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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손을 묶을까요? (24/92)

28. 손을 묶을까요?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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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하룻밤은 어떤 의미였을까. 보물을 말하는 순간 잠잠해진 해인은 자신보다 더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잔잔한 고요 속에서 지훈은 일종의 감격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명의 신비가 우리에게도 선물처럼 왔었구나. 숙연해진 해인을 보며 확인이라는 절차는 이미 무의미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몰라서 미안하다고? 아이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아니면 그 하룻밤으로 아이를 만든 자신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음, 이건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르니까 패스.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던 지훈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말을 내뱉고 말았다.

16549619671103.jpg“무슨 생각해?”

16549619671108.jpg“이 남자가 갑자기 왜 아무 말도 안 하나…….”

16549619671103.jpg“아!”

16549619671108.jpg“이 중요한 상황에 왜 하필 이런 질문을 하나…….”

16549619671103.jpg“아!”

16549619671108.jpg“왜 계속 아, 만 하고 있나?”

16549619671103.jpg“아! 아……?”

착실히 장단을 맞추던 지훈은 결국 탄식했다. 이 소중하고 중요한 순간에 왜 이렇게 바보 같은 반응만 터져 나오는 걸까.

16549619671108.jpg“이보세요. 윤지훈 씨. 계속 그렇게 아, 만 할 거예요? 보물 안다면서요.”

16549619671103.jpg“아! 음, 그게…….”

16549619671108.jpg“…….”

16549619671103.jpg“너무 떨려서.”

역시 아는구나. 해인은 숨을 내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거칠어지는 그의 심장박동 소리뿐. 말을 해. 왜 보물이 내 아이냐고 묻지를 못하냐고. 답답해지던 그 순간 지훈이 해인의 몸을 살짝 풀어내며 이마에 머리를 맞댔다. 서로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큼의 거리였다. 눈치도 없는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16549619671108.jpg“하아.”

속도 모르는 남자는 그것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일단 키스부터 한다. 짧은 순간 입술이 맞물리고 가슴도 뜨거워졌다.

16549619671103.jpg“그래서 술을 끊은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물었지만, 대답은 쉬웠다.

16549619671108.jpg“뭐, 그렇죠. 좋을 리가 없으니까.”

16549619671103.jpg“오늘은 매운탕이 먹고 싶어 갈비탕이 먹고 싶어?”

16549619671108.jpg“푸흐흐흐. 이것저것 주워 먹어서 배가 안 고프네요.”

뒤늦은 질문을 하며 지훈은 점점 더 미안해졌다.

16549619671103.jpg“병원 혼자 가게 해서 미안해.”

16549619671108.jpg“그건 약간 서러웠어요.”

16549619671103.jpg“혹시 어젯밤에도 그 친구랑 병원에 간 거였어? 또 주저앉아서?”

16549619671108.jpg“네. 잠시 현기증이 와서 쓰러졌었거든요.”

16549619671103.jpg“미안해.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몰라서.”

해인의 이마에 머리를 맞댄 지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단순히 체했거니 생각하고 약이나 먹으라 했던 자신이 한스럽다. 그 순간 공항에 있을 때 해인이 전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임신 사실을 알고 만나자고 했던 것일까. 날짜를 계산해 보니 얼추 시기가 맞물렸다.

16549619671103.jpg“공항에 있었을 때 말이야. 혹시 보물이 이야기 하려고 전화한 거였어?”

16549619671108.jpg“그랬죠.”

16549619671103.jpg“그런데 왜 안 왔어?”

16549619671108.jpg“갔었어요.”

16549619671103.jpg“응?”

16549619671108.jpg“갔는데 수빈 씨랑 같이 있어서 같이 떠나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란 지훈이 해인의 팔을 꼭 붙들며 마주 보았다. 세상에. 거기를 왔었는데 그냥 갔었던 거였어? 아무리 그렇다고 어떻게 다른 여자랑 떠난다는 생각을 했을까.

