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누나는 내 스타일.2022.02.24.
후회라는 건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후회라는 것이 참 힘들었다. 그리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것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하지만 조금 전 빛났던 해인의 눈동자를 생각하며 지훈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물론 돌아오자마자 그렇지는 않았어. 너랑 다시 한집에 살면서 네가 있던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했고 네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했던 일인지 깨달았으니까. 이혼이 후회되었고, 왜 했나 싶고, 내가 미쳤구나 싶고. 그래서 일단 연애부터 하자고 한 거야.”
쉬지 않고 쏟아 낸 말. 그 안에 모든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해인아. 너는 어때?”
순간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여러모로 벅차오르면서도 또 여러모로 복잡했다. 결혼이란 것이 원래 집안까지 연관되는 문제인지라 시부모님들 생각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지훈의 이 말을 간절히 기다렸음에도 해인은 쉬이 자신의 진심을 열어 보일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잘할게.”
분명히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훈이 서둘러 잘한다고 하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남자 이렇게 꼬리를 내려도 되는 거야?
“푸흣. 보물도 모르면서.”
“일주일. 일주일만 시간을 줘.”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는데 갑자기 일주일을 달란다. 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이 꼭 필요한가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시간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뭐, 그런 말이에요.”
“당연히 의미 있게 만들어야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맞힐 거야.”
“그게, 무슨 수를 쓴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오늘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어딘가 숨어 있던 불안한 마음들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한시라도 빨리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훈이 정색을 하니 더 기다려주는 것도 좋을 듯했다.
“아니야. 그게 우리 연애 시작의 조건이었는데 내가 무임승차할 수는 없지. 해인이의 보물이 뭔지 알아야 정말 자격이 있을 것 같아.”
“그런 자세는 좋은데, 그렇다고 꼭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듣고 나면 무임승차라는 생각 같은 건 안 들 텐데? 해인은 잘 생각해보라는 듯 진지하게 지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훈은 그 말이 마치 포기를 뜻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지 마. 해인이한테 중요한 건 나한테도 중요한 거니까 내가 꼭 알아낼게.”
“그렇긴 한데, 그게 자신감이나 열심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지금 나 무시해?”
“느껴져요?”
“응.”
“미안해요. 내가 너무 진심으로 대답해서.”
“알면 됐어.”
풀죽은 한마디 후엔 작은 숨소리만 이어졌다. 상처받았나. 도무지 맞출 것 같지가 않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냥 내가 말해주고 싶은데…….”
“안 돼. 기다려.”
“그럼 힌트라도 하나 더 드릴까요?”
“됐어. 나도 자존심이 있지.”
건투를 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아기를 상대로 자존심을 세우는 아빠라니……. 해인은 한숨을 내쉰 후 입을 꾹 다물었고 지훈도 그 이상은 말이 없었다. 기다려도 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해인이 지훈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혹시나 화났나 싶어서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갔더니 기다렸다는 듯 지훈이 그녀를 당겨 안았다. 이어 슬며시 키스까지 해 버린다.
“자격은 자격이고, 이건 하루도 못 기다리겠다.”
그러면 그렇지. 해인이 가볍게 웃었고 웃음소리마저 삼킨 키스가 한동안 이어졌다. 차는 한참 후에야 다시 움직였다. 지훈은 운전을 하면서도 한 번씩 해인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보물은 이미 뒷전이면서도 연애는 기어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아침부터 결재서류가 올라왔다. 지훈은 한참이나 서류를 검토하고 사인을 반복했다. 잠시 쉬나 싶었는데 상진이 사진 한 장과 초대장을 내밀었다.
“뭐냐?”
“일단 보세요.”
“줄리아 김이랑 그 옆에는…….”
“지오입니다. 요즘 대세 아이돌. 인기가 식을 줄 몰라요.”
사진을 물끄러미 보던 지훈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갔다.
“우리 제품이네.”
