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쉬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 (27/92)

31. 쉬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2022.03.17.

16549620407137.jpg“예에? 지금 뭔 소리 하시는 겁니까?”

16549620407142.jpg“이 자식이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린가 싶은 상진이 멍하니 지훈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라니……. 나? 는 아닐 테고, 그럼 지오? 는 더더욱 아닐 테고. 그럼 누구? 일단 둘 중에 하나겠지 싶어서 더더욱 아닐 것 같은 지오를 선택해 보았다. 나는 소중하니까.

16549620407137.jpg“지오 말입니까?”

16549620407142.jpg“그래. 지오. 어려서 그런지 정신을 못 차리네.”

16549620407137.jpg“어리다뇨? 혈기 왕성한 청년에게. 근데 지오가 누나가 보고 싶다는데 왜 상무님이 화를 내시는지 참, 모를 일이네요.”

상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오처럼 다정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괜히 화가 난 것이겠지. 저리 속이 좁으니 이혼도 당하고 그러는 것이다. 어이구. 정작 정신을 못 차린 사람은 상무님이 아닐까 싶었다. 상진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지훈은 태블릿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해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안심하듯 미소를 지었다.

16549620407142.jpg‘아! 우리 해인이는 연하 싫어한다고 했지.’

그 모습이 상진에겐 흡사 미친놈처럼 보였지만 지훈의 미소는 해맑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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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날 저녁. 해인은 오랜만에 친구 소연을 만났다. 해인이 바쁘다기보다는 무역회사에 입사한 친구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였다. 함께 간단히 밥을 먹고 카페로 향했다. 커피와 함께 레몬티와 마카롱을 주문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소연은 신입사원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한참이나 털어놓았다. 해인은 잠잠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자신의 임신 소식을 전했다. 덧붙여 전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까지.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한꺼번에 전해 들은 소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654962040717.jpg“임신? 임신이라고? 딸랑 하룻밤으로?”

16549620407174.jpg“그렇게 됐어.”

1654962040717.jpg“그래서 전남편이랑 다시 살고 있다고?”

16549620407174.jpg“응.”

1654962040717.jpg“아이 때문에?”

16549620407174.jpg“그건 아니고.”

1654962040717.jpg“아니긴 뭐가 아니야. 일단 같이 살고 봐야지. 아이 아빤데. 아니, 지금 내가 뭐라는 거야.”

소연은 과부하가 걸린 것 같은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이혼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이가 있고 전남편도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1654962040717.jpg“지훈 씨는 아이 좋아해? 너한테도 잘해 주고?”

16549620407174.jpg“응. 아이도 좋아하고 나한테도 잘해 줘.”

1654962040717.jpg“그럼 잘된 거지?”

16549620407174.jpg“그렇지.”

1654962040717.jpg“그래. 지훈 씨만 너한테 잘해 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딨겠어. 정말 잘된 거지?”

소연이 재차 물어왔다. 해인은 걱정하는 그녀를 위해 활짝 웃어 주었다. 친구는 자신이 지훈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 아이 때문에 발목이 잡혔나 싶어 걱정하는 듯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오랫동안 지훈을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말이나 해 줘야 할 것 같다. 지금 당장 말하기는 좀 부끄러우니까.

1654962040717.jpg“그나저나 지오가 오늘 너희 회사 옷 광고 해줬더라?”

16549620407174.jpg“응. 나도 우영이에게 연락받았어.”

1654962040717.jpg“와우. 대단. 그 옷 곧 완판될 거라던데.”

16549620407174.jpg“고맙지, 뭐.”

1654962040717.jpg“너희 회사 옷이 진짜 마음에 들었나 봐. 그건 그렇고 너, 지오 오빠 뮤비 안 봤지? 얼마나 멋진지 알아?”

16549620407174.jpg“나도 봤긴 한데…….”

1654962040717.jpg“뭐? 너 지오 오빠한테 관심 없었잖아.”

16549620407174.jpg“그랬었지.”

뮤비를 본 것은 줄리아 김이 스타일링한 옷들과 분위기를 보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엮이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지오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1654962040717.jpg“근데 이상한 게 있어.”

1654962040717.jpg“지오 오빠는 누나가 없거든. 근데 누나가 보고 싶다고. 대체 그 누나가 누굴까?”

16549620407174.jpg“누나?”

설마, 라는 생각은 잠시뿐 해인은 곧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세상에 누나는 많으니까.

16549620407174.jpg“근데 너는 지오가 그렇게 좋냐? 좋아하면 무조건 오빠야?”

1654962040717.jpg“오빠 맞아. 우리보다 한 살 많잖아. 소속사에서 지오 오빠 나이 속였거든.”

16549620407174.jpg“그래?”

1654962040717.jpg“응. 이 노래 들어볼래? 지오 오빠 목소리 엄청 좋잖아. 진짜 천상의 목소리가 따로 없다.”

소연이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해인의 귀에 끼우고는 음악을 하나 틀어 주었다. 잔잔한 미성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친구의 말대로 목소리 하나는 진짜 예술이었다.

