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다림의 시간.2022.01.30.
은은한 음악이 흐름에도 해인은 왠지 시끄럽게 느껴졌다. 아마도 원치 않는 사람과 마주 앉은 까닭일 것이다. 저녁에 지훈은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궁금하면서도 듣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와서 피차 대화가 많아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던 그때 형준에게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는 지난번에 들려주지 못했던 중요한 파일이 있다고 했다. 결국,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듣게 된 음성 파일. 부친의 음성이 담긴 그 파일엔 참담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대체 뭘 노리고 형준이 음성 파일을 들려주는지 해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 녹음 내용을 나한테 들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나는 말이야. 너희 아빠가 너랑 나랑 만남을 주선했을 때 나랑 결혼하라고 할 줄 알았다.”
“…….”
“그런데 신온이 손을 내밀자마자 그렇게 등을 돌릴 줄은 미처 몰랐지.”
형준이 가감 없이 내뱉는 말에 해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지난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오늘 그는 마치 뭔가를 작정하고 나온 사람 같았다. 낮에 전화를 받았을 때도 전과는 달리 느낌이 별로였다. 하여 나오기 전부터 불안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기우가 아니었다.
“부모님이야 어떻든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생각 없다고. 우린 신온과 관계없이 끝난 거였어요. 지금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윤지훈은 좋았어?”
“…….”
“아! 좋았으면 이혼은 안 했겠지.”
“갑자기 무슨…….”
해인은 형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 역시나 다른 감정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나랑 만나자.”
녹음 내용을 들었을 때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순간 밀려오는 자괴감에 치가 떨렸다. 이혼했다고 쉽게 보는 건가. 아니면 내가 저런 녹음 내용 하나로 지레 겁이라도 먹을 줄 안 것인가. 해인이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그래야 이 녹음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돼. 무슨 그런 말을…….”
“지금 엘브는 추락 중이잖아. 이 내용까지 공개되면 네 아버지와 회사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야. 아! 걱정하지 마. 내가 뭘 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너 만나서 밥도 먹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단지 그것뿐이야.”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 아니라 제안을 하는 거야. 사람 말을 곡해할 필요는 없어. 그냥 내가 원할 때 한 번씩 만나기만 하면 그뿐이야.”
형준은 며칠 전 해인을 다시 만났을 때의 유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해인은 달라진 그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이런 사람일 줄 몰랐어요.”
“나도 그래.”
“동의받으려고 한 말 아닌데…….”
“…….”
“설마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라는 변명이 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해.”
“생각보다 저열한 사람이었네요.”
드륵. 스테이크를 썰던 형준의 나이프가 미끄러지는 소리였다. 미간을 찌푸린 형준이 이내 피식 웃으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
“생각보다 매력적이야.”
저런 미친……. 밀려오는 불쾌감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듯했다.
“이런 유치한 장난에 놀아날 생각 없어요. 그딴 녹음 하나로 회사가 무너질 일도 없고요. 이만 가 볼게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해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준이 주문한 스테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장난 아니야. 잘 생각해.”
등 뒤로 조롱 섞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형준은 식사를 계속했다. 와인을 곁들인 스테이크의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렇게 맛있는데 한 입도 안 먹고 가다니, 서운하네.”
역시나 그때처럼 해인은 깐깐하고 어려운 여자였다. 어찌 보면 대놓고 거절당한 상황이었고 심지어 심한 말까지 들었으나 형준은 웃고 있었다. 저렇게 갔지만, 마냥 편치는 않을 것이다. 부친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는 자식은 없을 거니까. 딱히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다. 제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남겼던 그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았던 그녀를.
* * * 기다려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다른 날이었다면 모를까 오늘은 정말이지 기다림이란 것이 끝도 없는 터널처럼 느껴진다. 지훈은 가만있지 못했다. 거실을 서성이고 안방 문도 다시 한번 열어보고. 아무 소리도 없는 욕실도 열어보았다. 심지어 서랍장도 열어볼 기세였다. 혹시 모르니까. 네가 어느새 작아져서 거기 숨어 있을지도. 물론 미친 생각이란 걸 알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네가 없다. 네가 없어서 미쳐간다. 그렇게 시간은 이미 열 시를 넘어섰는데도 해인은 오지 않았다. 기다려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기다림은 역시나 힘들었다. 결국, 밖으로 나와 단지 내로 들어오는 길을 살피고 놀이터가 있는 공원도 가 보았다. 멀리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왠지 해인인 듯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실루엣에 지훈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이 가슴 한 곳에 전율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숨을 쉬는 듯 어깨가 들썩이는데 그 모습이 언뜻 우울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옷차림을 보니 스커트에 블라우스를 입고 구두까지 챙겨 신은 모습이었다. 약속이 있었나. 뭐지. 뭘까. 밤이 깊어가는 이 시간에 널 그렇게 앉아 있게 만든 이유가. 어쩌면 아침에 했던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부담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회피하는 거라면 어찌해야 하나.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다가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여 이번엔 정말 거침없이 쿵쿵거리며 걸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에 돌아본 해인은 자신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밤이 늦었는데.”
“여길, 어떻게 왔어요?”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나와봤어.”
“기다렸어요?”
