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입술을 머금은 것은.2022.02.13.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이나, 어머니께 물려받은 반지?”
순간 멍해진 해인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엄마. 언제 들어도 가슴 아픈 이름. 엄마의 사진이나 반지도 물론 소중한 것들의 하나이니 지훈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답이 아닐 뿐.
“아니에요.”
“그럼 엄마의 일기장?”
“우리 엄마 일기 안 썼어요. 그리고 엄마의 사진이나 반지가 소중하긴 하지만, 엄마와 관련된 것들은 아니에요.”
“그래?”
점점 더 미궁이었다. 지훈이 생각했던 밑천은 이미 바닥이 났다. 지훈에겐 딱히 보물이라고 여길 만한 소중한 것들이 없었으니까. 힌트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달라고 하기도 싫었다. 뭔가 다른 쪽으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힌트 줄까요?”
“어. 많이, 많이 줘.”
지훈이 동아줄이라도 잡은 양 반색했다. 사고의 전환보다는 태세 전환이 무척이나 빠른 남자였다.
“미국에서 돌아와서 나를 많이 봤잖아요.”
“많이는 아니지?”
“주간비율로 따져보면 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그래. 해인이가 은근 뼈를 찌르는 구석이 있어.”
“시끄럽고, 거기에 답이 있어요.”
“으응?”
“내 모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요. 분명 내가 달라졌으니까. 힌트는 여기까지예요.”
“더 없어? 조금만 더 줘. 뭔가 더 구체적인 걸로. 응?”
구차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무작정 해인의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지훈 씨와도 관련이 있어요.”
“나랑?”
잠깐 상념에 잠겨 있던 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옷이야? 빨간 슬립 그거. 나 다시 오던 날 입고 있었던 거. 그거 내가 사줬잖아.”
이건 또 뭔 소리. 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물질적인 게 아닌데. 그것보다는 슬립을 사줬던 걸 지훈이 알고 있었던 건가? 선물을 받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다.
“그땐 무슨 옷인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모르긴. 내가 직접 골랐는데.”
“나는 처음 듣는 소리네요. 비서가 알아서 골랐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냥, 부담 느낄까 봐 그렇게 말했을 뿐이야. 근데 진짜 한 번도 안 입다가 이혼하고 나서 입은 거야?”
“그 전엔 입을 일이 없었죠.”
“왜?”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가 이상한 곳에서 열을 올린다.
“기념할 일이 없어서요. 그래서 이혼 기념으로 입었어요.”
“괜히 물어봤네.”
“아무튼, 그것도 아니에요. 아무래도 우리의 연애는 이대로 물 건너갈 것 같은데 어쩌죠? 감을 아예 못 잡으니…….”
“사람이 왜 기다리질 못해? 나 할 수 있거든?”
갑자기 들려온 절망적인 목소리에 지훈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반드시 답을 찾고야 말리라 다짐하듯 주먹도 불끈 쥐었다. 그에 기가 막힌 해인도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큰소리만 치지 마시고 답을 가져오라고요. 지금 나랑 연애하기 싫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런 거 아니거든.”
주눅이라도 든 아이처럼 지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알았으니까 화는 내지 마.”
이어 공손히 부탁까지 했다. 해인은 그 어이없는 남자를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았다. 먼저 화낸 사람이 누군데. 아기 양말도 봤으면서 그걸 몰라? 우리 보물이도 모르면서 뭐가 그렇게 당당해? 건투를 빌어준 자신이 바보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에게 정답을 알아오라 했으니 실상 서운할 것도 없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지훈이 정답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괜히 야속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론 연애를 위해 이렇게 수그리면서 공손해지는 그의 새로운 모습에 가슴이 들뜨기도 했다. 갈 길이 아주아주 멀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보물을 생각해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수빈 씨 만난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남자는 수빈에 대해선 아예 할 말이 없는 사람 같은데……. 알아서 정리한다고 했으니 일단 믿고 기다려봐야겠다. 솔직히 아직 연애가 시작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해인은 힘내라는 듯 지훈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터치에 괜스레 홀로 뜨거워진 남자는 전혀 알 바 아니었다.
* * * 다음날 보물로 인해 미궁에 빠진 지훈은 상진을 데리고 한적한 순두부집을 찾았다. 아! 역시 이 집 순두부가 최고야 하며, 맛있게 국물을 떠먹던 상진이 말했다.
“저녁에 술 한잔할까요?”
