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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오랜만에 흥분했는데. (25/92)

29. 오랜만에 흥분했는데.2022.03.10.

묶는다고? 역사적인 밤이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지 않나.

16549619881671.jpg“묶어도 뭐, 기를 쓰면 만질 수는 있지.”

괜히 밀리는 느낌이라서 한번 버텨봤다. 해인이도 그냥 하는 말이겠지.

16549619881676.jpg“그럼 자르는 건 어때요?”

16549619881671.jpg“…….”

16549619881676.jpg“내가 좀 심했나요?”

16549619881671.jpg“말하기 전에 생각은 하는 거야?”

16549619881676.jpg“그나마 순화시켜서 자른다고 한 거예요.”

해인은 살벌한 말을 하면서도 무척이나 평이한 표정이었다. 지훈에겐 해인의 그런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 해인이 이런 살벌한 성격이었구나. 괜히 버텼나 보다. 지훈이 볼을 더듬던 손을 거두고 반듯이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16549619881671.jpg“잘 자.”

16549619881676.jpg“충격받은 건 아니죠?”

16549619881671.jpg“죽일 놈 주제에 충격은 무슨.”

이렇게 옆에서 재워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귓가로 해인의 웃음소리가 간질이듯 들려왔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죽일 놈이라도 충격은 받으니까. 그 순간 가슴 위로 따듯한 감촉이 밀려들었다. 해인의 손이 어느새 제 가슴 위로 올라와 있었다. 와! 이런 맛에 같이 눕는 건가. 슬며시 그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흥분은 되었지만, 오늘은 그녀가 원치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6549619881676.jpg“기분이 묘하네요. 옆에 누가 있다는 게.”

16549619881671.jpg“앞으로 익숙해질 거야.”

16549619881676.jpg“든든하기도 하고.”

16549619881671.jpg“다행이야.”

16549619881676.jpg“설레기도 하고…….”

해인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생각해 보면 이 온기가 그리웠다. 지훈의 체취를 느꼈던 아득했던 그 밤이 꿈인 듯 느껴져 가끔은 그게 현실이었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지훈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이 순간도 딱히 현실적이진 않았다. 한번 꼬집어 볼까. 해인은 지훈의 가슴을 살짝, 아주 살짝 꼬집어 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워낙 탄력이 좋아 잡히지가 않았다. 가장 잡기 쉬운 부위가 어디일까 보다 귀가 보여서 얼른 아주 살짝 꼬집어 보았다.

16549619881671.jpg“아!”

지훈의 입에서 터지는 낮은 신음 소리. 역시 꿈은 아니었어. 헤헤,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왜 이러나 싶은 지훈이 해인을 마주 보고 누웠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웃음이 사랑스러워서 함께 따라 웃어버렸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어색해질 것이라고는 피차 예상치 못했다. 그 어색함이 미묘해지고 이어 끈적한 눈빛이 서로를 탐닉하게 될 것도. 그러나 그 후를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뜨거운 입술이 서로를 삼키고, 뜨거운 몸짓이 격렬히 서로를 원하고, 뜨거운 갈구가 침대 위를 점령하듯 덮쳐왔다. 그런데도 처음보다는 아주 부드러운 밤이었다. 보물이를 배려한 지훈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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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출근하자마자 걸려온 수빈의 전화에 형준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훈과 해인의 재결합이 확실해져 가는데 수빈으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수빈은 지훈에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놈이 왜 해인에게는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걸까. 한 번 헤어졌으면 그만이지. 인상을 찌푸린 형준이 책상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에서 음성 파일 하나를 재생시켰다.

16549619910338.jpg-하하! 우리 엘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 전부 우리만의 능력이겠습니까. 외국 유명 브랜드 카피해서 신상인 척 내놓으면 우매한 대중들은 브랜드만 보고 멋있다고 해 줬지요. 다들 멋있다고 하는데 나만 멋없다 하면 이상하니까 결국 군중심리로 휩쓸리는 거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디자이너들에게 은근히 외국의 유명 디자인을 카피하라고 압력 넣고 그러지요. 한국 디자이너 카피했다가는 금방 들통나니까요. 다들 그렇게 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해인의 부친인 주 사장의 목소리였다. 물론 이 대화의 다음엔 주 사장의 말에 격한 동의를 하는 제 아버지의 말도 있었다. 지금은 삭제되었지만. 녹음 파일을 끈 형준의 입가로 비열한 웃음이 흘렀다.