되묻던 해인이 그제야 아아, 맞다 하며 배시시 웃는다. 오늘 지훈은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했다. 스치듯 이루어졌던 입맞춤에 이어질 이야기. 그 입맞춤의 여운으로 아침엔 잠시나마 단꿈에 젖기도 했었는데……. 지훈은 그녀의 혼잣말에 잠깐 서운했다. 잊고 있었던 건가. 설마 그 중요한 일을?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왔어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만났는데?”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왜?”
“그냥 내 인생이 너무 엿 같아서요.”
“응?”
갑자기 튀어나온 과격한 말에 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인이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여자였었나. 지훈에겐 꽤나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아! 진짜 내 인생은 왜 이럴까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대체 누구를 만났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럴 땐 울기라도 해서 마음속에 응어리를 좀 풀어야 하는데. 아니, 술이라도 마실 수 있었다면……. 아무튼 이제 좀 편안해지나 싶었는데 뭐가 이렇게 꼬이는지…….”
한바탕 푸념을 쏟아낸 해인으로 인해 지훈은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그녀를 울고 싶을 만큼 힘들게 했다는 것도 그랬지만 이제 좀 편안해지나, 라고 하는 말은 이혼과도 관련된 것 같아 더 그랬다.
“나 유학이나 갈까 봐요.”
해인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훈은 연타로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유학? 갑자기?”
“갑자기 아니에요. 결혼 전에도 런던에 있는 컬리지 패션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이제라도 꿈을 이뤄보고 싶긴 해요.”
그렇게 멀리 가버리면 보고 싶어서 어떡하나. 몇 시간 기다리는 것도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힘들었는데. 지훈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마음으로 삼켰다.
“아버님 회사, 일으키고 싶지 않아?”
“지훈 씨가 알아서 잘할 거잖아요. 능력 있는 당신을 믿어요.”
“내가 능력이 있기는 한데…….”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원망 같기도 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아 지훈은 주저앉듯 해인의 곁에 앉았다. 해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로선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말을 멈춘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웠다. 대체 누구를 만났던 걸까.
“몇 가지만 물어볼게.”
“…….”
“네 인생을 엿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 여자야?”
“아니요. 남자예요.”
남자? 감히 어떤 놈이……. 혹시나 저번처럼 전 장모님과 처제가 찾아와 행패를 부린 건 아닌가 했었다. 그 두 사람은 아니라는 뜻인데.
“혹시 가족……이야?”
남아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됐어.”
“뭐가요?”
“그 새끼, 내가 반 죽여버릴 거니까.”
내뱉는 목소리에 진득한 살기가 묻어난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하필이면 이 중요한 날 해인을 불러내 이런 모습으로 돌려보낸단 말인가.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해인을 울고 싶게 한 놈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두 모녀가 와서 행패를 부려도 의연하게 버티던 그녀였다. 이토록 무너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누구야. 말해줄 수 있어?”
“푸흣. 아니요.”
해인이 웃으며 가볍게 거절했다. 무조건 자신의 편에 서주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조자가 될 수는 없었다. 지훈은 속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누군지 만나기만 해봐라.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 있잖아. 너 기다리다 서랍장 열어볼 뻔했어.”
“예에? 아니, 남의 서랍장을 왜요?”
산모 수첩을 서랍장에 감춰둔 해인이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제정신이에요? 이혼 전에도 그런 경우는 없었잖아요.”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역시 똑똑한 여자. 아! 지금 이런 것에 감탄할 타이밍이 아니지.
“그게, 그러니까 열어본 건 아니고 열어볼 뻔했다고.”
“아니, 그러니까 남의 서랍장을 왜 열어보냐고요. 지훈 씨 그런 에티켓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난 그런 사람 싫어하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는가. 왜? 왜 남의 서랍장을 함부로 열어? 해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기세가 꺾인 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 열어봤다고.”
억울했다. 이유를 말하자니 제 딴에도 어이없고. 말을 안 하자니 억울하고. 에이. 몰라. 어이없어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미움받고 말 것 같았다.
“네가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잖아. 그래서 안방도 찾아보고 욕실도 찾아보고. 그러다 없으니까 혹시나 작아져서 서랍장에 숨었나 싶어서.”
뭐가 작아져서 뭐가 어쨌다고? 해인은 제 두 귀를 의심했다. 아까 그 엿 같은 놈에게 이상한 말을 들어서 귀가 잘못된 걸 거야. 저건 절대 자신이 아는 윤지훈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
“저기, 내가 무슨 말을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들었을 거야.”
“아니요. 잘못 들은 것 같아요.”
“서랍장에 숨었나 했다고 들었지?”
“네.”
“제대로 들었어. 그럼.”
“아! 내 귀가 아니라 지훈 씨 입이 잘못된 거네요.”
각오하고 실토한 말이었기에 지훈은 들려오는 힐난에도 눈만 깜박였다. 입만 잘못되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마음도 잘못되고 심장도 잘못되고. 여기저기 고장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리 이야기할 거 있다고 했었지. 내가.”
“네. 그랬었죠.”
“지금 해도 될까?”
“여기……서요?”
“응. 여기서.”
가로등 불빛이 있어서 운치도 있고 좋을 것 같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이 해인에겐 당황스러울 것이지만 더는 뒤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처럼 해인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서 지켜주고 싶었다. 다시는 이런 곳에서 홀로 울고 싶어 하지 않도록.
“내가 살면서 후회되는 게 별로 없었거든. 후회할 만한 일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최근에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더라고.”
이혼.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그래서 이제 바로잡으려는데…….”
“…….”
“나랑 연애할래, 주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