“너 혼자 해. 일찍 퇴근할 거야.”
“요즘 왜 그렇게 일찍 들어가십니까? 집에 보물 숨겨놨어요?”
“응.”
“예?”
“보물 있다고.”
“뭔데요?”
“몰라. 나도 그게 궁금해.”
지훈은 그동안 해인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상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하나 더 있으면 미션을 수행하는 데 더 수월할 수 있으니까. 이야기를 들은 상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잘했습니다. 잘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그 형수님 놓치면 안 되는 분 같았어요. 도대체 이혼을 왜 하신 건지 전 정말 이해가 안 됐거든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해인이가 하고 싶어 했다고.”
“그렇다고 덥석 해줄 것이 따로 있죠.”
“그땐 그게 옳은 줄 알았지.”
“이제 와서 사랑을 깨닫는 중이고?”
“뭐, 그렇지.”
“사람 됐네. 사람 됐어.”
“근데 너 왜 반말하냐?”
“제가요? 언제요?”
“한 것 같은데…….”
“기분 탓입니다. 그나저나 보물이 뭘까요?”
덩달아 진지해지는 상진이다. 이혼한 남녀가 다시 연애하겠다는데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혹시 금 거북이 같은, 진짜 금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아니래.”
“예? 미쳤어요? 그걸 말해요? 장난인데?”
“나도 장난으로. 근데 너 말이 좀 심하다?”
“기분 탓입니다. 보물만 생각하세요.”
보물. 보물이 뭘까. 상진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혹 중요하거나 추억이 될 만한 것들을 타임캡슐에 묻던데 거기 들어가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물론 다이아도 아닐 테고. 일기장 같은 뭐, 그런 걸까요? 타임캡슐에 보통 그런 게 들어가잖아요.”
“일기장도 사진도 아니야. 옷도 아니고.”
“그럼 결혼반지?”
“설마.”
“그렇죠? 버리고 싶었을 텐데…….”
상진이 툭 던진 말에 지훈은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잘한 것이 없으니 할 말도 없었다. 그땐 정말 어쩌자고 덜컥 이혼이란 걸 했을까.
“무슨 힌트 같은 거 안 주시던가요?”
“주기는 했어. 근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 최근에 자신의 모습에 힌트가 있다고 하던데.”
“그래요? 뭔가 변했던가요?”
“음, 아랫배를 만지는 습관 같은 게 있더라고.”
“변비가 생겼군요. 변비 생기면 저도 변 잘 나오라고 아랫배를 이렇게, 원을 그리듯 만져 주거든요. 그럼 혹시 변비약?”
지훈이 상진을 째려보았다.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라는 듯.
“너한테는 뭐가 보물이냐?”
“저야 뭐, 딱히 없지만,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월급 들어오는 통장 같은 거…….”
상진이 말하다 말고 힐끗 지훈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생존을 위한 최고의 선택인데 그게 뭐 어떻다고 저럴까.
“저는 그렇다 이 말입니다. 저는. 아!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상무님이 주신 아파트 매매 계약서도 보물일 수 있겠네요. 거기가 전망도 좋고 집값도 비싼 곳이잖아요. 저 같으면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혼자 매일매일 쳐다봐도 원이 없겠거든요. 진짜 그게 딱 서랍에 들어갈 만한 크기잖아요?”
그런가. 자신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으니 은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 지훈이다.
“그런 것은 아닐 것 같아. 자꾸 돈하고 연관시키지 말고 뭔가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한번 생각해 봐.”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럼 혹시 책 같은 걸까요? 왜 유명인사들도 그런 거 있잖아요. 인생을 바꾼 책. 형수님도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어떤 책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건 아닐까요? 형수님이 지적이고 고상하시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일리 있다?”