16549619910342.jpg“개, 돼지라고 했으면 더 파급력이 컸을 텐데.”

이 만남은 안성 모직과 엘브가 좋은 관계를 이어갈 때의 일이었다. 그냥 심심풀이로 한 녹음이었고 딱히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보존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런 식으로 쓰게 될지는 몰랐다. 이 파일을 터트리면 지금도 무너지고 있는 엘브에 타격은 불가피할 것이다. 신온에서 투자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불투명한 일일 것이고.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49619910342.jpg“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온 정장 차림의 비서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16549619910338.jpg“실장님. 여름호 매거진 특별판 나왔습니다.”

16549619910342.jpg“거기 두고 나가요.”

형준이 비서가 내려놓고 간 매거진을 집어 들었다. 계간으로 나오는 패션 매거진의 특별판으로 몇몇 셀럽들에게만 보내주는 것이었다. 천천히 매거진을 펼쳐보던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제게는 단순히 녹음 파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6549619910342.jpg“주해인. 네 커리어에 흠집 나기 싫으면 나랑 손잡자.”

  * * * 지훈은 오전에 잠깐 시간을 내서 해인과 함께 병원을 다녀왔다. 처음으로 듣는 태아의 심장 소리. 생각보다 컸던 그 심장 소리에 지훈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해인이 먹고 싶다는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앉아서도 연신 아기 심장 소리에 대해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놀라울 뿐이었다.

16549619881671.jpg“우리 아가 말이야. 심장 소리가 어마어마하지 않아?”

16549619881671.jpg“이순신 장군 심장 소리가 저러지 않았을까?”

16549619881671.jpg“아니면 세종대왕 심장 소리가 그랬을까?”

16549619881671.jpg“혹시 광개토대왕?”

역사를 빛낸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은 거의 나올 지경이다.

16549619881676.jpg“단군 할아버지는 어때요?”

16549619881671.jpg“오오.”

그러잖아도 빛나던 눈동자에 광채까지 솟는다. 저 남자를 어떡하나.

16549619881676.jpg“일단 진정 좀 하시고…….”

16549619881671.jpg“내가 있잖아. 웬만해서는 흥분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거든. 그런 내가 흥분을 했어. 그럼 그건 충분히 흥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야.”

16549619881676.jpg“가치는 당연히 있죠. 근데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니까.”

16549619881671.jpg“이상한 방향이라니? 내 말의 어디가 이상했을까?”

16549619881676.jpg“몰라서 묻는 거예요?”

16549619881671.jpg“어. 몰라.”

조선의 위대하신 분들의 이름도 부족해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면서 정작 지훈은 당당했다. 아무렴. 우리 아이도 당당히 그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16549619881676.jpg“그래서 계속 흥분 상태로 있을 건 아니죠?”

16549619881671.jpg“당분간은 계속 이럴 것 같은데? 우리 아이의 심장 소리가 분명 예사롭지 않았거든.”

16549619881676.jpg“아, 네.”

결국, 해인의 포기가 빨랐다. 진심으로 오랜만에 흥분했던 지훈은 그 후로도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무알코올 샴페인으로 건배를 하고 해인에겐 어서 마시라며 재촉하고는 자신은 아기가 태어나면 할 일에 대해서 긴 서사를 써나갔다. 아들이면, 딸이면 하며 번갈아 하는 이야기들이 지쳐갈 무렵 지훈은 갑자기 진지해졌다.

16549619881671.jpg“저녁에 아버지께 다녀올게. 우리 아기 가진 거 이야기하고, 다시 같이 살게 된 것도 말씀드려야지.”

16549619881676.jpg“놀라시겠어요.”

솔직히 시부모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나름 걱정이 되었다. 딱히 뭔가를 간섭하는 분들이 아니었고 친밀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도 별로 없어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16549619881671.jpg“그렇겠지. 그래도 아기 가졌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야. 아이 기다리셨던 분들이니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수빈의 아버지인 오 회장까지 함께 만나신 것을 보면 이미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텐데……. 지훈은 긍정적으로 말했지만, 해인은 여전히 불안했다. 이혼 전에 아이가 생겼다면 물론 좋아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혼도 하고 각자 서로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그날 저녁. 지훈은 해인이 예상했던 시각보다 훨씬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해인이 걱정하지 않을까 보자마자 기다리던 말부터 해 주었다.

16549619881671.jpg“처음엔 당황하시면서 많이 놀라셨는데 그래도 두 분 다 좋아하셨어.”