16549619671103.jpg“무슨 그런 오해를 했어? 내가 수빈이랑 떠날 이유가 없잖아.”

16549619671108.jpg“오해할 만했어요. 수빈 씨가 팔짱 낄 때 내가 딱 봤거든요.”

16549619671103.jpg“후우. 미안해. 우연히 만났을 뿐이야. 팔짱은 내 허락 없이 제멋대로 한 거고. 내가 바로 빼 버렸는데 그건 못 봤어?”

16549619671108.jpg“차마 못 보겠어서 바로 돌아서 와 버렸거든요.”

지훈은 탄식했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보다니, 밀려오는 착잡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했을 그 순간을 홀로 견디며 너는 아마도 울지 않았을까. 그렇게 돌아서야 했던 그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16549619671103.jpg“내가 죽일 놈이네.”

16549619671108.jpg“맞아요.”

16549619671103.jpg“…….”

16549619671108.jpg“…….”

16549619671103.jpg“빈말은 못 하나 봐?”

16549619671108.jpg“진실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이런 걸 확인사살이라고 하는구나. 지훈은 가슴에 총구멍이라도 난 것만 같다. 아무것도 몰랐으니 비난은 당연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원치 않게 상처까지 주어 버렸다. 아기 양말까지 봤으면서 어떻게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16549619671103.jpg“내가 아기 양말 봤을 때 말해주지 그랬어. 우리 아가, 양말이라고.”

나긋나긋 지훈의 말을 받아 주던 해인은 더 이상 담담할 수 없었다. 우리 아가. 정말 아는구나. 감격과 함께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기다렸던 순간인데 막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16549619671103.jpg“보물이 우리 아가, 맞는 거지?”

16549619671108.jpg“우리 아……가. 그래요. 우리 아가.”

16549619671103.jpg“하아. 진즉 말하지 그랬어. 내가 얼마나 더 나쁜 놈이 되라고.”

16549619671108.jpg“이래저래 얄밉기도 했고, 그리고…….”

16549619671103.jpg“그리고?”

16549619671108.jpg“혹시라도 지훈 씨가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의 반응을 보면 그럴 필요도 없었던 같다. 아니나 다를까. 지훈은 해인의 그 말을 곧장 부인했다.

16549619671103.jpg“그런 말이 어딨어. 우리 아가니까 마땅히 축복받아야지.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아무튼, 하나같이 다 미안해.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몰랐어.”

16549619671108.jpg“진짜 궁금한데 어떻게 알았어요?”

16549619671103.jpg“그냥. 어머니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엔 좀 민망했다. 입덧 때문에 어머니를 고생시킨 아들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16549619671108.jpg“못 맞출 줄 알았어요.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거든요.”

16549619671103.jpg“내가 진짜 바보로 보이긴 했겠다.”

16549619671108.jpg“보물이가 아빠를 똥 바보라고 할까 봐 걱정했죠.”

보물이 아기 태명이었구나. 지훈은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도 흐뭇하게 웃었다. 똥 바보든 뭐든 그저 좋을 뿐이다. 해인이 입에서 아빠란 말이 나왔다는 것도 좋았다. 으흠. 그래도 명색이 아빤데 보물이 앞에서 체면은 차려야 할 것 같다.

16549619671103.jpg“보물이가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16549619671108.jpg“보물이가 전해달라고.”

16549619671103.jpg“보물아. 아빠 용서해 줘. 아빠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으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

아이에게 말을 거는 지훈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해인의 입가로 행복한 미소가 번져갔다.

16549619671108.jpg“하는 거 지켜본다고 그러네요.”

16549619671103.jpg“보물이 귀가 너무 밝은 거 아냐?”

16549619671108.jpg“아빠 닮아서.”

16549619671103.jpg“하하하!”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빠 닮았다는 말이 세상 그 무엇보다 행복했다. 이렇듯 가족이어야 할 사람들이 비로소 함께하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6549619671103.jpg“보물이 아빠 닮아서 천재겠다. 입덧은 심하지 않아?”

