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일생일대의 미션.2022.02.10.
“기억나.”
“난 지훈 씨가 서랍장을 열어보지 않고도 그 보물이 뭔지 알아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서랍장에 보물이 있거든요. 아주 아주 소중한. 그러니까 그 서랍장을 열어보지 않고도 그게 뭔지 알아내면, 그때부터 우리 연애가 시작되는 거로 해요.”
그가 과연 알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해인은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동안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자신이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너그러운 수준이었다. 답을 찾지 못해 애태운다면, 나름 그 모습도 즐기고 싶었다. 이 미션이 어렵든지 쉽든지, 해인에겐 딱히 나쁠 것이 없었다. 지훈으로선 갈수록 미궁이다. 서랍장 안의 보물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있나? 보통 서랍장 안에 감춰놓은 보물이라면 금이나 다이아일 텐데……. 지훈은 해인을 힐끗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금이나 다이아를 보물이라고 할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뭘까. 일단은 추측 자체가 어려웠지만, 연애를 향해 한발 다가선 것 같아 몹시도 마음이 흡족했다. 해인이도 어느 정도는 같은 마음이었구나. 말도 안 하고 이대로 헤어졌더라면 큰일 날 뻔했구나. 해인도 어쩌면 그날 밤 이후 저에 대한 어떤 감정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서 다시 돌아온 자신을 매몰차게 쫓아내지 못했으리라. 나름 연애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추론하던 지훈의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벌써 심장이 막 뛰는 것 같아.”
“보물이 뭔지 벌써 안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해인이랑 연애한다고 생각하니까 흥분했나 봐. 아무래도 고장 난 것 같아.”
“고장은 아니고 심장이 김칫국을 너무 마셨네요.”
“그러게. 진정해야 하는데, 하아. 미치겠다.”
지훈이 픽 웃으며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해인은 어이가 없었다. 늘 차분하고 딱딱하던 사람이 지금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같이 좋아하고 있었다. 언제 지훈이 저렇게나 저를 좋아하게 됐을까. 해인은 눈으로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미션 완수도 못 해놓고 심장부터 나대면 어쩌라는 거예요?”
“미안, 미안. 걱정하지 마. 미션 완수, 할 수 있어. 반드시 할 거야. 미션 파셔블.”
“그래요. 부디 건투를 빌어요. 난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자, 잠깐만…….”
일어서려는 해인을 지훈이 급히 불러세웠다. 피곤하기야 하겠지만 사람 심장을 이렇게 요동치게 만들어놓고 벌써 들어가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왜요?”
“그, 그게…….”
“그게 왜요?”
“피곤하기야 하겠지만 우리 꽤 중요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벌써 들어가는 거야? 잠깐만 더 마주 보고 있으면 안 될까?”
“마주 보고 있으면 답이 나오나요?”
“그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답이 먼저구나. 할 말을 잃은 지훈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결혼은 쉬웠는데 연애로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이야. 그러게, 이혼을 왜 했을까.
“일단 정답부터. 그럼 이만.”
선언하듯 말한 해인이 주저 없이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게 또 매력적일 게 뭐람. 내 여자는 연애를 앞두고도 얄짤 없구나. 아직 내 여자라고 할 수도 없으면서 지훈의 마음은 벌써 꽃밭이었다. 터질 것처럼 요동치는 심장을 다독이며 급히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벽을 짚고 서서 심호흡도 해보고 진정하라며 가슴에 손을 얹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심장이 진정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뭔지 모를 환희에 도취한 기분은 여전했다. 이제 그 보물만 찾아내면, 아니 보물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드디어 해인이와의 연애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포효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해인의 말대로 아직은 완수해야 할 미션이 남아 있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지훈이다. 보물. 해인에게 보물이 과연 무엇일까. 힌트라도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맞추려니 너무 막막했다. 바야흐로 윤지훈 일생일대의 미션이 시작되었다.
* * * 우영의 수첩에 낙서가 채워졌다. 책상 앞에 멍하니 앉은 우영은 심 대리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볼펜이 수첩을 끄적거리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영 씨. 수빈 씨랑 해인 씨가 단둘이 만나는데 괜찮을까?”
“그게 왜요?”
