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안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2022.02.17.
안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늦지 않게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키스가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후 머리를 맞대며 지훈이 잠시 멀어졌을 때 해인이 더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안고만 있는다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유혹에 소질이 있네요.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넘어온 거야?”
“딱 여기까지만이에요.”
“고마워.”
지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해인의 입술을 머금었다. 어느 순간 키스는 격렬해졌고 해인의 등을 감싸 안은 지훈의 손이 잠시 이성을 잃으려던 찰나였다. 그는 스스로 다시 멀어졌고 탄식하듯 깊은 날숨을 쏟아 냈다.
“하아. 보물이 뭘까.”
“……”
“뭔데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냐고.”
“당신이 고생해도 될 만한 아주 가치 있는 거.”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
“바보.”
“누구라도 어려울 거야.”
“똥 바보.”
“으윽. 상처받았어.”
“좀 받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 으읍.”
할 말 없으니 괜히 달콤한 입술만 삼키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또다시 흔들리는 여자.
“그거 알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서랍장 몰래 열어보는 건 일도 아냐.”
차라리 열어봐라. 답답해서 내가 다 미칠 지경이니까. 지훈이 해인의 입술을 다시 머금지 않았으면 어쩌면 그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으음음, 으으음으음.”
“뭐라고?”
궁금한 건 못 참는 남자. 해인을 품에 안은 채로 입술만 멀어진다. 그 사이 냉정함을 되찾은 해인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훈 씨 이 집에서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닌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왜 하는 거야? 차라리 그냥 한 대 치고 끝내.”
“진짜요?”
“……”
“……”
“진심이야?”
“당연하죠.”
한 대 치는 게 당연하단다. 쫓겨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말하는 투를 보아서는 한 대 치는 것도 살살은 아닐 것 같고. 뭐, 여러모로 맞을 짓을 하긴 했지만, 앞으로는 빈말도 조심해서 해야겠다. 지훈은 픽 웃으며 다시 해인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 고운 입술이 어찌나 얄미운지. 지훈은 화풀이하듯 숨결을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이미 이성이 돌아온 해인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이 저돌적인 남자에게 또 흔들리겠지. 해인이 제 허리를 안고 있는 지훈의 손을 풀어냈다.
“약속한 게 있는데 욕심만 과하면 어떡하나.”
“그놈의 보물. 내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어.”
“제발 그래 봐요.”
나도 애가 닳아 미치겠으니까. 나도 당신이 그리워 미칠 것 같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두 사람의 거리가 한걸음으로 넓혀졌다.
“우리에겐 약속이 먼저라는 걸 잊지 말아요.”
여전히 아쉬운 남자에게 해인은 미션을 완수하라 재촉했다. 남자는 이미 얼이 빠졌는데……. * * * 며칠 후 해인은 또다시 안형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그의 연락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면 저 역시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소형 녹음기를 챙겨 약속 장소인 강남의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유럽풍의 샹들리에 조명이 운치 있게 빛나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형준은 심플한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해인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반가워. 이렇게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사람 약점 가지고 이용하니까 기분 좋으신가 봐요?”
자리에 앉은 해인이 무심히 대꾸했다. 형준의 얼굴에 픽 웃음이 스쳤다. 그는 해인의 빈정거림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도도한 그녀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딱 호감을 이끌어 낼 정도의 새침함. 그런 그녀가 좋았다.
“너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 고등학생 땐 그래도 나한테 오빠라고 했잖아.”
“…….”
“나한테 멋있다고도 했었는데 기억 안 나?”
순간 해인의 머릿속에 낡은 기억 하나가 스쳐 갔다. 그때가 아마 자신이 고등학생이었을 때일 것이다. 형준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족끼리 모두 모여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잠시 주변을 거닐 때였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철쭉나무 앞에 형준이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일어선 그의 손에 새끼 고양이가 들려 있었다. 거의 죽어가던 고양이를 살리려 병원으로 향하던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었다.
“그땐 안형준 씨가 그 새끼 고양이를 구해 줘서 그랬죠.”
“그때는 오빠라고 했으면서.”
“오빠 같은 사람이 녹음 파일을 이용해 사람을 협박하나요?”
“무슨 협박? 난 그런 적 없는데?”
형준이 오히려 의아하게 되묻자 해인의 말문이 막혔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를 할 때는 딱히 말이 많지 않고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웃는 인상도 아니었고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감정을 능숙하게 감추며 상대방을 제 손에 쥐고 주무르려고 하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때도 충분히 솔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든 그의 입에서 음성 파일에 대한 말이 나와야 하는데……. 해인이 고민하는 사이 주문한 연어와 캐비어가 나왔다.
“오늘은 식사를 좀 했으면 좋겠어. 보여 줄 게 있거든.”
“뭘 보여 줘요?”
“일단 먹어.”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했지만, 딱히 음식의 맛을 알고 넘기는 건 아니었다. 원래 연어를 좋아했었는데 상대가 상대인 만큼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형준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딱히 말을 섞지는 않았다. 그저 연어의 맛이 별로라는 것만 느껴졌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물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테이블에 올려놓은 형준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음이 울렸다.
“드디어 왔네.”
