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도발.2022.02.20.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밤에 같이 있을 예정이라니, 지훈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서둘러 다시 전화를 했지만 핸드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무슨 일이 있지 않으면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주해인.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빨간 스포츠카가 굳이 대놓고 도발을 했다. 동물적 직감으로 그 도발은 얄팍하고 허술하나 충분히 저를 미치게 할 만했다. 밤이 늦은 시각이었으나 지훈은 실례를 무릅쓰고 승윤에게 전화해 우영의 번호를 알아냈다. 그 번호로 전화를 해 보았으나 작정이라도 한 듯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그저 해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이 결코 작은 일은 아닐 거라는 것. 뭘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키홀더를 찾은 지훈은 본능적으로 집 밖으로 나왔지만, 딱히 갈 만한 곳도 생각나는 곳도 없었다. 차에 올라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은 지훈의 속이 점점 타들어 갔다. * * * 지훈이 홀로 떠나고 수빈은 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 레스토랑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수빈이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로 왔을 때 그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쪼르르 달려와 앉은 수빈이 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꿈쩍도 안 하던데?”
“정말? 보통여자가 아니네.”
“원래 그랬어.”
도도하고 새침한 해인의 그 모습 그대로를 좋아했던 형준이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이 유치한 놀음의 시작은 수빈이었다. 처음엔 치사한 짓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으나 수빈에게서 두 사람이 여전히 한집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막상 만남이 이루어지고 수빈이 이렇게 제 앞에 앉아 있으니 그쪽이나 이쪽이나 별 소득은 없는 듯했다.
“설마 밥만 먹고 끝났어? 윤지훈이 데려다주지도 않은 거야?”
“칫. 나도 됐다고 했어.”
“내가 데려다줘?”
고개를 끄덕인 수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까지는 지훈의 마음이 확실치 않았었다. 그런데 직접 지훈의 입으로 전처와의 재결합에 대해 들으니 더 암담해진다. 어른들끼리 밀어붙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윤지훈이 뭐라고 해?”
“전처를 좋아한다고 했어. 다시 시작할 생각인가 봐.”
“뭐? 한 번 이혼했으면 끝이지,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한다고?”
“내 말이 그 말이야. 이혼했으면 각자 갈 길 갈 것이지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부모님들끼리는 결혼 이야기 오고 간다고 했잖아.”
“그랬지. 원래 여자한테 별 관심 없는 남자였으니까 부모님들이 밀어붙이면 될 줄 알았어. 고 여사님 말 들어보니까 전처랑 결혼할 때도 귀찮으니까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다더라고.”
“그랬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설마 해인이도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생각이 있는 건가. 그녀는 지훈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런 변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형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 * *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가로등 불빛이 은은히 빛나는 벤치 아래 우영과 나란히 앉은 해인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민망함을 달랬다. 오랜 친구였지만 이혼녀인 채로 임신 중이란 사실을 알아버린 남사친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짐작이었어. 엄마한테 입덧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거든.”
“그랬구나.”
해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해인은 곧장 우영에게 연락해 만나기로 했다. 아무래도 법적 조언을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집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눈앞이 어지럽고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야겠다 싶어 일어서는데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마침 다가온 우영이 잡아 주지 않았으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놀란 우영이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와중에 그가 산부인과가 있는 병원의 응급실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단 먼저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별문제는 없으며 가끔 산모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의사가 내린 처방에 따라 병원에서 수액을 맞았다. 우영은 말없이 곁을 지켰고 해인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수액을 다 맞고 나왔을 때는 이미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훈이 걱정할 텐데……. 해인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전남편한테는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야지.”
“언제?”
글쎄, 그게 언제일지 해인도 궁금했다. 원래 둔한 것인지 아니면 문제 자체가 너무 어려운 것인지 지훈이 아예 감을 잡지 못한다. 덕분에 해인도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지훈이 보물을 맞추는 것을 보려면 아기가 나올 때 즈음이 아닐까. 그럴 바엔 차라리 아기 양말이 힌트라는 것을 알려주며 오늘이라도 그가 아기의 존재를 아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사실은 아까 네 전남편한테 전화 왔었어.”
“언제?”
“내가 차에 있던 네 가방 가지러 갔을 때.”
“맞다. 내 가방 가져왔으면서 왜 안 줘? 얼른 줘 봐. 전화 왔었다며.”
“내가 받았어.”
“설마 병원이라고 말한 거 아니지?”
“그건 아냐. 근데 내가 너랑 오늘 밤 같이 있을 거라고 했어.”
“뭐?”
해인이 벙찐 얼굴로 우영을 바라보았다. 우영은 제풀에 얼굴이 붉어지며 해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열 받잖아. 너 이러고 있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너 임신한 것도 모르고 이혼까지 했다고 생각하니까.”
“그거야…….”
사정이 있었다. 임신 사실은 자신도 이혼한 후에 알았으니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랬더니?”
“내가 할 말만 하고 그냥 끊어버렸어. 지금쯤 아주 미치겠지?”
“미치고 팔짝 뛰겠다.”
“그래서 아까 화장실 가면서 문자 보내 줬어.”
“뭐라고?”
“지금 여기 00병원 앞 공원이니까 와서 데려가라고.”