스타일리스트 줄리아 김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루비엘 가방을 협찬해 주었었다. 루비엘은 한국의 구X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협찬을 한다고 해서 그녀가 가방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인사인지라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자동차부터 시작해 화장품이나 패션계까지 다양한 협찬이 줄을 이었다. 줄리아는 자신이 입사한 회사의 패션 브랜드 제품으로 미국 영부인을 스타일링해 회사의 가치를 상승시켰을 뿐 아니라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의 스타일링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지오의 뮤비 촬영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이슈였다.
“지오랑 함께 있을 때 찍혀서 더 인기입니다. 백화점마다 판매량이 급증했다네요. 신온 백화점은 벌써 품절이고요.”
“어머니 신나셨겠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지훈이 초대장 안의 내용을 살폈다.
“무슨 초대장이야?”
“지오가 줄리아 김을 위해서 디너 파티를 연다고 합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잘 마친 기념으로. 협찬해 준 분들께도 몇 장 보냈다며 저희에게도 보내 주었습니다.”
“음. 선상 파티라!”
“꼭 가셔야 합니다.”
“줄리아랑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런던에서 열렸던 패션 위크 때 만나 이름을 주고받았었다. 가끔 연락하자며 서로의 연락처를 공유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업적인 측면이 강했다.
“친하지도 않은데 초대장까지 보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줄리아 김이 미국에서도 우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 좋겠지. 근데 내가 이런 파티까지 직접 가야 할까? 난 이런 자리는 별로인데…….”
“줄리아보다는 지오가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아시잖습니까. 줄리아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지오는 그게 아니죠. 회사를 위해서 생각하세요. 내일 저녁 일정도 없으시니까.”
지오가 중요하긴 하지. 개인적으로 파티는 별로였지만, 사업적으로 봤을 때 파티는 사실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 어쩔 수 없이 가야겠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해인에게 파티 이야기를 했는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줄리아 김. 그 이름 하나로 지훈은 해인에게 개선장군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돌고래 비명처럼 울리는 환호 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좋긴 한데 이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좋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아무튼, 그래도 좋았다. 보물로 인해 애가 탔던 상처들이 충분히 아물 정도로. * * *
블랙 슈트로 깔끔한 멋을 낸 지훈과 은은한 핑크빛 롱 드레스를 입은 해인이 배 위로 올라왔다. 파티는 이미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지훈이 해인의 손을 잡고 배의 한가운데 빛나는 조명 아래 있는 줄리아에게 향했다. 지오와 함께 있는 그녀는 이미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에 금빛 브로치 장식으로 가슴에 포인트를 준 그녀의 모습은 거기에 있는 누구보다도 세련되어 보였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줄리아가 다가오는 지훈을 발견했다. 이야기를 멈춘 그녀가 지훈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허그를 하며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지훈 씨.”
“반가워요. 줄리아.”
인사를 마친 지훈이 멋쩍게 해인을 바라보았다. 줄리아에게 그녀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이쪽은 음, 마이 와이프.”
“와우. 만나서 반가워요.”
줄리아는 지훈에게 그랬던 것처럼 해인에게도 허그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반가워요. 줄리아. 음, 그리고 저는 지훈 씨 전 아내예요. 이혼했거든요.”
“리얼리? 와우. 원더풀. 자유로운 영혼들이네요.”
줄리아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활짝 웃어 보였다. 재미교포 2세인 그녀는 한국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한국어를 완벽히 구사했으며 한국 역사나 드라마에도 관심이 많았다. 줄리아의 격한 환대에 곁에 있던 지오까지 덩달아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어느새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언제 왔는지 수빈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오와 잘 아는 사이인지 지오의 곁에 찰싹 붙어서 귀엣말을 나누기도 했다. 해인은 줄리아와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훈은 다른 지인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내내 지오와 뮤비에 관해 이야기하던 수빈이 줄리아를 향해 말했다.
“뮤비 쿠키 영상 봤는데 의상들이 정말 멋졌어요. 저도 언제 한번 줄리아의 스타일링을 받고 싶네요.”
“감사해요. 멋진 몸을 갖고 계시니까 누가 하더라도 아름다울 거예요.”
“그러잖아도 화보 촬영을 하나 준비 중이긴 해요. 빈티지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촌스럽지 않게 구현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진 않은 것 같아요. 빈티지가 대중적일 수가 있을지…….”