16549619671108.jpg“견딜 만해요.”

16549619671103.jpg“다행이네. 우리 보물이는 몇 주야?”

16549619671108.jpg“지금 12주요.”

16549619671103.jpg“내일 병원 같이 가자. 다들 심장 소리 듣는다던데, 나도 듣고 싶어.”

16549619671108.jpg“그래요.”

날도 더운데 계속 지훈의 품 안에 있으려니 답답해졌다. 어찌나 세게 안고 있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16549619671108.jpg“이제 놔 줘요. 옷도 갈아입고 씻어야겠어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이 날아들었다. 부드럽게 맞물리고 어르고 달래듯 간지럽히는 입술은 촉촉하면서도 뜨거웠다. 솜털처럼 곤두선 신경들은 어느새 경계를 풀어 버렸고 결국 축 늘어진 채로 그의 키스를 받아내야 했다. 든든하게 허리를 받쳐주는 지훈의 손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키스가 멈추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9619671103.jpg“같이 씻자.”

16549619671108.jpg“뭘 자꾸 같이 씻자고…….”

16549619671103.jpg“부부였잖아. 배 속에 아기까지 있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이론인즉 그렇다. 부부였었고 심지어 곧 부모가 될 사이였다. 그러나 해인은 지훈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기가 있다 한들 그 하룻밤이 전부였고 그것 또한 불 꺼진 밤에 이루어진 역사였다. 단단하게 손에 잡히던 근육과 간혹 제 몸에 닿았던 땀방울을 느낄 만큼 강렬했던 밤이었지만 시각적으로서의 그 밤은 검고 희미했다.

16549619671103.jpg“같이 씻고 오늘부터 우리, 한 침대에서 같이 자자. 다른 부부들처럼.”

대답도 안 했는데 한술 더 뜨는 남자를 어찌할까. 연애는 이대로 건너뛰려나.

16549619671103.jpg“보물이가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는데?”

16549619671108.jpg“벌써부터 보물이 핑계로 사욕을 채우려고 하면 못써요.”

해인의 거절에도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렸다. 그동안 해인을 혼자 둔 것이 너무 후회되고 아쉬워 더 이상은 한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16549619671103.jpg“부탁이야. 같이 자자. 보물이 맞추면 연애한다고 했잖아.”

16549619671108.jpg“연애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거랑은 상관없는 것 같은데…….”

16549619671103.jpg“혼자 자기 싫다. 같이 있으니까 이렇게 좋은데…….”

아쉬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 끝이 열감을 띠며 귓가를 덮쳤다. 굳이 귓불에 대고 말할 게 뭐람.

16549619671108.jpg“뭐, 그, 그렇게 해요.”

솔직히 거절은 못 하겠어서 대답은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지훈이 소리 내 웃는다. 한 번이라도 튕겨볼 걸 그랬나 싶어 괜히 얄미워졌다. 어쨌든 씻는 건 혼자 씻기로 했다. 그것까지는 차마 부끄러워서 안 되겠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야밤의 재회를 준비했다. 해인이 씻고 나왔을 땐 지훈은 이미 침대에 와 있었다. 그런데 한쪽 턱을 괴고 비스듬히 누운 하체에만 이불이 덮여 있고 상체는 벗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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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면에, 그러니까 불 켜진 상황에서는 처음인데 너무 심한 거 아닌가.

16549619671108.jpg“옷은 입고 와야죠.”

16549619671103.jpg“원래 이러고 자. 걱정 마. 벌거벗지는 않았으니까.”

펄럭, 펄럭. 지훈이 이불을 들썩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보이지도 않았는데 꼭 뭘 본 것 같아 해인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열이 차오르는 것 같아 지훈의 눈을 바라보기도 민망했다. 이런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혼은 했지만 배 속의 아기와 서로의 고백이 꽤 단단한 무언가가 되어 우리를 다시 하나로 엮어 주는 것만 같았다.