그 말과 함께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 이 가로등 벤치를 목표로 삼고 달려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기 온 것 같으니까 나는 도망이나 가야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인은 혼자 남겨졌다. 아니, 그럴 뻔했지만, 빛의 속도로 달려온 지훈으로 인해 다시 둘이 되었다. 헉헉거리는 숨결로 보아 꽤나 급하게 달려왔나 보다. 해인이 앉아 있는 벤치 앞에 쪼그려 앉은 지훈이 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머. 이 남자 땀 좀 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송골송골 빛났다. 이 잘생긴 얼굴을 이렇게 내려다볼 수 있게 되다니. 해인은 잠시 그 얼굴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그가 얼마나 속이 탔을까 싶어 얼른 대답부터 해주었다.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일?”
“그게…….”
“혹시 병원에 왔었어? 어디가 아팠던 거야?”
“아픈 건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말해 줄게요.”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지훈이 해인의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해인에게 자신이 친구보다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기분이 별로였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얼마나 속이 끓어올랐는지 해인은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저 친구는 아는데, 나는 모른다고?”
“지훈 씨가 모르는 게 그것만은 아니지 않나요?”
보물. 보물도 뭔지 모른다. 지훈은 여러모로 기가 죽었다.
“정말 아픈 건 아니지?”
“네. 걱정 말아요.”
“그래. 병원 앞이라 해서 혹시나 하고 걱정했는데 아픈 건 아니어서 다행이야.”
“먼저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경황이 없어서.”
“정말?”
“네?”
“정말 미안해? 나한테 연락 못 해서?”
지훈이 해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우리가 이제 연락을 안 하면 미안한 사이가 됐구나. 친구보다도 못한 것 같아 들었던 서운한 마음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래. 이 정도가 어디야. 지훈은 진심으로 기뻤다. 해인은 이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지훈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건 다른 이야기지만.
“가요. 집에 가고 싶어요.”
* * * 달리는 차 안. 지훈은 운전을 하면서도 해인이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다고는 하지만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피곤하면 눈 감고 잠 좀 자. 도착하면 내가 업고 갈게.”
해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픽 웃어 버렸다. 아까 우린 같은 장소에서 각기 다른 이성을 만나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지훈에게 말할 필요가 없듯 이 남자도 수빈과의 만남을 말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부모님께 불려가서 원치 않는 만남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저 역시 원치 않게 안형준을 만나야 했으니까. 워낙 자기 일은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니 굳이 그런 것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막상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니 겁이 난다고나 할까. 지훈이 아기는 원하지 않고 그냥 연애만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고백하지 못하고 보물이 뭔지 알아내라는 조건을 걸었던 것도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뭔가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지금도 부담이 없는, 정말로 말 그대로의 연애만 원하는 것이라면 아이의 존재가 오히려 그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이 연애를 시작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의사를 좀 더 명확히 알고 싶었다.
“저기, 연애하자고 했잖아요. 나랑.”
“그랬지. 그게 왜?”
“단지 연애만 원하는 건가요?”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요. 그게. 나랑 결혼 중에는 그런 말이 없다가 이혼하니까 연애하자는 것이, 혹시…….”
“…….”
“미래나 책임 같은 건 그냥 벗어던지고 편하게 즐기는 뭐, 그런…….”
해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지훈이 갓길로 차의 방향을 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은 해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찰나 맞은편을 달리던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스쳐 지나가며 그를 비춰 주었다. 뭐랄까. 약간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살짝 슬퍼 보이기도 하고.
“해인이가 내 말을 오해했구나.”
“오해……라뇨?”
“나는 말이야. 다시는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야.”
“…….”
“주해인, 네가 아니면.”
말을 마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에 머리를 박았다. 저기,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한 후에 머리를 박으면 어쩌라는 겁니까. 해인은 자기도 머리를 박아야 하나 순간 고민했다. 제 질문이 그를 자극했음을 알았지만 그래도 뭐든 명확한 것이 좋으니까 묻고 싶은 것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이어질 다음 말이 듣고 싶은데 이 남자 머리를 너무 오래 박고 있는 거 아냐? 간혹 차들이 지나다녔지만 차 안의 세상은 고요했다. 운전대에 머리를 기댄 채 지훈은 탄식 아닌 탄식을 하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죽일 놈이야.”
“저기,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해인은 뒤늦게나마 지훈을 위로해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혹시나 해서 한 말이었는데. 정말 혹시나 해서. 우리에겐 이미 아이까지 있으니 연애놀음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아무래도 너무했나 보다. 한숨을 푹 내쉰 지훈이 머리를 들고 해인을 보았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불안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했을 땐 자유를 빙자해 방치했으며 이혼까지 해놓고는 이제 와서 뒤늦게 연애라니. 해인으로선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게다가 미션으로 준 보물은 알아내지도 못하고 있고. 자격은 없지만 제 마음이 절대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사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어. 해인아. 나랑 다시 결혼하자.”
“…….”
“근데 이 말을 먼저 하면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리고 집에서 쫓겨날까 봐 그냥 편하게 연애라고 한 거야. 그러니까 해인아!”
네가 계속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너와 헤어져 밤에 너를 찾으러 다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다시는 빨간 스포츠카 그놈이 네 전화를 대신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외에도 네게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 하자.
“나랑 다시 결혼할래?”
순간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이 별처럼 빛나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