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나랑 연애하자. (15/92)

19. 나랑 연애하자.2022.02.03.

왜 계속 헛소리가 들리는 걸까. 정말 저 남자 입술이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제 귀가 잘못된 건가. 해인은 반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그런 해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16549616433187.jpg“해인아! 나랑 연애하자.”

연애는 유학 가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물론 안 가면 더 좋고.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무척이나 진지한 지훈의 모습.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지훈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는 것이었다. 거절에 대한 걱정은 단 1도 하지 않는 뭐, 그런 표정. 이혼까지 한 사이에 뭐가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인지. 해인은 부러 표정을 굳히고 되물었다.

16549616433193.jpg“지금 내가 들은 말이…….”

16549616433187.jpg“…….”

16549616433193.jpg“연애가 맞나요?”

16549616433187.jpg“맞아.”

16549616433193.jpg“그러니까 그 연애라는 게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16549616433187.jpg“맞아. 그 연애.”

16549616433193.jpg“지금 말하는 그 말의 의미가 내가 아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16549616433187.jpg“맞아. 그 의미가.”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잘도 외워두었네. 하!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맞긴 맞나 보다. 지훈은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며 간절히 해인을 바라보았다.

16549616433193.jpg“그러니까 그 연애를 결혼까지 하고 심지어 이혼까지 한 나한테 요구하는 것도 맞나요?”

16549616433187.jpg“맞아.”

16549616433193.jpg“혹시 너무 늦었단 생각은 안 드시고?”

16549616433187.jpg“들어. 그래서 후회하는 중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연애를 제안하는 거고.”

제안이라는 단어에 해인은 픽 웃었다. 진심인 건가. 여전히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한 이혼인데 정작 이 남자의 한마디가 그 각오를 뿌리부터 흔들어버린다. 가슴이 떨리는 것과는 별개로 미운 마음도 들었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여유로운 것도 웃기고.

16549616433193.jpg“이보세요. 윤지훈 씨? 우린 이미 끝난 사이잖아요.”

16549616433187.jpg“끝은 원래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어. 끝이라는 건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 정말 너랑 연애하고 싶어. 우리 천천히 서로를 좀 더 알아가 보는 건 어떨까?”

16549616433193.jpg“…….”

16549616433187.jpg“결혼하고 이혼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연애라니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그러니까 내가 기다릴게. 지금은 대답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서 대답해. 얼마든지 기다릴 거니까.”

이런 상황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날 밤, 그리고 오늘 아침의 입맞춤까지 해인이 제게 보인 반응이었다. 아주 싫었다면 분명 거부하고 기분 나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인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지훈에겐 무척이나 긍정적인 신호였다. 물론 그것이 빌미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 해인은 차마 지훈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이혼하면 조용히 혼자만의 삶을 살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고 있다. 해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16549616433187.jpg“가자.”

지훈이 해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습기로 인해 손이 끈적했지만, 지훈은 개의치 않고 더 꽉 잡아 쥐었다.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선 해인이 낮게 투덜거렸다.

16549616433193.jpg“나 아직 허락도 안 했는데 이렇게 덥석 손부터 잡으면…….”

16549616433187.jpg“이거?”

지훈이 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살짝 흔들어 보인다.  

165496164965.jpg

16549616433187.jpg“이건 선배로서 곧 울 것 같은 후배의 손을 잡아주는 거야. 오해하지 마.”

16549616433193.jpg“나 운 적 없는데…….”

16549616433187.jpg“해인이 입으로 그랬잖아. 울고 싶었다고. 그런 말 듣고 어떻게 가만있어? 전남편이기도 하고 선배이기도 한데. 이대로 가자. 위로라는 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손잡은 거니까.”

위로. 그 한마디에 해인은 또다시 울컥했다. 이러다 정말 눈물을 쏟는 건 아닌지.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남자가 아니다. 새엄마가 왔을 때나 지금이나 아주 수준급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를 따라 걷는데 배 속에서 신호가 온다. 생각해 보니 저녁을 안 먹었다.

16549616433193.jpg“나 배고파요.”

16549616433187.jpg“응?”

16549616433193.jpg“배고파요. 뭐 좀 먹어야겠어요.”

16549616433187.jpg“그 새끼가 밥도 안 먹였어?”

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떤 놈을 만났길래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었을까. 하여간 누군지 알기만 해봐라. 뼈도 못 추리게 해줄 것이다.

16549616433193.jpg“내가 안 먹었어요. 먹고 싶지 않아서.”

