

16549833168718.jpg“안 나. 그나저나 오빠. 우리 아빠가 집에 좀 놀러 오래. 우리 어렸을 땐 한라회 모임도 많이 해서 같이 만나면 좋았는데. 요즘엔 얼굴 보는 것도 뜸하잖아.”

지훈은 강제로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이럴 땐 귀찮은 것 중의 하나였다. 지훈의 부친과 수빈의 부친은 유력 기업인들의 사모임인 한라회의 일원이었다. 특히나 두 사람은 나름 친밀한 관계였기에 가족 모임을 통해 자연스레 지훈과 수빈도 알게 되었다.

16549833112559.jpg“내가 한가해 보이냐.”

16549833168718.jpg“칫. 맨날 바빠.”

16549833112559.jpg“수혁이는 잘 있어?”

16549833168718.jpg“뭐, 그럭저럭.”

16549833112559.jpg“나한테 이러지 말고 네 오빠한테나 잘해.”

16549833168718.jpg“우리 사이 별로인 거 뻔히 알면서.”

16549833112559.jpg“그러니까 잘하라고.”

16549833168718.jpg“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오빠네 잡지 모델 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왜 한마디도 없어? 바빠서 전화 끊었으면 오빠가 다시 전화해야지. 너무하잖아.”

16549833112559.jpg“아! 맞다. 깜박하고 있었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16549833168718.jpg“먼저 연락 왔던데?”

16549833112559.jpg“그래?”

지훈은 뭔가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구겼다. 딱히 수빈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는데 왜 기분이 별로일까.

16549833168718.jpg“오빠. 호텔 어디 묵는 거야? 내가 다 찾아봐도 없던데?”

16549833112559.jpg“그냥 전에 살던 집으로 들어갔어.”

16549833168718.jpg“뭐?”

16549833112559.jpg“전처와 같이 살고 있다고. 세입자로.”

충격을 받은 수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틀 전 만난 그 여자는 전혀 그런 말이 없었다. 뭔지 모르게 농락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49833168718.jpg“왜? 있을 곳이 없어? 오빠, 원래 본가 아니면 호텔 아니었어?”

16549833112559.jpg“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지훈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차갑게 돌아오는 말에 수빈은 할 말을 잃었다. 나름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훈이 엘브에 투자를 했고 그 과정에서 특별 기획 화보를 추진했다고 했다. 지훈이 직접 전처인 주해인이라는 여자에게 스타일링을 제안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훈이 전처와 다시 일하는 것만으로도 수빈은 뭔가가 불안했다. 지훈의 미국 일정을 알았을 때 우연을 가장해 그와 같은 비행기에 올랐었다. 지훈을 다른 여자에게 뺏기는 것은 3년 전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그땐 자신도 어렸기에 결혼이란 것이 족쇄처럼 여겨져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집안에서 간혹 결혼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지훈이 결혼을 했을 때도 큰 충격 같은 것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혼 소식을 들었을 땐 비로소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아니어도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16549833112559.jpg“하 비서 금방 밥 먹으러 갔는데 따라가서 같이 먹든가. 전화해줘?”

기껏 하 비서 같은 사람과 밥을 먹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귀찮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지훈을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전처라는 여자가 자꾸 걸리적거린다. 이혼까지 했으면서 왜 두 사람은 아직도 만나고 있을까. 천천히 지훈의 곁에 머물 생각이었던 수빈은 어느새 조급해지고 있었다. * * * 00클럽 VIP룸. 얼음을 채운 위스키 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잔을 비워낸다. 제법 큰 룸인데 사람은 둘뿐이었다. 방음이 잘된 탓에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6549833224194.jpg“수빈이 그러는 거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

16549833224194.jpg“이번엔 좀 다른 것 같더라고.”

수혁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앞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재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지훈과 친구였고 어려서부터 아는 사이였다.

16549833224194.jpg“그렇다고 지훈이 잘못은 아니잖아. 아직도 열등감에서 못 벗어났어?”

16549833224194.jpg“그러게. 지금은 괜찮은 줄 알았더니.”

16549833224194.jpg“네 아버지께서 좀 심하시긴 했지. 나 있을 때도 지훈이만큼만 해보라며 험한 말을 하셨잖아. 혹시 아직도 그러니?”

16549833224194.jpg“지금은 더 하시지. 수빈이가 지훈이 관심 있어 하니까 당장에라도 결혼 추진하라고 난리가 아니야.”

16549833224194.jpg“지훈이를 믿어 봐.”

16549833224194.jpg“믿어도 될까?”

16549833224194.jpg“응. 내가 아는 지훈이는 절대 수빈이랑 결혼 안 할 거야. 관심도 없는 것 같고.”

허탈하게 웃은 수혁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지훈이 이혼을 하자마자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마치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재원은 수혁을 위로하면서도 마음이 심란했다. 수혁이 지훈을 향해 날을 세우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늘 비교의 대상이 된 친구를 좋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16549833224194.jpg“이번에도 수빈이 대뜸 결혼한다고 소문부터 내면 어떡하냐?”

16549833224194.jpg“불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예전에도 세주그룹 딸이 윤지훈한테 들이대니까 먼저 사귄다고 소문낸 거잖아. 윤지훈이 딱히 대꾸를 하지 않으니 기정사실로 되었고. 윤지훈 미국 가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비행기 표까지 구해서 나란히 떠났더라고.”

16549833224194.jpg“내가 지훈이 한번 만나봐야겠다. 입장 확실히 하라고. 그리고 우리 언제 한번 다 같이 만나자.”

16549833224194.jpg“나중에.”

수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여동생인 수빈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여동생은 결혼을 무덤 중 하나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지훈과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쫓아다니지만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걸 알아서인지 지훈은 여동생을 여자로서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재벌들의 결혼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수혁이 불안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16549833224194.jpg“아 참. 수빈이가 안성 모직 아들을 만난다더라.”

16549833224194.jpg“안성 모직?”

16549833224194.jpg“응. 안형준이라고 나도 친구한테 들었어. 수빈이 왜 그런 놈을 만나지?”

16549833224194.jpg“왜?”

16549833224194.jpg“그냥. 지훈이 와이프랑 이 전에 만나는 사이였다는데 한 번씩 하는 말들이 웃기더라고. 그렇게 결혼할 줄 몰랐다나 어쨌다나. 이혼하니까 좋아했다던데, 나도 들은 말이라서 자세히는 몰라.”

16549833224194.jpg“그래? 지훈이는 모르는 것 같던데.”

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친구의 와이프라지만 해인에 대해선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없었다. 지훈이 언급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녀와 따로 만남을 가진 적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 * * 머지않아 이른 장마가 시작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어지던 아나운서의 멘트가 끝나고 노래도 흐르기 시작했다. 물론 운전하는 지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해인의 눈동자가 진한 고동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없을 땐 눈가를 살짝 찡그리는 것도 보았다. 대부분은 무표정했지만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레 반짝이던 눈동자도 보았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발견했을 땐 그 고동색 눈동자에서 금가루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사랑스러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던 입맞춤. 지훈은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보는 내가 변했구나.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달라졌구나.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싶으면서도 그만큼 또 빨리 변화는 다가오고 있었다. 이젠 고백해야 할 때임을 깨달은 지훈의 마음은 이미 해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불 꺼진 텅 빈 집 안. 지훈은 홀로 서 있다. 늘 있어야 할 그녀가 없는 것이다. 저녁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혹시나 잠을 자나 싶어 안방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침대 위에도 그녀는 없었다. 잠깐 외출했나 싶어 전화를 걸어보았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으며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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