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누나 보고 싶다고.2022.03.13.
한 차장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과 잘 지낼 이유도 굳이 내 사람으로 만들 이유도 없었다.
“그냥 한 차장이 그런 시류를 잘 못 읽는 사람 같아서 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사장 딸이면 다야?”
“사장 사모님 끄나풀보다는 낫겠죠?”
조롱하는 듯한 해인의 말에 한 차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해인은 그런 그녀를 두고 냉정히 돌아섰다. 등 뒤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더는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로 향했다. 굳이 자신을 감시하라는 새엄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잘 지낼 생각까지는 없어도 대외적으로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분열을 보여주는 것은 회사를 위해서도 득이 될 것이 없었다. 밀려오는 착잡함을 털어내려는 듯 옷깃을 툭툭 털어낸 해인이 팀원들이 있는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 * * 바쁜 한 주가 지나고 드디어 주말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해인은 저녁이 되기까지 뭔지 모를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본가에 가기 위해 옷을 차려입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조금씩 배는 단단해지고 제법 볼록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고. 지훈이 밤마다 보물이랑 인사를 한다며 만져대는 통에 반질반질 광택도 나는 것 같았다. 일단 배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품이 넉넉한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어때요?”
“말해 뭐 해.”
“말해 봐요.”
“최고라고.”
그러고는 지훈이 엄지를 척 올렸다. 저런 단순한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닌데……. 이럴 땐 3년 내내 무뚝뚝했던 윤지훈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혼 후 시부모님을 다시 만나러 가는 자리인지라 옷차림부터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복잡했다. 한숨을 푹 내쉰 해인이 원피스의 리본을 마무리했다. 같은 한남동인지라 본가까지는 금방이었다. 지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해인의 손을 잡고 보란 듯이 걷기 시작했다. 대문을 지나고 정원을 지나는 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그렇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맛있는 냄새들이 후각을 자극하며 밀려왔다. 해인에겐 조금 거북한 냄새였으나 맡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윤 회장과 애란은 반가운 얼굴로 해인을 맞아주었다. 곧장 식탁으로 향했고 해인은 그야말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진수성찬과 마주하게 되었다.
“네 시아버지가 종류대로 다 준비하라고 하셨단다. 아이를 가졌으니 입맛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
“아버지, 고맙습니다.”
해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훈이 냉큼 감사 인사를 했다. 괜히 민망해진 해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애란은 팔불출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지훈을 쳐다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식탁엔 여러 음식이 골고루 차려져 있었다. 소고기는 스테이크로 돼지는 갈비로, 닭은 삼계탕으로. 어디 그뿐인가. 대하를 비롯해 생선은 조림이나 구이로 준비되었고 음식에 곁들일 수 있는 샐러드와 갖가지 나물과 국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이것 다 먹고 과일도 먹어야 하니 천천히 먹거라.”
윤 회장이 해인을 바라보며 자애롭게 말했다. 해인은 많은 음식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나름 행복하기도 했다. 성북동에서는 결코 받아 본 적 없는 상차림이었다. 가장 입맛이 당기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집중적으로 먹었다. 유심히 지켜보는 윤 회장으로 인해 부러 더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은 시아버지의 흐뭇한 미소라는 결실을 보았다. 식사가 끝난 후 윤 회장은 지훈을 데리고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서재로 향했다. 애란과 단둘이 남은 해인은 가볍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래. 몸은 좀 어떠니?”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입덧 심한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애란이 해인의 앞으로 샤인머스켓을 밀어 주며 먹으라는 듯 권했다. 배가 많이 불렀지만, 해인은 샤인머스켓 한 알을 냉큼 입안에 넣어야 했다. 약간은 시큼한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 상큼했다. 임신하면 신맛이 당긴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이번에는 꼭 수빈이랑 저 녀석 결혼시키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너 만나서 지훈이랑 헤어지라고 말했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사실 나, 너 만나려고 했었거든.”