뭔가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무심히 보는 해인의 앞으로 형준이 핸드폰을 건넸다. 마치 재생되고 있는 동영상을 보라는 듯. 자세히 보니 수빈과 오 회장, 그리고 지훈과 윤 회장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기 VIP 룸이야. 지금 함께 식사하는 중인가 봐.”
“이게 무슨…….”
수빈과 지훈이 함께 있다는 모습보다는 형준이 그것을 동영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수빈과 형준이 미리 계획한 일인 듯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던가?
“오 회장님과 윤 회장님이 자식들을 데리고 만났어. 무슨 의미일 것 같아?”
“…….”
“결혼 이야기 오가고 있다던데.”
“수빈 씨를 알고 있었나요? 아니, 만났어요?”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만나는 사이였어. 친구가 수빈이랑 걔네 오빠를 잘 알거든.”
재벌들 이래저래 얽힌 인연이야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얽혀서 좋을 것이 없는 사람과 엮여서 그 입에서 수빈의 이름을 듣는 기분은 별로였다. 설마 다시 한집에 살고 있다는 말까지 들은 건가.
“저기요. 내가 안형준 씨를 이렇게 다시 만난 이유는 그래도 평범했던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였어요. 설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겠죠?”
“난 재벌들의 속성에 근거해서 누구보다 상식적이야. 그걸 너에게 알려주는 것뿐이고.”
“이러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네요.”
“네 전남편과 수빈이가 다시 만나는 건 괜찮고? 별로 동요하는 얼굴이 아니네? 꽤 놀랄 줄 알았는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지훈 씨도 자기 일 자기가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고.”
“하! 이건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도 모르네?”
“안형준 씨 문제는 더더욱 아니죠. 그러니까 그 일은 신경 끄시고 우리 아빠 녹음 파일이나 삭제해줘요.”
형준은 피식 웃을 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건지는 것이 있을 텐데 그는 그 일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나오면 방법이 없다 싶은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오늘은 식사는 마쳤네요. 안형준 씨 원하는 대로 했으니까 이만 먼저 가 볼게요.”
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형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하며. 오래전 그때 자신은 새끼 고양이를 구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움직이지 못하는 고양이가 있어서 잡았을 뿐이고 다시 내려놓으려던 찰나 해인이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면 병원으로 달려가지도 않고 거기 그냥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그 후 성인이 되었고 결혼을 전제로 했던 첫 번째의 만남. 그 자리에서 고백하고 반지를 건네려 했었다. 하지만 해인은 제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었다. 그때의 그 참담했던 마음이 한 번씩 떠오를 때면 늘 패배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기회가 왔는데 해인을 또다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 * *
“밥 다 먹었지? 그럼 우리도 일어나자.”
“오빠. 나랑 차 한잔 마시는 것도 싫어?”
“누가 싫다고 했어? 바쁘니까 그렇지.”
“아빠랑 회장님 말씀 다 들었잖아. 우리 둘이 결혼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 없다고 한 말도 들었잖아. 가서 오 회장님께 말씀드려. 난 좋아하는 여자 따로 있다고.”
“설마 전처랑 다시 만날 생각은 아닌 거지?”
“맞아.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오빠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그건 그렇고, 오빠 부모님이 허락하실 것 같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야. 너는 가서 네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될 일이고. 얼른 일어나. 나 집에 들어가야 해.”
지훈은 바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친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와서 나왔더니 오 회장과 수빈이 자리한 저녁 식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나 갈 것을 그랬다. 수빈은 벌써 문을 열고 나서는 지훈을 놓치지 않으려 급하게 따라나섰다. 당연히 지훈이 데려다줄 것으로 생각하고 주차된 그의 차 앞에 멈춰 섰다.
“잘 가라!”
“안 데려다줘? 나 아빠 차 타고 와서 차 없단 말이야.”
“택시 타고 가. 택시비 줘?”
“너무해.”
“간다.”
수빈은 원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지훈의 차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귀찮아할까 봐 대놓고 매달릴 수도 없다. 계속 귀여운 동생으로서 어필하려 했는데 이젠 그것마저 늦어 버린 느낌이다. 다시 그 여자와 이어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미쳐버리고 말지. 저 잘난 남자를 진즉에 제 손에 넣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를 하는 수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며 깊은 골을 만들어 냈다. * * * 또 없다. 그녀가. 이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훈은 벌써 몇 시간째 초조히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저 금방 오겠거니 했다. 그러나 열 시가 넘어서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열한 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는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그냥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어느새 해인에게 익숙해져 버렸는지 이젠 그녀가 없는 이곳이 낯설기만 했다. 항상 그녀가 있어야 하고, 없으면 찾아야 할 것 같고.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해인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사랑은 그저 하찮은 감정놀음일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 하찮음으로 인해 지훈은 매일이 초조해졌다.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얼마나 손에 땀이 났는지 터치 버튼을 누르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신호음이 울리고 드디어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반가움도 잠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낯설지 않은. 지훈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저는 그때 봤던 해인이 친구입니다.
그때가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지훈은 직감적으로 그가 우영임을 알았다. 빨간 스포츠카의 그놈.
“우리 해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해인이 핸드폰을 왜 그쪽이 받는 겁니까?”
-저랑 같이 있습니다. 오늘 밤, 같이 있을 예정이니 찾지 마시고 주무세요. 핸드폰 끌 거니까 전화하지 마시고.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