해인의 이름이 나오자 우영이 비로소 심 대리를 주목해서 바라보았다. 수빈이 회의 시간을 맞춰서 올 수 없어 그 시간엔 해인만 있게 되었다. 나머지 팀원들은 모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바쁘니 부러 해인을 좀 더 늦게 나오게 해서 시간을 맞춰주었다.
“사실 처음 연락했을 때 느꼈는데 수빈 씨가 해인 씨에 대해 자꾸 물어보더라고. 스타일리스트가 이혼한 그 전처가 맞냐고. 그때 내 느낌은 좀 어이없어하는 그런 느낌? 뭐, 그랬거든. 근데 두 사람이 따로 회의실에서 만났잖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 혹시 윤 상무님하고 수빈 씨랑 어떤 관계가 아닐까 해서 물어본 거야. 그럼 두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잖아.”
“하기야 그때 미국에 같이 간 것을 은근 과시하는 느낌이기도 했어.”
어느새 다가온 승윤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우영 씨는 해인 씨가 무슨 말 안 해?”
“해인이는 입이 워낙 무거워서요.”
실제로 해인은 수빈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꼈지만 수빈과 전남편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딱히 묻지도 않았다. 우영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준천에서 돌아온 그 날 우영은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엄마. 가끔 하시던 그 이야기 좀 해봐요.’
‘무슨 이야기?’
‘해인이 엄마가 해인이 가졌을 때요.’
‘아아. 그거? 그러니까 해원이 걔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아이를 갖고 나서는 이상해지더라고. 갈비탕 먹고 싶다고 했다가 순댓국이 먹고 싶다고 하고, 그렇게 순댓국집까지 갔는데 다시 갈비탕 먹고 싶다고 하고. 변덕이 변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 근데 그건 왜?’
‘그냥, 물어봤어요. 갑자기 생각나서.’
‘어휴. 딸들 입덧은 엄마 닮는다던데 우리 해인이는 어떠려나. 하기야 당분간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우영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고 전혀 아닌 것도 아닌 것 같고.
‘주해인. 넌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야.’
만일 해인이 전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면 이젠 어떡해야 하나. 아직 제대로 꺼내 보지도 못한 마음을 다시 또 접어야 하는 걸까. 우영은 힘겹게 두 눈을 감았다. * * * 넓은 책상 위로 이미지 자료들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다. 어쩌다 보니 또다시 수빈과 둘이 있게 되었지만, 해인은 속마음을 감추고 프로로서 그녀를 대했다. 수빈 역시나 이전의 만남은 기억에서 지운 듯 웃는 얼굴로 해인을 마주했다. 해인은 준비한 이미지 컷을 보여주며 포즈와 함께 입을 의상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리는 지금 염색하신 애쉬 그레이 스타일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대로 하시면 될 것 같고…….”
“땡땡이 리본은 너무 올드하지 않나요?”
“빈티지가 주제라서 옷에 어울리게 했어요.”
“청바지도 물이 너무 빠진 것 같고, 확실히 복고풍 분위기라 그런지 포즈들도 살짝 구리긴 하네요. 뭐, 그건 그것대로 멋이 있겠죠?”
“수빈 씨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잘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섭외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이미지를 그려나가니 묘하게 잘 어울렸다. 해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수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됐고.
“지훈 오빠랑 한집에 다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불편하지 않나요? 이혼까지 했는데…….”
수빈이 작정이라도 한 듯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해인의 말문이 막혔다. 지훈을 만난 것인가.
“지훈 오빠 만났어요. 내가 회사로 찾아갔거든요. 오빠가 이야기하더라고요. 갈 곳이 없어서 그냥 잠깐 머무르기로 했다고.”
수빈은 잠깐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해인은 그것이 어떤 의도인지 알았기에 피식 웃어버릴 뻔했다. 이걸 어쩌나. 잠깐 머무르기로 한 남자가 연애하자며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네. 그렇게 됐네요.”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서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해인 씨가 지훈 오빠 내보내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진심으로 걱정되거든요. 지훈 오빠 이미지도 있는데…….”
