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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우리 보물이. (23/92)

27. 우리 보물이.2022.03.03.

천천히 해인이 했던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소중하고, 자신과도 관련이 있고……. 그와 동시에 서랍장에서 아기 양말을 보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해인은 그것이 임신한 친구 선물이라고 했었다. 그날 살짝 당황한 것 같기도 했었는데…….

16549619430181.jpg‘뭔데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냐고.’

16549619430189.jpg‘당신이 고생해도 될 만한 아주 가치 있는 거니까.’

16549619430181.jpg“설마…….”

16549619430197.jpg“스테이크 썰다 뭐 하는 거니? 혹시 내가 너 아기 때 보물같이 귀히 여겨서 감동이라도 받은 거니? 그런 거면 수빈이랑 결혼하고. 일단 고기는 먹어야 할 것 아냐.”

나이프에 잘린 스테이크가 포크에 찍힌 채 그대로 있다. 지금 고기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지.

16549619430181.jpg“어머니. 혹시 저 가지셨을 때 입덧 같은 것도 하셨어요?”

16549619430197.jpg“말도 마. 내가 진짜 다른 것은 몰라도 입덧이 끔찍해서 둘째를 포기한 것도 있거든. 어찌나 심하던지 먹는 것마다 토하고 사람 많은 데 가면 현기증 나서 주저앉고. 너는 진짜 배 속에서부터 얼마나 나를 고생시켰는지 알기나 해?”

해인이도 그랬다. 성북동에서 밥을 먹고 왔던 날 거리에서 주저앉았고 집에서는 토를 했다. 지훈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왜 몰랐을까.

16549619430181.jpg“이런 바보 같은…….”

16549619430197.jpg“어머. 너 그게 무슨 말이니?”

16549619430181.jpg“어머니.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앞으로 효도할게요. 진짜요. 그런데 오늘은 가 봐야겠습니다.”

16549619430197.jpg“아들! 나 혼자 밥 못 먹거든? 갑자기 어딜 간다고 그래?”

16549619430181.jpg“죄송합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한 지훈은 서둘러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전화를 하며 달리듯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신호음은 가는데 해인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16549619430181.jpg“해인아! 전화 받아.”

지훈이 계속해서 전화를 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차에 오른 지훈이 곧장 시동을 켜고 성북동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해인이 음식에 대해 변덕이 심해진 것도 입덧 때문일 수 있었다. 아직 확인된 사실이 아님에도 지훈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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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성북동으로 간 해인은 제대로 된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설거지를 하느라 분주했다. 새엄마가 초대한 손님들이 정원에서 생일 축하 파티를 하는데 요리할 사람만 불러서 잔일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어쩐지 작년까지는 아빠와 함께 밖에서 식사를 했었는데 왜 집으로 부르나 싶었다. 손님들 앞에서 호호 웃으며 네가 수고 좀 해달라 부탁하는데 못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앞치마까지 챙겨입고 설거지도 하고 음식도 서빙해 주었다. 그러는 내내 세나는 음식만 집어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인이 다시 설거지를 하려고 수세미를 집어 들 때였다. 은근슬쩍 다가온 세나가 아양이라도 떨 듯 말했다.

16549619460263.jpg“언니. 나 돈 좀 줘.”

16549619430189.jpg“…….”

16549619460263.jpg“아빠가 내 카드 다 막아 버려서 정말 쓸 돈이 한 푼도 없어. 정말 딱 쓸 만큼만 주신다고.”

해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세나를 바라보았다. 맘 같아선 수세미로 저 입술을 박박 닦아주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틈만 나면 호캉스를 즐기다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게 회사까지 따라가서 갑질은 왜 했을까.

16549619460263.jpg“돈 있을 때 언니 노릇이나 한번 해보라고. 언니가 뭐 언제 언니 노릇 한 적 있어?”

16549619430189.jpg“넌 동생 노릇 제대로 했니? 네가 진짜 동생처럼 굴면 난 언제든 네 언니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적어도 너하고는 피가 섞였잖아. 그런데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양심이 찔린 세나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또 말대꾸를 할 줄 알았더니 별일이다.

16549619430189.jpg“얼마나 필요한데?”

16549619460263.jpg“한 삼 백?”