“그렇죠? 아무래도 그런 류의 어떤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갑자기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더니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내 인생을 바꾼 책이라는 문장으로. 꽤 많은 책이 검색되었다. 아! 이런 책들을 언제 다 살펴보나. 우리 해인이가 무슨 책을 좋아하는 줄 알고. 패션 쪽 일을 하고 있으니 혹시 패션에 관련한 책이 아닐까 살펴도 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책이 아닐 수도 있고. 이상하게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럴 때 해인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지훈은 새삼 자신이 해인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결혼생활. 지훈은 뒤늦게 후회하는 제 모습이 한없이 바보 같았다. * * *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지훈은 샤워까지 마치고 홀로 저녁을 먹고 해인을 기다렸다. 스튜디오 촬영에 쓰일 소품을 직접 점검하느라 조금 늦는다고 하더니, 나중엔 아예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다고 했다. 데리러 간다고 했더니 절대 오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이 오해한다며. 그깟 오해가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우리는 곧 연애하게 될 건데……. 아직 보물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훈은 이미 연애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보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대문. 해인에게 동대문 정도로 귀하고 역사적인 것이 무엇일까. 지훈은 데크가 깔린 테라스로 나가 덤벨을 들어 올리며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 아파트는 테라스의 로망을 잘 살린 구조였다. 나름 해인을 배려해서 선택한 곳이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도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오늘 여기서 해인과 술이나 한잔했으면 좋겠는데……. 아직 안 되는 일이겠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더 애가 타는 느낌이었다. 한참 후 해인이 돌아왔다. 지훈은 들뜬 마음으로 해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씻는다는 한마디에 말도 못 하고 다시 테라스로 물러났다. 야경을 보며 보물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고 있는데, 얼마 후 등 뒤에서 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어요?”
“어. 다 씻었어?”
해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말렸는데 급히 나오느라 아직도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지훈이 싱긋 웃었다. 온종일 주인을 기다리다가 반기는 강아지 같은 그 모습에 해인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시 웃는 얼굴로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같이 있으니 해인은 괜스레 마음이 간질거렸다.
“여기 의자에 앉아 봐. 우리도 그거나 한번 하자.”
지훈이 해인의 손을 잡고 원목 의자에 앉혀 주며 말했다.
“뭘요?”
“그거 있잖아. 눈빛은 자신 있다고 했던 거. 우영 씨가 말한 열한 시 방향보다는 열 시 방향이 더 섹시할 것 같아. 나랑도 한번 하자.”
“아니, 뭘 자꾸 한번 하자고…….”
해인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감이 심각하게 이상한 탓이었다.
“한번 하자는 게 뭐가 잘못됐어? 그 말로 얼굴이 빨개지는 해인이가 문제지.”
“아니…….”
내 얼굴이 빨개지긴 뭐가 빨개져? 안 보이니까 알 수는 없지만, 화르르 열감이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은근슬쩍 설레게 하지만 말고 빨리 보물이나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기 양말도 봤으면서.
“그래서 보물은요?”
“아! 그거…….”
지훈은 보물 이야기만 나오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냥 다른 보물을 사 주는 것으로 대신하면 안 될까? 열 개라도 사줄 수 있는데.”
보물아! 네 아빠가 드디어 미쳤나 봐. 몰라서 그런 거니까 지금은 네가 이해해 줘. 엄마가 대신 사과할게.
“보물이 뭔 줄 알면 지금 그 말 엄청 후회할 거예요.”
“그럼 취소.”
“태세 전환은 메가톤급이네요.”
“해인이랑 연애하고 싶으니까.”
싱긋 웃은 지훈이 해인의 몸을 당겨 이번엔 테라스 난간에 서게 했다. 그러고는 뒤에서 해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기, 테라스도 멋지고 야경도 멋지지? 사실은 너를 위해 준비한 아파트였어.”
“백허그 허락한 적 없는데…….”
“허락…….”
“…….”
“해 줘. 해인아!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
지훈이 안달 난 듯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열감을 잔뜩 실은 목소리는 낮게 깔려 은근히 야했다. 거기서 그칠 지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해인의 어깨 위에 묻었다. 입술이 자연스럽게 목덜미에 닿았다.
뜨끈한 그 열기에 해인은 움찔하며 전율을 느껴야 했다. 제 허리를 감은 손길의 단단함에 갇혀 몸은 꿈쩍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달뜬 호흡을 내쉬지 않으려 조절할 뿐이었다. 뒤에서 안은 것뿐인데 이렇게나 심장이 쿵쾅거릴 수가 있나. 해인은 여전히 자신이 지훈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한 집이라고? 한 층에 한 세대밖에 없는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솔직히 감동보다는 의아했다. 저와의 결혼 그즈음에 그런 호의적인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호감은 없었지만, 법적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은 있었던 걸까? 직접 골랐다는 슬립 선물도 그렇고, 아파트도 그렇고, 이 남자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곳곳에서 신경 썼던 일들을 들으니 생경한 감정이 솟아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무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싶어 또다시 마음이 간질거리던 그때였다. 어느새 몸이 돌려지고 지훈의 입술이 그대로 해인의 입술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