16549620407174.jpg“목소리 좋네.”

1654962040717.jpg“그렇지? 너도 이제야 지오 오빠의 진가를 알게 되는구나. 일단 나가자. 너 임신한 줄도 모르고 선물도 없이 그냥 나왔네. 가자. 내가 선물 사 줄게.”

  * * *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온 해인은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먼저 와 있던 지훈이 현관까지 나와서 해인을 반기고는 핸드백과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까지 받아 주었다.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은 해인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소파 테이블에 쇼핑백을 내려놓던 지훈이 내용물을 확인하며 물었다.

16549620407142.jpg“이게 다 뭐야?”

16549620407174.jpg“아! 그게…….”

당황한 해인이 말을 얼버무렸다. 지훈이 소연의 선물을 싫어할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손에 들려 나온 물건을 확인한 지훈의 미간이 심각하게 꿈틀거렸다. 지오의 사진이 실린 CD.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들어 있었다.

16549620407174.jpg“선물 받았어요. 친구가 지오 CD로 태교하라고.”

소연이 선물을 사 준다기에 신생아용 내복이나 딸랑이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친구는 고민도 없이 저 CD를 골라 주었다.

16549620407174.jpg“친구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받아왔어요.”

성의? 성의 같은 소리 하고 있다. CD를 보는 지훈의 눈이 매서워졌다.

16549620407142.jpg“태교는 보통 클래식 음악으로 하지 않나?”

16549620407174.jpg“그렇기도 하고, 요즘엔 다양한 음악으로 해요.”

16549620407142.jpg“나도 요즘 사람이긴 한데…….”

CD를 앞뒤로 돌려보던 지훈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걸 어떻게 빠개야 하나. 어떻게 빠개서 버려야 속이 다 시원할까. 우리 보물이 태교를 지오의 목소리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6549620407174.jpg“밥은 먹었어요?”

16549620407142.jpg“상진이랑 대충 먹었어.”

여전히 지훈의 눈은 지오의 CD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지오의 사진은 불살라지고도 남을 정도였다. 해인은 그런 지훈의 눈빛을 보며 지오가 불쌍해졌다. 어디 가서 저런 대접 받을 사람이 절대 아닌데…….

16549620407174.jpg“저기, 지오가 우리 회사 옷 광고해 줬다던데…….”

16549620407142.jpg“알고 있어.”

지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상진의 권유에도 지훈은 끝내 해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근데 안 해도 저렇게 잘 알고 있네.

16549620407142.jpg“김 비서가 알려줬거든. 지오 덕분에 그 옷 곧 완판될 거라고.”

순순히 대답하는 입과 달리 눈빛은 CD를 불살라버릴 정도로 강렬하고 살벌했다. 해인은 꼭 무슨 시한폭탄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알면 그 눈빛 좀 어떻게 해 봐. 살벌해서 못 봐주겠네.

16549620407174.jpg“그러게요. 고마운 일이죠.”

16549620407142.jpg“설마 따로 연락 오지는 않겠지? 하기야 우리 해인이는 연하 싫어하니까.”

16549620407174.jpg“연락이라뇨? 아, 그리고 연하, 아니던데요?”

16549620407142.jpg“무슨 말이야?”

16549620407174.jpg“소연이가 지오 팬이거든요. 그래서 정확한 나이를 알고 있더라고요. 우리보다 한 살 많다고. 그러니까 소연이랑 나보다 한 살 더.”

CD를 붙들고 어떻게 빠개 버릴까 궁리하고 있던 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 전체에 퍼지는 기운이 심히도 준엄했다. 사실을 전달했을 뿐인데, 뭘 잘못한 건가?

16549620407142.jpg“그래서?”

16549620407174.jpg“연하가 아니……라고.”

16549620407142.jpg“그런데?”

16549620407174.jpg“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헤헤. 아, 덥다. 저기 나 옷 갈아입고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지훈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해인을 향해 걸어왔다. 얼렁뚱땅 도망가려 했던 해인은 순식간에 허리가 잡혀 그의 가슴으로 밀착됐다.

16549620407142.jpg“설마 연하가 아니라서 좋은 건 아니겠지?”

16549620407174.jpg“에이. 설마요.”

16549620407142.jpg“그래. 그래야 할 거야.”

16549620407174.jpg“그럼요.”

선선히 대답해주는 해인을 바라보던 지훈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16549620407142.jpg“오늘은 친구 만나서 저녁 먹은 게 전부지?”

16549620407174.jpg“그렇죠. 왜요?”

16549620407142.jpg“피곤하지 않을까 해서. 내가 지금부터 좀 피곤하게 할 예정이거든. 마음의 준비하라고.”

16549620407174.jpg“무슨…….”

해인은 갑자기 달아오른 듯한 지훈의 뜨거운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그냥 지오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저 눈이 저렇게 불타오르는 건 무슨 경우일까.

16549620407142.jpg“지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몸에 열이 확 뻗쳐서 불타오르네.”