지훈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래. 엿 같은 놈하고 식사를 할 수는 없었겠지.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먹다 또 어제처럼 체하기라도 했으면 큰일이니까.

16549616433187.jpg“근처에 아직 하는 식당이 있을까? 해장국 집은 열었으려나?”

16549616433193.jpg“아니, 그건 먹기 싫어요.”

해장국은 별로 당기지 않았다. 뭘 먹을까. 뭘 먹어야 우리 아기가 좋아할까. 그래. 그거다.

16549616433193.jpg“집으로 가요. 주문해서 먹어야겠어요.”

16549616433187.jpg“그래. 같이 치킨 먹을까?”

16549616433193.jpg“아니요.”

치킨도 좋아하지만, 지금은 보쌈이 더 당겼다. 해인은 고개를 숙여 제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10주면 아직 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왠지 배꼽 주위가 볼록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이 시간에 고기를 먹으면 배가 더 나올 텐데. 해인은 힐끗 지훈을 바라보았다. 딱히 외모를 집중해서 보는 스타일이 아니니 배가 나와도 모를 것이다. 우리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리긴 알려야 하는데……. 이랬다가 저랬다가. 도무지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음식을 주문하고 소파에 앉아 있으려니 뭔가가 어색했다. 지훈 역시나 막상 연애하자고 해놓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 멀뚱멀뚱 앉아 있기만 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음식이 와주었다. 지훈은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서도 곁에 있으며 먹는 것을 지켜봐 주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니 슬슬 잠이 밀려왔다.

16549616433187.jpg“먹고 바로 자면 안 되니까 나랑 운동 좀 할까?”

16549616433193.jpg“피곤해요.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

16549616433187.jpg“그래. 그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지훈이 또 해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깐 밖이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집에서 또 잡으니 가슴이 몽글몽글 이상해진다.

16549616433193.jpg“여긴 집인데 손은 또 왜.”

해인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지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잡고 안방 문 앞까지 걸어갔다. 지훈은 웃고 있었다. 사실 기분이 좋았다. 연애하자는 말을 거절당하지 않아서. 적어도 지훈이 느끼기엔 그랬다. 이미 끝났다고는 했지만 해인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연애도 거절하고 잡은 손도 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 손을 잡고 있지 않은가. 이혼했다면서도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는다. 투덜대면서도 모질게 뿌리치지는 않는다. 아! 이렇게 고맙고 귀여울 수가 있을까. 진즉에 너의 이런 모습을 알았어야 했는데…….

16549616433193.jpg“그만 웃어요.”

16549616433187.jpg“알았어.”

16549616433193.jpg“여전히 웃고 있네.”

16549616433187.jpg“안 웃어.”

지훈은 자꾸만 늘어나는 입꼬리를 붙들어 매야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해인의 방문 앞이었다. 집이 너무 좁다. 더 큰 집으로 이사 가야 하나.

16549616433193.jpg“이제 가봐요.”

문고리를 잡은 해인이 지훈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왜 저렇게 계속 웃는 건지. 생각할수록 얄밉다. 이제 와서 사람 마음 흔들어놓는 것도 그렇고 남의 속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홀로 짝사랑만 했던 제 마음의 반의반도 모를 것 같아 더 그랬다. 그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세월이 얼마인데 넌 뭐가 그렇게 쉬워? 아이 아빠고 뭐고 딱 한 대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괜스레 제 주먹을 꼭 쥘 때였다. 지훈이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볼을 쓰다듬었다. 순간 아찔해지는 것은 인지상정. 아! 진짜 예고도 없이 선 좀 넘지 말라고.

16549616433187.jpg“예쁘다.”

16549616433193.jpg“그래서 또 뽀뽀할 건가요?”

16549616433187.jpg“아니야. 앞으론 조심할게.”

16549616433193.jpg“그래요. 지금 우린 남남이란 걸 가슴에 깊이 새기세요.”

해인이 부러 단호하게 대답했건만, 지훈은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다는 듯 웃었다.

16549616433187.jpg“크흑. 그걸 그렇게 콕 짚어야겠어?”

16549616433193.jpg“자꾸 까먹는 것 같아서요.”

16549616433187.jpg“알았어. 기억하도록 노력해볼게.”

해인은 순순히 대답하는 지훈의 모습이 왠지 더 얄미워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생글거린다.

16549616433193.jpg“무엇보다 내 방에 허락 없이 들어 오면 안 돼요.”

16549616433187.jpg“왜? 서랍장에 무슨 보물 숨겨놨어?”

16549616433193.jpg“네.”

16549616433187.jpg“으음?”