16549619881676.jpg“정말이에요?”

16549619881671.jpg“그럼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막혀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면서도 얼떨떨했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려도 되는 건지 모를 일이다. 아이를 기다리셨던 분들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부분이 클 것이라고 해인은 생각했다.

16549619881671.jpg“집으로 식사하러 오라고 하셔서 일단 시간을 봐야 한다고 했어. 언제 즈음 같이 갈 수 있을까?”

16549619881676.jpg“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겠어요. 이번 주말에 어때요?”

16549619881671.jpg“난 아무래도 좋아. 해인이만 괜찮다면. 그럼 본가엔 주말에 가는 거로 하고 성북동에는 언제 말할 거야?”

16549619881676.jpg“조만간 해야겠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혼을 반대하셨던 아빠에게는 좋은 소식일 것이다. 그럴수록 시부모님께 미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만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한강과 맺어졌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잘 일으켜 신온에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했다. * * * 이틀에 걸쳐 실내 스튜디오 촬영과 외부 촬영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해인은 팀원들과 함께 A컷을 고르기 위한 막바지 작업을 했다. 포토그래퍼가 알아서 잘 골라 주었지만 좋은 컷이 많아서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훈은 업무가 많아 오전에만 함께 하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팀원들을 위해 1층 카페로 가서 커피를 사 온 해인이 핸드폰을 들고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지훈에게 긴 문자가 와 있었다. 일은 잘되는지, 아이는 뭐 하는지. 꼭 이미 태어난 아이를 묻는 것 같아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답문을 하는 대신 간단하게 통화로 끝내자 싶어 비상구가 있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며 문 쪽으로 갔는데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먼저 왔구나 싶어 그냥 돌아오려 했으나 들리는 말이 심상치 않아 잠시 멈춰 섰다.

16549619910338.jpg“예! 예! 제가 잘 감시하고 있습니다. 뭐, 지금은 A컷 고르느라 바쁜 것 같아요. 그분도 오전에 다녀가셨던 것 같고요.”

A컷? 그분이 오전에 다녀가? 설마 우리 이야기하는 건가…….

16549619910338.jpg“아니에요. 지난번에 별일 아닌 그 일로 받은 선물만 해도 과분했습니다. 사모님.”

사모님?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16549619910338.jpg“네, 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사모님.”

그렇게 전화를 끊는가 싶더니 해인의 눈앞으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낯익어서 기억을 떠올려 보니 일전에 사무실에서 심 대리가 알려 주었던 한 차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다.

16549619910338.jpg“아니, 왜 여기에 있어요?”

16549619881676.jpg“아! 무슨 소리가 나서…….”

16549619910338.jpg“설마 엿들은 거예요?”

16549619881676.jpg“엿들은 게 아니라 들린 겁니다.”

한 차장의 표정이 당혹스러운 듯 변했다. 이내 사납게 눈을 치뜬 그녀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16549619910338.jpg“아니, 예의 없게 왜 남의 말을 엿듣고 그러세요?”

16549619881676.jpg“엿들은 게 아니라 들린 거라고요.”

16549619910338.jpg“그래서, 무슨 말 하는지 들었어요?”

16549619881676.jpg“네. 들려서, 듣게 되었네요.”

16549619910338.jpg“뭐라고요?”

당황한 한 차장의 두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해인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응시했다. 이전에 그녀가 저를 보며 했던 말이 적잖이 감정을 긁었지만 그릇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적대시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이런 식으로 뭔가를 들키지 않았더라면 해인은 한 차장이 그녀에게 가지는 악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6549619881676.jpg“내가 들으면 안 될 내용이라도 있었나요?”

16549619910338.jpg“…….”

16549619881676.jpg“혹시 나를 감시하고 있었나요? 그 사모님이라는 분의 지시로?”

정곡을 찔린 듯 한 차장이 서둘러 부인했다.

16549619910338.jpg“하, 참. 그만 가서 일이나 하시죠. 괜한 헛소리하지 말고.”

16549619881676.jpg“헛소리?”

해인이 말을 짧게 끊어내며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미 선을 넘었다.

16549619881676.jpg“패션만큼이나 트렌드에 민감한 게 또 있을까요.”

16549619910338.jpg“…….”

16549619881676.jpg“나는 권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어느 쪽이 떠오르는 권력인지 어느 쪽이 지는 권력인지 그 동향을 잘 파악해야겠죠. 패션이든 권력이든 시류를 읽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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