수빈이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해인을 쳐다보았다.
“빈티지가 충분한 가치를 가지지 못한 적이 있기는 했죠.”
“그렇죠? 확실히 줄리아 스타일은 아니죠?”
“네?”
줄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빈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것이 자신이 한국말을 잘 못 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사이 지훈이 다시 해인의 곁으로 돌아왔고 수빈은 이내 말문을 닫아버렸다. 미소를 머금은 해인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줄리아를 향해 말했다.
“칸 영화제에서 샤를리즈 무어의 의상 잘 봤어요.”
“어머. 한참 됐는데 그걸 기억하세요?”
“그럼요. 그 밑단 자른 하얀 드레스 정말 멋졌어요.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을 충분히 살려 주었잖아요. 빈티지의 대중화는 샤를리즈 무어의 하얀 드레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해인의 말에 줄리아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맞아요. 원래는 롱 드레스였는데 밑단을 잘라서 내가 빈티지로 만들어버렸죠. 세상에, 그걸 기억하다니…….”
“마르셀로 벤자민과 촬영한 사진도 진짜 멋있었어요. 칸 패션 사진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전시작품으로 걸렸었잖아요.”
“그것도 보셨어요?”
줄리아의 눈빛에 아까보다 더한 호감이 들어찼다.
“그럼요. 제가 줄리아 김 팬인걸요.”
해인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반면 의기양양해진 지훈이 보란 듯이 해인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맞아요. 사실 여기 올까 말까 망설였는데 우리 해인 씨가 줄리아 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나도 같이 온 겁니다.”
한바탕 웃음이 이어졌다. 찰나 수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주위에 몰린 사람들, 심지어 파티의 주인인 지오까지도 해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수빈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 대통령 딸이 취임식 때 입은 의상도 멋졌어요. 흑과 백을 섞어 만들었던 원피스요. 심플해서 밋밋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제가 보기엔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였어요.”
“아, 네. 고마워요.”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표한 줄리아가 다시 해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듯.
“혹시 해인 씨도 그 옷을 봤나요?”
“물론이에요. 단순히 옷만 입혔다기보다는 그 옷을 통해 화합과 공존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자 스타일리스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었어요. 대통령 취임식이니만큼 옷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니까요. 그리고 다음 날 지면에서도 줄리아 김이 옷을 통해 구현해 낸 화합의 의미에 많은 찬사를 보냈었고요.”
“그랬어요. 단순히 옷만 보지 않고 그래도 누군가가 내가 구현해낸 옷의 의미를 알아봐 줘서 무척 기뻤답니다.”
줄리아가 해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해인 씨.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아까 인사를 했음에도 줄리아는 해인에게 다시 한번 포옹을 통해 감사를 표했다. 그것을 보고만 있을 지훈이 아니었다. 괜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 역시 우리 해인이는 어디에 있든 빛이 나네. 어깨가 으쓱해진 지훈이 줄리아를 보며 강조하듯 말했다.
“마이 와이프.”
“그런데 이혼은 왜 했을까. 이렇게 멋진 분인데.”
뼈를 콕 찌르는 줄리아의 말에 지훈은 죄지은 사람처럼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줄리아가 해인을 향해 짓궂게 물었다.
“기왕 이혼했으니까 새로운 남자 어때요? 내가 멋진 남자 소개해 줄 수 있는데…….”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던 지오가 때는 이때다 싶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 어때요? 나 이 누나 진짜 마음에 든다. 얼굴부터 말투까지 전부 내 스타일.”
주위에 있는 모두가 웃었지만, 웃을 수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 지훈의 눈동자가 맹렬히 불타올랐다. 애쉬블루 빛 머리카락에 곱상한 용모의 지오는 많은 히트곡뿐만 아니라 작사 작곡까지 가능한 능력 있는 솔로 뮤지션이었다. 키도 아담해 누나들의 감성을 자극할 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훈 역시나 그렇게 알고 있었고 중요한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오가 해인을 향해 ‘누나는 내 스타일’이라고 했던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고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