애란이 투명한 유리 보트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맑고 투명했던 물이 천천히 연녹색으로 변하며 은은한 차향이 풍겨왔다.
“네 시아버지도 오 회장 만나서 결혼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우리 지훈이가 아직 너랑 같이 살고 있으면 곤란하잖아. 수빈이도 와서 결혼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고. 내 딴엔 이런 기회가 또 어딨겠냐 싶었지. 그래서 너 만나서 우리 지훈이 내쫓아 달라고 하려고 했거든.”
괜스레 죄인이 된 것 같은 해인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지훈이 보물을 늦게 알았다면 자신이 먼저 시어머니와 대면할 뻔했구나 싶어 조금 아찔해졌다.
“한강 그룹이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니. 아이까지 있다는데.”
“…….”
“근데 너는 우리 지훈이가 좋니? 아니면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못 떠나는 거야? 네가 먼저 싫다고 해서 이혼한 거잖아.”
“이혼으로 상심을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사실 지훈 씨가 싫어서 이혼한 것은 아니었고, 아이 때문에 못 떠나는 것도 아니에요.”
“지훈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긴 하는구나.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잘 알아서 하겠지.”
애란이 티포트에 있던 허브차를 잔에 따른 후 해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란은 지훈이 어렸을 때 이야기를 주로 했고 입덧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며 고집이 세서 말을 듣지 않았다는 둥 넋두리를 했다. 지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던 해인은 그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집안끼리의 결합을 막았다고 싫어하실까 걱정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애란은 아쉬워하면서도 흔쾌히 해인의 재결합을 허락해 주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지훈이 소파에 앉은 해인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시댁에 다녀왔으니 많이 긴장했을 것이라며 뭉친 근육을 풀어야 한단다. 잘 먹고 잘 있다 왔는데 그사이 근육이 뭉쳤을까. 사욕을 챙기는 것인지 순수하게 어깨만 주무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해인은 일단 지훈이 하는 대로 가만히 안마를 받아 주었다. 받다 보니 시원해서 그만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무슨 부담스러운 말 하지 않았어?”
“안 했는데요.”
“안 하실 분이 아닌데?”
알면서 뭘 묻고 그러실까. 해인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신경 쓰지 마. 속에 있는 말 그대로 하시는 분이라서 그러니까. 철이 없어서 그러신다 생각하고 이해해 줘.”
“오히려 잘해주시기만 해도 불편해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아는 게 더 나을 때도 있고요.”
“그래.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보물이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아빠랑 엄마랑 뭐 하나 보고 있네요.”
“그래?”
어깨를 주무르던 지훈이 어느새 해인의 곁으로 와 나란히 앉는다.
“그럼. 이렇게 꼭 안고 있어야겠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니까.”
“진짜 핑계가 좋아.”
핀잔을 주면서도 해인은 넉넉히 안아오는 지훈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안고만 있기는 좀 아쉽나?”
“무슨 말이에요?”
“은근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 이젠 아주 멋대로 이상한 생각까지 하시네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보물이의 역사적인 잉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 알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거야…….”
보물이로 밀어붙이니 할 말이 없다. 우리 보물이가 심히 역사적이긴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얼마나 좋아?”
“별로예요.”
“으응? 왜?”
“좋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지훈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3년을 홀로 짝사랑하며 외로웠던 그 순간들을. 자신은 그렇게나 힘들었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단기간에 이루어진 일로만 알고 있겠지. 사랑에 시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저보다 못한 것 같아서 서운한 것은 아직 남아 있었다.
“왜 말을 안 해?”
“말하기 싫으니까.”
해인이 툭 쏘아붙였다. 지훈은 갑자기 뾰로통해진 해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들이대서 짜증이 났나. 괜스레 미안해진 지훈이 멋쩍게 웃으며 해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어깨에 포근히 기댄 해인이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남자가 뭐가 이렇게 좋은지 모를 일이다.