16549619671103.jpg“원래 그렇게 무장을 하고 자나?”

16549619671108.jpg“무장이라뇨? 이건 그냥 잠옷입니다만.”

딸기 문양이 그려진 윗도리에 파자마. 세상에 이보다 편한 옷은 없다.

16549619671103.jpg“저번에 보니까 원피스 잠옷도 있는 것 같던데, 그게 더 낫지 않나?”

16549619671108.jpg“하나만 계속 입을 수는 없잖아요. 세탁도 해야 하고.”

16549619671103.jpg“그래. 그런데 지금 여름이야. 더우면 벗어도 된다고.”

16549619671108.jpg“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요.”

16549619671103.jpg“그래. 더우면 부담 갖지 말고 벗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해도 노리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계속 간섭이다. 칫. 해인은 입을 삐죽이며 천천히 침대로 올라갔다. 제 침대임에도 지훈이 저렇게 벗은 몸으로 누워 있으니 꼭 남의 침대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이건 내 침대니까 당당하게 올라가서 눕자, 라고 세뇌를 걸며 겨우겨우 자리를 잡고 누웠다. 눕자마자 리모컨으로 조도를 낮추었다. 아주 끄지 않은 것은 나름의 분위기를 위해서였다.

16549619671103.jpg“저기, 우리 보물이 한 번만 만져봐도 돼?”

말이 보물이지, 어차피 손이 닿는 건 내 배잖아. 저 듬직한 손으로 배를 만지면 기분이 묘할 것 같았다. 더워서 안 된다고 할까?

16549619671108.jpg“그럼, 한 번만 만져요.”

가끔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본심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지금처럼. 해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지훈은 해인을 돌아 눕혔다.

16549619671108.jpg“아니, 왜 사람을 멋대로…….”

16549619671103.jpg“이렇게 뒤에서 안으면 더 제대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지훈이 해인의 몸을 감싸안으며 최대한 제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왼손은 어느새 보물이 있을 그곳으로 향했다. 더듬더듬. 신성한 의식처럼 소중히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야함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인이 떨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보물을 담고 있는 배의 소속은 어디까지나 해인이었으니까. 하지 말자. 야한 생각. 해인은 눈을 꼭 감고 보물이가 아빠를 만날 수 있도록 잠잠히 기다렸다.

16549619671103.jpg“태동은 언제부터 느낄 수 있어?”

16549619671108.jpg“20주 전후로 알고 있어요.”

16549619671103.jpg“아직 한참이나 남았네.”

지훈이 뭔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아무렴 첫술에 배부를까. 태동이 없다는데도 지훈은 아랫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비비고 더듬고 열 일을 하느라 쉼이 없다.

16549619671108.jpg“저기, 한 번만 만진다고 했잖아요.”

16549619671103.jpg“한 번인데?”

16549619671108.jpg“…….”

16549619671103.jpg“아직 손 안 뗐잖아. 그럼 한 번이지.”

16549619671108.jpg“아! 그러네요. 그럼 언제 뗄 예정이에요?”

16549619671103.jpg“내일 아침?”

이 남자가 진짜. 기다리다 못한 해인이 돌아누웠다.

16549619671108.jpg“얼른 자요. 나 오늘 피곤해요. 산모에게 잠이 중요한데 그렇게 벌 받는 자세로 잘 수는 없잖아요.”

16549619671103.jpg“아, 미안. 너무 보물이 생각만 하느라…….”

어쩌다 보니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 틈을 타 지훈은 또 해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었다. 돌아누우니 이렇게 마주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듯. 그런 지훈의 손길에 해인도 점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16549619671108.jpg“자꾸 만지면 편히 못 자요.”

16549619671103.jpg“이게 좋은 거나 예쁜 건 못 참는 손이라서.”

16549619671108.jpg“그럼 손을 좀 묶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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