16549619430189.jpg“삼 백이 누구 집 개 이름이니?”

기가 막힌 해인이 툭 쏘아붙였다. 얘는 정말 돈을 너무 우습게 안다.

16549619430189.jpg“알바라도 해서 네가 벌어서 써. 네가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부족하면 그땐 얼마라도 보태 줄 거니까.”

해인이 딱 잘라 말했다. 또다시 거절당한 세나가 입을 삐죽 내밀며 해인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이 난 듯 새침하게 말했다.

16549619460263.jpg“형준 오빠한테 연락 왔더라.”

16549619430189.jpg“그 남자가 왜?”

16549619460263.jpg“그냥 언니랑 만났다고 나도 한번 보자던데?”

16549619430189.jpg“아직도 연락하고 그랬었어?”

16549619460263.jpg“가끔 하기는 했었지. 1년에 한두 번 정도?”

자신을 불러서는 아버지 회사를 두고 협박해놓고 세나까지 만난다고 하니 해인은 기가 막혔다.

16549619430189.jpg“웬만하면 하지 마. 만나지도 말고.”

16549619460263.jpg“언니 너는 그게 문제야. 언니 하는 일도 결국 인맥이 중요한데 너무 도도해서 그게 되겠냐고. 언니는 언니 하는 일하고 진짜 성격 안 맞는 거 고쳐야 해.”

16549619430189.jpg“사람 보는 눈이 없는 너보다는 나으니까 내 말대로 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난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해인을 다그쳤다.

16549619517019.jpg“얼음 동동 띄워서 수정과 내오란 지가 언젠데 아직이니? 내가 이렇게 직접 들어와야겠어?”

16549619430189.jpg“아, 그게 설거지가 너무 밀려서요. 수정과 저기 있는데…….”

해인이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어 보이며 식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식탁엔 이미 여덟 잔이나 되는 수정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난 이렇게 바쁘니 마시고 싶으면 새엄마가 직접 가져가시라는 듯.

16549619517019.jpg“너는 머리가 나쁜 거니? 왜 그렇게 일의 순서를 몰라? 지금 손님들 기다리고 있…….”

16549619430181.jpg“머리가 나쁘다니요?!”

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후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놀란 해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지훈이 서 있었다. 언제 왔을까. 다이닝룸 안에 있던 난영과 세나 또한 갑자기 나타난 지훈으로 인해 당황스러웠다. 지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난영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는데 해인은 앞치마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세나는 원피스 차림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문이 열려 있어 이런 푸대접을 받는 해인을 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한남동 집으로 두 모녀가 찾아 왔던 그 날이 오버랩되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6549619430181.jpg“누가 손에 물 묻히라고 했어? 누가 우리 해인이를 이따위로 대접해?”

지훈은 난영이 아주 잘 듣도록 언성을 높여 또렷또렷 말해 주었다. 그러고는 매섭게 세나를 노려보았다.

16549619430181.jpg“너는 왜 손이 깨끗해? 딱 봐도 우리 해인이 연약한 거 안 보여? 저런 일은 뚱뚱한 네가 해야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세나는 뚱뚱한 편이 아니었다. 단지 키가 큰 해인에 비해 작고 살이 더 있을 뿐이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누가 봐도 신데렐라와 계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16549619460263.jpg“어머. 누가 뚱뚱하다고 그러세요? 기가 막혀서. 형부는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16549619430181.jpg“누가 아직도 네 형부…….”

속사포처럼 나오던 말이 잠시 끊겼다. 우리 해인이를 이제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 같으니 결국은 다시 형부가 될 것 같아서. 분노를 삼킨 지훈이 해인에게로 성큼 다가가 손수 앞치마와 장갑을 벗겨 주었다.

16549619430181.jpg“여기서 이 고생을 할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가둬 놓을 걸 그랬어.”

피식. 해인의 입가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게 무슨 고생이라고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할까. 오늘 분명 어머니를 만나 같이 식사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벌써 끝난 건가?

16549619430189.jpg“약속 있었잖아요. 벌써 끝난 거예요?”

16549619430181.jpg“우리 해인이 보고 싶어서 일찍 와 버렸어. 가자. 집에.”