16549620407174.jpg“그럼, 가서 찬물로 샤워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16549620407142.jpg“물로 끌 수 있는 불이 아니라서.”

지훈의 눈동자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이 남자는 질투도 참 섹시하게 하는구나. 해인은 그의 반응이 웃기면서도 가슴이 설렜다.

16549620407174.jpg“음, 나는 괜찮은데 우리 보물이는 피곤할 수도 있……, 우읍.”

보물이 핑계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왠지 잠자는 사자를 잘못 건드린 느낌이랄까. 입안 깊숙이 침투해오는 그의 격렬한 키스가 전류라도 일으키는 듯 온몸을 타고 흘렀다. 쉬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하듯 그에게 몸을 맡겨버렸다. 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한 손으로는 허리를 안고 한 손으로는 원피스 단추를 풀어버렸다. 하필이면 벗기기도 쉬운 단추 원피스를 입어서 손쉽게 농락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두 손에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밀어보았다. 의외로 금방 밀려나며 겨우 그의 입술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더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앞섶이 시원하다고나 할까. 그와 눈을 마주침과 동시에 그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은 해인은 온몸이 찌릿해졌다. 어쩐지 쉽게 밀려나더라니, 이 모습을 보려고 그랬나 보다. 민망해서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아 버렸다.

16549620407142.jpg“아직도 얼굴이 빨개지면 어떡하나.”

16549620407174.jpg“짓궂어요.”

16549620407142.jpg“아직 시작도 안 했다.”

16549620407174.jpg“…….”

16549620407142.jpg“가자.”

어딜, 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해인은 지훈의 품에 안아 올려졌다. 지훈의 목적지는 분명했기에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안방으로 향하고 있다. 순식간에 침대 위에 눕혀진 해인은 갑작스러운 침대 행에 어안이 벙벙했다.

16549620407174.jpg“저기, 나 아직 씻지도 않았거든요.”

16549620407142.jpg“밥은 먹었지? 체력만 버텨 주면 돼.”

16549620407174.jpg“지금 땀 냄새나는데…….”

16549620407142.jpg“그마저도 향기로운데, 뭐가 문제야?”

순식간에 티를 벗어 던진 지훈이 해인의 옆으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까처럼 한 손으로 해인의 허리를 잡아 바짝 끌어당긴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지훈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해인이 툴툴거렸다.

16549620407174.jpg“뭐 하는 거 거예요?”

16549620407142.jpg“말했잖아. 피곤하게 할 거니까 마음의 준비 하라고.”

16549620407174.jpg“아아니, 초저녁부터 무슨…….”

16549620407142.jpg“말이 많네. 오늘따라.”

씨익. 입꼬리를 늘리며 흘러나오는 웃음에 자비 따윈 없었다.

16549620407142.jpg“다시는 그 입에서 지오 따위가 나오지 않게 해 줄 거야.”

괴롭힌다고 했지만 과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문제가 될 줄이야. 부드럽게 그리고 한없이 여유롭게. 아주 긴 시간이었다. 아주 아주. 지쳐서 잠이 들면 어느새 깨우고 있고.

16549620407142.jpg“해인아. 벌써 자?”

16549620407174.jpg“피곤해요. 이제 좀 그만 놔줘요.”

다리를 옭아매고 끈적하게 붙어서 이어지는 터치가 지루하리만치 계속되었다.

16549620407142.jpg“이런 상황에서 잠이 와?”

16549620407174.jpg“졸려 미치겠어요.”

이후에도 잠은 잘 수 없었다. 여기저기 간질거리며 달라붙는 통에 검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 * *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지훈과 외출을 하기로 했던 해인은 쉽게 잠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피곤이 누적된 탓인지 이상하게 몸이 축 처지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지훈은 혹시나 열이 있나 머리에 손을 짚어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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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20407142.jpg“피곤하면 더 푹 자.”

16549620407174.jpg“일어나야 하는데.”

16549620407142.jpg“괜찮아. 푹 자고 저녁에 외식이나 하자.”

16549620407174.jpg“그래요. 그럼.”

해가 중천인 시각에 일어난 해인이 지훈이 만들어 준 토스트와 우유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먹고 나니 또 나른해져서 소파에 기대고 앉은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여름인데도 왠지 한기가 드는 것 같고.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16549620407142.jpg“저녁에 어디로 갈까? 근사한 곳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16549620407174.jpg“근사한 곳도 맛있는 것도 다 좋은데.”

이상하게 별로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왜 이렇게 밖에 나가기가 싫은 걸까.

16549620407142.jpg“왜?”

16549620407174.jpg“그냥 오늘은 집에서 쉬는 게 어때요? 밥하기도 피곤하니까 그냥 시켜서 먹죠.”

16549620407142.jpg“나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해인이 원하는 대로 하면 다 좋아.”

해인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동자에 근심이 어렸다.

16549620407142.jpg“근데 몸이 많이 피곤한 거야?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이 괴롭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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