“미안하지만 지훈 씨 스스로 선택한 일이에요. 내가 나가라고 해서 나갈 사람이 아니에요. 지훈 씨 오래 봐왔으니까 잘 알 텐데요. 누구 말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 그건 그렇죠. 하지만 지훈 오빠의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솔직히 나 지훈 오빠랑 잘해보고 싶은데 둘이 같이 살고 있다니까 좀 불편해서요. 저번에 말했잖아요. 집안 어른들끼리 이미 결혼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고.”
“집안 어른들이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수빈 씨에 대한 지훈 씨 마음일 텐데…….”
“…….”
“지훈 씨도 알고 있나요? 그 마음을?”
당당한 해인의 태도에 수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뭔지 모르게 지난번보다 더 당당해진 느낌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수빈이 다급해졌다.
“지훈 오빠는 아직이지만, 이번엔 양가 부모님들 모두 기대하고 계신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었잖아요. 재벌들 결혼이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니라는 거 잘 아시면서 왜 이렇게 질척대세요? 그리고 버젓이 같이 살고 있으면서 왜 저번엔 말 안 했어요?”
“내가 일일이 내 사생활을 수빈 씨에게 말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지훈오빠와 관계된 일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나한테 말을 했어야죠.”
“지훈 씨도 하지 않은 말을 내가 왜요?”
“어머, 어머. 진짜 무슨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거예요? 이혼까지 했으면서 이러시는 건 예의가 아니죠.”
“이봐요. 오수빈 씨, 예의가 없는 건 오수빈 씨죠.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남의 사생활에 이러쿵저러쿵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질척대다뇨? 아무리 봐도 질척대는 건 내가 아니라…….”
해인이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결정타를 날릴까 말까 고민하는데 수빈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무, 무슨…….”
참나. 기가 막혀서. 너는 말해도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그러게 왜 말을 함부로 해서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셨을까.
“나와 이야기 더 해봐야 수빈 씨가 원하는 거를 얻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지훈 씨와의 문제는 지훈 씨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세요. 그럼 이만.”
해인은 미련 없이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심히 불쾌했지만, 지훈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기에 굳이 말을 섞으며 마음을 다칠 이유가 없었다. * * * 보물이 뭘까. 며칠을 고민했지만 도대체가 모르겠다. 결국, 지훈은 머리를 지나치게 굴리기 시작했다. 뭔가 심오한 더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일종의 소금, 같은 뭐 그런 건가. 리어왕의 딸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소금으로 표현했는데……. 아! 그거랑은 별 상관없나. 답답해진 지훈은 보물을 검색해보았다. 밑으로 내려보니 우리나라 보물 1호가 뜬다. 흥인지문(동대문). 음, 동대문이 보물 1호였구나. 해인에겐 뭐가 보물일까. 서랍장에 들어갈 만한 작은 건데……. 혹시……. 나름 감을 잡았다 싶은 지훈이 퇴근을 서둘렀다. . . . 그날 밤, 지훈은 해인에게 안개가 섞인 붉은 장미꽃 한 다발을 선물했다. 이혼 전에는 받아보지 못한 꽃이었기에 해인은 감회가 새로웠다. 소파에 앉아 향기를 맡고 있노라니 가슴도 뜨거워진다. 정말 연애라도 시작된 기분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들떴지만 늘어나는 입꼬리를 애써 붙들어 맸다.
“꽃도 선물할 줄 아는 남자였나요?”
“아니. 아닌데 해인이에게는 주고 싶어.”
역시 이 남자는 기다릴 줄 모른다. 잊고 있었는데 이 남자에게 어울리는 색이 바로 정열의 붉은색이었다. 타오르는 화산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바로 그 색깔. 이혼 전날에도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갑자기 이혼하기 전날 밤이 떠오른 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얼굴이 빨개지네? 꽃 받아서 부끄러워?”
아! 그런 건 대놓고 말하지 말라고 좀.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해인이 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했다. 내가 꽃다발 하나에 넘어갈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물은요? 벌써 뭔지 안 건가요?”
“아, 그게……, 혹시 소금이야?”
“하! 상상력이 안드로메다급이네요.”
“그럼 설마 진짜 금이야?”
“웃기려고 그러죠?”
“응. 설마 진짜 그러겠어?”
진짜 웃기려고 그랬을 뿐이다. 나름 추론을 해서 얻은 결론이 하나 있었으니까. 해인이 보물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분명 혈육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