지훈이 해인의 손을 잡고 다이닝 룸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을 걷더니 이내 멈춰 서서는 난영을 바라보았다.

16549619430181.jpg“앞으로 우리 해인이 오라 가라 하지 마세요. 아무나 데려다 일 시켜도 되는 사람 아닙니다.”

16549619517019.jpg“내가 언제 일을 시켰다고…….”

16549619430181.jpg“전에도 느꼈지만 아무리 친딸 아니라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16549619517019.jpg“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는 건가.”

16549619430181.jpg“하! 제 말이 심합니까? 그럼 저기 있는 저 딸한테도 뭐든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말이 심하다는 것을 알지만 해인이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만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배 속에 우리 귀한 보물이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해인은 지금 우리 보물이와 함께 왕후의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미칠 것 같은데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조금만 빨리 알았어도 오늘 이곳에 오지 못하게 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더해졌다. 해인은 지훈의 손이 이끄는 대로 그를 따라갔다. 인생에 있어 누군가 제 편을 들어 줄 때의 든든함이 이런 걸까. 그의 반응이 과하다 싶으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 입가엔 자꾸만 미소가 흘렀다. 사실 설거지는 큰일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법적 엄마이니 생신날 설거지 한번 해주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싶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의붓딸과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며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새엄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불편한 마음을 숨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 * * 어느새 차 앞까지 와 해인을 조수석에 앉힌 지훈이 안전벨트까지 채워 주었다. 얼핏 그녀의 배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지훈이 천천히 운전석 문을 열고 앉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16549619430189.jpg“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어머님과는 벌써 식사가 끝난 거예요?”

전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답답했는데 이젠 알 것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 건지…….

16549619430181.jpg“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해.”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서. 아니, 그보다는 가슴이 떨리고 입술도 떨리는 것 같아서 잠시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인은 갑자기 비장해진 그로 인해 얼떨떨했다. 어머니와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아까 봤던 모습 때문에 아직도 기분이 별로일까. 뭔가 미묘하긴 했지만 멋짐의 여운 탓인지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지훈은 해인의 손만 꼭 잡을 뿐 별말이 없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해인이 먼저 손을 빼내고는 부러 그를 마주 보았다.

16549619430189.jpg“어머님과 무슨 일 있었어요?”

16549619430181.jpg“응. 있었어. 아주 좋은 대화를 나누었어. 내가 태어나서 나눈 대화 중에 가장 도움이 되는.”

16549619430189.jpg“무슨…….”

16549619430181.jpg“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이 터진다는 남자의 얼굴에 얼핏 기대감이 보이는 것 같다.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그 검은 눈동자엔 자신이 담겨 있고. 그 눈동자가 그윽해지는 것으로 보아 뭔가 야한 걸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음……, 일단 별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네.

16549619430189.jpg“내가 만져 봐서 아는데, 당신 가슴은 절대 터질 가슴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해인이 피식 웃으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이 가슴은 자신이 장담한다는 듯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순간 지훈이 해인을 끌어안았다. 역시나 전개가 야해지는데?

16549619430189.jpg“지훈 씨?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요.”

16549619430181.jpg“가만히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16549619430189.jpg“이야기가 맞긴 해요? 이야기가 한다면서 왜 몸부터 쓰냐고요.”

16549619430181.jpg“가만히 좀 있어.”

지훈은 버둥거리는 해인의 머리를 꾹 눌러서 제 가슴에 파묻어 버렸다. 정답을 맞출 것이라는 기대를 아예 하지 않는 것 같아 은근 얄밉다. 그 보물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 줄 누가 알았겠나.

16549619430181.jpg“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해인과 자신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혹시 그것 때문에 해인이 떠나지 못한 것이어도 좋았다. 아이를 키우며 해인이와 살아갈 남은 생이 기대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인이 말하는 보물이 꼭 우리의 아이였으면 좋겠다.

16549619430189.jpg“대체 무슨 말인데…….”

16549619430181.jpg“지금 내가 생각하는 보물이 정답이었으면 싶은데…….”

16549619430189.jpg“…….”

16549619430181.jpg“아니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순간 해인의 심장이 쿵 하니 내려앉았다. 드디어 우리 보물이를 알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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