* * * 상사가 하룻밤 사이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서 나타났다. 상진은 지훈의 얼빠진, 아니 정확히는 히죽히죽 웃는 웃음을 보며 성급한 진단을 내렸다. 지훈은 이제 막 발간된 라임트리를 펼쳐보고 있었다. 해인의 스타일링이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라며 아침부터 상진을 붙잡고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단지 너무 히죽거리는 것이 조금 꼴불견이어서 그렇지. 상진이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 순간 지훈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보물은 동대문도, 책도 아니었어.”
“드디어 알게 되셨나요?”
“당연하지.”
“그 보물이 대체 뭐였습니까?”
“우리 아이.”
“네?”
아이? 잠시 아이라는 단어를 재해석한 상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아이가 그 아이라면, 그래. 반미치광이가 되어 나타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허! 그런데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이…….
“혹시 형수님이 아이 가지신 것입니까. 그 아이가 태중의 보물이었고.”
“그래.”
“우와. 이건 진짜 대반전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
상진은 한참이나 축하를 건넨 후 밖으로 나갔고 지훈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다음 결재 서류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상진이 다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는 지훈의 앞으로 태블릿이 내밀어졌다.
“뭐냐?”
“지오가 이번에도 일을 내셨네요.”
무슨 말인가 싶은 지훈이 태블릿 액정을 바라보았다. 작은 방으로 보이는 듯한 한 공간에서 여성복을 입고 있는 마네킹을 끌어안고 있는 지오의 사진이 펼쳐져 있다. 지훈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에 주목했다. 엘브에서 로제라는 브랜드로 출시한 여름 신상이었고 라임트리에서도 화보 촬영으로 공개된 단아한 플리츠 원피스였다.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 자기도 이런 옷 입고 싶은데 남자라서 못 입는다고. 여친 있으면 사 주고 싶다고 했는데, 덕분에 대한민국 남자들 좀 바쁘게 되었다네요.”
“잘……, 됐네.”
“미국으로 출국하신 줄리아 김이 좋아요, 눌러주셨고, 저도 같이 눌러드렸습니다.”
“잘했……어.”
좋은 소식이었지만 지오의 사진을 보며 미간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내가 뭘?”
“그렇죠? 기분 탓이겠죠. 제가 너무 민감했나 봅니다. 저는 상무님이 살짝 아니꼬워하는 것 같아서요.”
“…….”
정곡을 찔린 지훈이 구겨진 미간을 풀며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축하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수님께요.”
“그래야지.”
지훈이 무심히 대답했다.
“으이그. 그렇게 무심하니까 아이 생긴 것도 모르고 이혼까지 하신 것 아닙니까. 진짜 형수님이나 되니까 상무님 받아주셨지, 내가 형수님 같았으면 아이 아빠고 뭐고 국물도 없습니다.”
“너랑은 절대 결혼 안 해.”
“마찬가집니다. 뭐 하십니까. 얼른 전화하세요.”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합니까. 전화하는 거 보고 나갈 거니까 얼른 하세요.”
상진이 떡하니 버티고 섰다. 지훈은 오늘따라 저놈이 왜 저러나 싶었다. 제 표정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순전히 해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재결합과 해인의 임신 소식에 많이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연애, 아니 가정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이건 정말 중요한데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거든. 파티가 있었던 그날, 지오는 분명 해인을 제 스타일이라며 활짝 웃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지훈으로서는 이것을 단순한 이벤트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오가 무슨 사심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사심이라뇨?”
그때였다. 딩동-. 상진의 안주머니에서 알림 소리가 흘러나왔다. 핸드폰을 꺼낸 그가 서둘러 알림을 확인했다.
“뭐냐?”
“아! 지오가 인별에 또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뭐라고 올렸어?”
“지오가 누나가 있었나 봅니다. 외동으로 알고 있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상진이 이내 지오가 남긴 글귀를 읽어나갔다.
“누나, 보고 싶다고.”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뭐라 지껄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