16549616433193.jpg“보물 있다고요. 그러니까 열어보지 말아요.”

16549616433187.jpg“아, 알았어.”

끝까지 싱글거리며 웃는 지훈을 해인이 얄밉다는 듯 쏘아보았다. 해인이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란 듯이 닫아버렸다. 닫힌 문 앞에서도 지훈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뭔지 모를 환희가 솟아나는 것 같다. 그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축배라도 들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방문은 닫혀버렸다. 뭐, 어떤가. 내일이면 다시 열릴 문이지 않은가. 십분 즈음 후였을 것이다. 지훈이 그 방문을 벗어난 시간이. 지훈이 밖에 한참을 서 있는 줄도 모르고 해인은 창문 앞에 섰다. 이혼 전에나 잘하지, 하는 원망이 들었으면서도 덥석 잡힌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연애라고 하니 부담감은 없었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미 한강 그룹과 결혼이야기 오고 간다고 들었는데……. 이래저래 자식 일에 개입하시는 분들이 아니었다. 매사에 정확하면서도 때에 따라선 이익을 우선하는 전형적인 사업가였다. 손주를 기다리시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16549616433193.jpg“보물아. 엄마는 어떡해야 할까.”

본의 아니게 태명은 보물이 되어버렸다. 우리 보물이에겐 아빠가 꼭 필요할 텐데……. 해인은 습관처럼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며칠 후 회의에 참석한 해인은 준비한 이미지 컷을 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전담 포토그래퍼와 사전 조율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오고 갔다. 모든 진행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밖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회의실 안에 해인이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심은진 대리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16549616581473.jpg“어머. 한 차장님. 차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16549616581473.jpg“궁금해서 한번 와 봤어. 일이 잘되나 해서.”

16549616581473.jpg“아, 그러세요? 해인 씨, 인사해. 기획팀 차장님.”

해인이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16549616433193.jpg“안녕하세요.”

16549616581473.jpg“주해인 씨? 반가워요. 기왕 회사로 들어오셨으니 열심히 하셔야 할 거예요. 능력도 보여줘야 할 거고. 아무리 오너 딸이라지만 무임승차하는 건 좀 그러니까.”

거침없이 말한 한 차장이 딱딱한 표정으로 해인을 응시했다. 무안해진 심 대리가 해인을 거들고 나섰다.

16549616581473.jpg“무임승차라뇨? 엄연히 유능한 경력직으로 스카웃 되어서 온 건데. 아! 차장님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어요. 우리 해인 씨, 청담동에서 나름 유명했는데.”

16549616581473.jpg“모르긴 뭘 몰라? 그게 다 빛 좋은 개살구지.”

툭 쏘아붙인 한 차장이 해인을 흘겨보더니 이내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은진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16549616581473.jpg“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워낙 말을 함부로 하고 보이는 대로 내뱉는 사람이니 그냥 그러려니 해.”

해인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굳이 마음에 담고 되새길 것도 없었다. 커피를 사러 갔던 승윤과 우영이 마저 들어오자 다시 회의가 이어졌다. 이번엔 외부 촬영 장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16549616581473.jpg“제가 좋은 장소 알았거든요. 준천에 가면 빈티지 테마파크가 있대요. 지금 다녀오면 좋을 것 같은데, 해인 씨 어때?”

16549616433193.jpg“예? 지금요? 그게…….”

장소 섭외는 지훈과 둘이 가기로 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인은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16549616581473.jpg“우영 씨가 운전하고 우리 셋이 같이 가. 저녁부터 비 온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 다녀오면 될 것 같아.”

16549616581473.jpg“그래. 그럼 되겠네. 시간이 빠듯하니까 오늘 갔다 와. 난 여기서 할 일이 많으니까.”

승윤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팀원들이 무슨 일 처리를 이렇게 즉흥적으로 하는지……. 해인은 어쩔 수 없이 준천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사실 거기까지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가자고 했던 은진이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중간에 회사로 돌아가게 된 게 문제였다. 그렇게 우영과 단둘이 준천에 다다를 즈음 지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연애한다고 한 이후로 하루에 서너 번은 꼬박꼬박 전화를 하곤 했다.

16549616433187.jpg-어디야?

16549616433193.jpg“여기가…….”

16549616433187.jpg-혹시 집이야? 나 근처인데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16549616433193.jpg“아니요. 준천 왔어요. 외부 촬영 장소 알아보려고.”

16549616433187.jpg-으응? 거긴 나랑 같이 가기로 하지 않았나?

16549616433193.jpg“그게 사정이 있어서 우영이랑 가고 있어요.”

1654961663842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